『그룬트리세』의 비판적 해석

서론
1857년, 마르크스는 국제적 차원으로 전개된 금융위기가 유럽 전역에 새로운 혁명 시기를 위한 조건들을 창출했다고 확신했다. 마르크스는 1848년 대중 봉기 이후 줄곧 이 순간을 기다려왔고, 마침내 그때가 온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사건들을 준비 없이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경제학 연구를 재개하고 그 완성 형태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하나? 저 야심차고 어려운, 이전에 여러 차례 시작했다가 중단했던 정치경제학 비판을 어떻게 착수할까? 이것이 마르크스가 다시 작업을 시작하면서 자문했던 첫 번째 물음이었다. 두 가지 상황이 답을 결정할 때 핵심 역할을 했다. 마르크스는 특정 이론들의 유효성에도 불구하고, 경제 과학은 여전히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설명하는 인식 과정이 부족하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작성 작업을 개시하기 전에 논거들을 정하고 설명의 순서를 확립할 필요를 느꼈다. 이런 고려들이 마르크스가 방법 문제들에 더 깊이 파고들고 그의 연구를 위한 길잡이 원리들을 구성하도록 했다. 그 결과물이 마르크스의 전체 저작들(oeuvre) 중에서 가장 널리 논쟁 된 수고들 중 하나인 소위 1857년 ‘서설’이었다.

‘서설’에서 마르크스의 의도는 복잡한 방법론적 논문을 쓰는 것은 분명 아니었고, 독자들 이전에 자신을 위해 앞에 놓여 있는 길고 사건들이 많은 중요한 여정에서 그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1840년대 중반 이후 그가 축적해온 거대한 양의 경제학 연구들을 재검토하는 과제에도 필요했다. 그래서 이 논문에는 이론적 범주들의 전개와 표현에 대한 검토와 함께, 특히 새롭게 역사를 요약하는 데 꼭 필요한 역사개념과 연관된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에 대한 몇몇 정식화들, 그리고 여전히 그 해답이 불완전한 비체계적 질문목록이 담겨 있다.

필요들과 의도들이 혼재돼 있고, 거의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기에 작성한데다 무엇보다도 글의 잠정적 성격 때문에 ‘서설’은 극히 복잡하고 커다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서설’은 마르크스가 인식론적 문제들을 거론한 것 중에 가장 광범위하고 세밀한 의견을 담고 있어서, 그의 사상 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참고 문헌이자 『그룬트리세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다.

역사와 사회적 개인
그의 스타일대로, 마르크스는 ‘서설’에서 그 자신의 사상에 대한 설명과 이론적 반대자들에 대한 비판을 번갈아가며 진행했다. 텍스트는 네 절로 나뉜다.
(1) 생산 일반
(2) 생산, 분배, 교환, 소비 사이의 일반적 관계
(3) 정치경제학의 방법
(4) 생산수단(력)과 생산관계, 생산관계와 유통관계 등(Marx, 1973: 69).

첫째 절은 의도 진술, 곧이어 연구 분야 구체화, 역사적 기준에 대한 지적으로 시작한다. 그 역사적 기준이란 ‘우리가 다룰 대상은 우선 물질적 생산이다. 개인들은 사회속에서 생산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결정된 개인생산이 당연한 출발점이다’. 마르크스의 논쟁 대상은 ‘18세기 로빈슨주의자들’(Marx, 1973: 83), 경제적 인간(homo oeconomicus)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신화(Watt, 1951: 112), 또는 부르주아 시대에 전형적인 현상을 태초부터 존재해 온 모든 다른 사회들에게 투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개념들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어떤 노동과정에서도 고정불변인 것으로, 자본주의 관계만의 특성이 아닌 것으로 표현했다. 마찬가지로, 18세기에 출현하여 ‘이전 역사적 시기들에서는 개인을 고정되고 제한된 인간 집합체의 부속물로 만들었던 자연적 속박으로부터 개인들이 벗어나 보이는’ 조건들을 창출한 시민사회(bürgerliche Gesellschaft)가 항상 존재했던 것으로 그려졌다(Marx, 1973: 83).

실제로는, 고립된 개인은 자본주의 시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 그룬트리세』의 다른 문장에서 적었던 대로, ‘인간은 원래 유적 존재, 씨족적인 존재, 군집 동물로 나타난다’(Marx, 1973: 496). 이 집단성이 ‘거대한 작업장, 노동수단과 노동대상 모두를 공급하는 창고, 보금자리, 공동체의 토대(Basis des Gemeinwesens)'(Marx, 1973: 472)가 되는 지구로부터의 전유를 위한 조건이다. 이런 원시적 관계가 존재할 때, 인간의 활동은 직접적으로 지구와 연관된다. ‘노동이 그 물질적 전제조건들과 자연적 통일’을 이루고, 개인은 타인들과 공생한다(Marx, 1973: 471). 유사하게, 경제의 목적이 아직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를 창조하는 것이었던 농업을 바탕으로 한 이후의 모든 경제 형태들에서 도 개인들이 ‘그들 노동의 객관적 조건들’과 맺는 관계는 ‘코뮨의 구성원이라는 존재를 통해 매개된다’. 그는 항상 사슬의 한 고리일 뿐이다(Marx, 1973: 486). 이런 연관에 대해, 마르크스는 ‘서설’에서 이렇게 쓴다.

더 깊이 역사를 거슬러 가면 갈수록 개인 즉 생산하는 개인은 더 큰 전체에 속하며 매우 당연하게도 가족에, 그리고 가족이 확대된 씨족(Stamm)에, 나중에는 씨족들의 대립과 융합으로 나타난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사회에 의존적인(unselbstständig) 것으로 나타난다(Marx, 1973: 84).

비슷한 의견들이 『 자본론』1권에 나타난다. ‘암흑에 쌓인 유럽의 중세시대’에 대해 말하며,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독립적 인간 대신, 우리는 농노와 영주, 가신과 주군, 평신도와 성직자들, 모두가 의존적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개인적 의존은 생산의 사회적 관계뿐 아니라 이 생산의
토대에서 조직된 생활의 다른 영역들도 특징짓는다(Marx, 1996: 88).

그리고 마르크스가 생산물 교환의 발생을 검토했을 때, 그는 교환이 다른 가족들, 씨족이나 공동체들 사이의 접촉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왜냐하면, 문명의 맨 처음에, 독립적 입장으로 만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 씨족 등이다’(Marx, 1996: 357). 그래서 기준이 혈족의 원시적 유대든 중세의 주군과 가신의 결합이든, 개인들은 상호 유대에 의해 결합된 ‘제한된 생산관계(bornirterProductionsverhältnisse)’속에 살았다(Marx, 1973: 162).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가 자연법칙으로부터 도출된 환상이라고 간주한 것에 바탕을 두고 이런 현실을 전도시켰다. 특히 애덤 스미스는 개인들이 사회 밖에서 존재할 뿐 아니라 사회 바깥에서 생산도 할 수 있는 어떤 원시적 조건을 묘사했다. 수렵씨족과 목축씨족들 간의 노동분업이 직업의 전문화를 성취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활과 화살을 만드는데 더 능숙하면 일종의 전사가 되고 나무집을 짓는데 더 능숙하면 일종의 목수가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노동 생산물 중 소비하지 않은 부분을 다른 사람의 잉여와 교환할 수 있게 보장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특정 직업을 가지도록 고무했다’(Smith, 1961: 19). 데이비드 리카도는 사회의 원시 단계에서 사냥꾼들과 어부들의 관계를 노동시간으로 대상화된 상품 소유자들 사이의 교환관계로 보는 비슷한 시대착오적 과오를 범했다(Ricardo, 1973: 15; Marx, 1987a: 300).

이런 식으로, 스미스와 리카도는 그들이 살았던 고도로 발전된 사회의 고립된 부르주아 개인의 생산물을 마치 자연의 자생적 표현인 것처럼 묘사했다. 그들의 저작들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연적이라고 규정된’ 신화적이고 영원한 개인으로 그의 사회적 관계는 항상 동일하고, 그의 경제적 행위는 몰역사적 인류학적 성격을 가졌다(Marx, 1973: 83). 마르크스에 따르면, 각각의 새로운 역사적 시대에 대한 해석자들은 항상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이 태고적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착각했다.

마르크스는 ‘사회 바깥의 고립된 한 개인에 의한 생산은 마치 함께 살고 서로 대화하는 개인들 없이도 언어가 발전했다는 주장만큼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Marx, 1973: 84). 그리고, 18세기의 고립된 개인을 인간성의 원형으로 ‘역사의 결과가 아니라 역사의 출발점으로’ 묘사했던 사람들에 반대해 마르크스는 그런 개인은 오직 매우 발달한 사회관계와 함께 출현했다고 주장했다(Marx, 1973: 83). 마르크스는 인간이 a ζω´ον πολιτικο´ν (zoon politikon), 즉 사회적 동물인 것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으나, 인간이 ‘오직 사회 내에서만 자신을 개인화할 수 있는 동물’이라고 강조했다(Marx, 1973: 84). 그래서 시민사회는 오직 근대 세계와 함께 출현했고 자본주의 시대의 자유 임금노동자는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친 후에야 나타났다. 사실, 자유 임금노동자는 한편으로는 사회의 봉건적 형태들의 해체, 다른 한편으로 16세기 이후 발전한 새로운 생산력들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Marx, 1973: 83). 마르크스가 너무도 명백하다고 생각한 문제에 대해 반복할 필요를 느꼈던 것은 이전 20년 동안 캐리(Henry Charles Carey), 바스티아(Frédéric Bastiat),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의 저작들이 이와 관련된 토론을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적 개인의 발생을 묘사하고 근대 생산은 오직 ‘사회적 발전의 일정한 단계, 즉 사회적 개인들에 의한 생산’에 합치한다는 것을 증명한 후에 마르크스는 두 번째 이론적 요건을 지적한다. 그것은 ‘생산 일반’(Production im Allgemeinem)의 개념에 관하여 고전파경제학자들에 의해 실행된 신비화를 폭로하는 것이다. 생산 일반의 개념은 하나의 추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구체적 단계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범주다. 그렇지만, ‘모든 생산 시대들은 모종의 공통 특질들과, 공통 특성들(gemeinsame Bestimmungen)을 가지므로’, 마르크스는 ‘생산 일반은 그것이 실제로 공통요소를 낳고 고정시키는 한, 하나의 합리적 추상이며’ 그래서 진정으로 그 공통요소들을 불러내고 확정시켜 사고를 통해 현실을 재생산하여 학자에게 쓸데없는 반복을 절약해준다는 것을 인식한다(Marx, 1973: 85).

그래서 추상은 마르크스에게 긍정적 기능을 얻었다. 추상은 더 이상, 그의 초기 헤겔 비판에서처럼 관념주의 철학과 동의어가 아니었고, 그 자체로 현실의 대체물도 아니었으며(Marx, 1975a: 180ff.), 1847년 』철학의 빈곤『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것을 논리적 범주들로 변형시키는 형이상학도 아니었다(Marx, 1976: 163). 이제 그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나중에 명명되는 것처럼)은 확실히 정교해 졌고, 그의 비판적 사고들은 1840년대 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에서 작동하였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추상에 대해 젊은 시절의 편견을 버리고 다시 사고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동시대에 보편적 가치를 지닌 추상적 법칙들의 불가능성을 이론화했던 ‘역사학파’의 대변자들과 달리 마르크스는 『그룬트리세』에서 추상이 인식과정에서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오직 이론적 분석이 모든 역사적 단계들에 유효한 정의들과 특정 시대들에만 유효한 정의들을 구분할 수 있고, 현실을 이해하는데 후자에게 마땅한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때만 가능했다. 비록 추상이 생산의 가장 광범위한 현상들을 표현하는데 유용하였지만, 그 자체로 진정 역사적인 것인 특수한 양상들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만약 추상이 어떤 역사적 실재의 결정적 성격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생산은 특정하고 차별화된 현상이었던 것에서 자기를 표현하는 다양한 형태들의 ‘본질적 다양성’(wesentliche Verschiedenheit)을 숨기는 완전히 자기 동일적인 과정으로 변화된다. 이것이 ‘현존 사회관계의 영원성과 조화’를 주장했던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저지른 잘못이었다(Marx, 1973: 85). 그들의 과정과 반대로, 마르크스는 각 사회경제적 구성을 다른 것들과 구별할 수 있게 하고, 그 구성의 발전에 추동력을 제공하고, 학자들에게 실제 역사적 변화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각 사회경제적 구성의 특수한 특징들이라고 주장했다(Korsch, 1938: 78f.).

비록 생산의 일반적 요소들에 대한 정의가 ‘여러 차례 분할되었고 다른 결정요소들로 나뉘며’ ‘일부는 모든 시대에 속하고 다른 것들은 오직 몇몇 시대에만 해당되지만’ 그 보편적 구성요소들 중에 인간노동과 자연에 의해 제공되는 물질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Marx, 1973: 85). 왜냐하면, 생산하는 주체와 노동 대상이 되는 객체 없이 생산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세 번째 생산의 일반적 전제조건을 도입했다. ‘이전에 축적된, 과거 노동의 생산물, 다시 말하면, 자본이다(Mill, 1965: 55). 이 마지막 요소에 대한 비판은 마르크스가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근본적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을 드러낼 때 핵심적이었다. 만약 인간이 손만 있고 노동 도구가 없다면 또는 원시적 인간의 반복적 활동만 있고 축적된 과거 노동이 없다면, 노동 도구가 없는 생산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은 마르크스에게 명백해 보였다. 자본은 과거 노동이고 생산의 도구라는 것을 동의했지만, 마르크스는 스미스,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이 그것이 항상 존재했었다고 결론 내리지는 않았다.

이 점은 『그룬트리세』의 또 다른 절에서 매우 자세히 제시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영원한’ 것으로서의 자본 개념은 자본의 본질적인 ‘형식적 규정’(Formbestim-mung)을 고려하지 않고 자본을 오직 물질로 취급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에 따르면,

자본은 모든 형태의 사회에 존재했어야 했고, 전적으로 초역사적인 어떤 것이다. … 그러면 팔, 특히 손이 자본이다. 자본은 인류만큼 오래된 어떤 것에 대한 새로운 이름일 뿐이다. 왜냐하면 가장 미발전된 수렵, 어로 등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노동이 이전 노동의 생산물이 직접적 살아있는 노동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 만약 그렇게 자본의 특정 형태는 추상되어 버리고 오직 내용만 강조된다면 … 당연히 자본이 인간의 모든 생산에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다. 그 입증은 바로 인간 생산의 특수하게 발전된 역사적 단계의 특정 계기(Moment einer besondersentwickelten historischen Stufe der menschlichen Production)를 만드는 구체적인 측면들로부터의 추상(Abstraktion)에 의해 진행된다(Marx, 1973: 257–258).

이 문장에서 마르크스는 추상을 부정적 의미에서 언급한다. 추상하는 것은 실제 사회적 조건들을 제거하는 것이고 자본을 관계라기보다 사물로 생각하는 것이며 그래서 잘못된 해석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서설’에서 마르크스는 추상적 범주들의 사용을 수용하는데 그러나 오직 일반적 측면의 분석이 특수한 측면을 제거하지 않거나 전자와 후자의 구별을 흐리게 하지 않는 한에서 사용한다. 만약 ‘자본을 단지 생산 도구로서 물리적 속성으로만 여기고’ 반면에 생산 도구를 자본으로 만드는 경제적 형태(ökonomischen Form)를 완전히 무시'(Marx, 1973: 591)하는 잘못을 범한다면, ‘진정한 차이를 파악하는데 완전히 무능’하게 될 것이고 ‘단지 다른 이름들을 갖는 하나의 단일한 경제적 관계만 존재한다’는 믿음에 빠지게 된다(Marx, 1973: 249). 사회적 관계에서 표현된 차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모든 것의 결절점인 특수한 차이성differentia specifica를 추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설’에서 마르크스는 ‘다시 말해, 만약 내가 그 자체로 “생산 도구”와 “저장된 노동”을 자본으로 만드는 바로 특수한 질을 버린다면’, ‘자본은 자연의 일반적(allgemeines)이고 영원한 관계다’라고 썼다(Marx, 1973: 86).
사실, 마르크스는 이미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역사적 감각의 결여를 『철학의 빈곤』에서 비판했다.

경제학자들은 어떤 단일한 진행 방법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제도,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만 있다. 봉건제도들은 인공적인 제도이고 부르주아지 제도들은 자연적 제도다. 이런 점은 똑같이 두 가지 종류의 종교를 확립하는 신학자들과 닮았다. 자기들의 것이 아닌 모든 종교는 인간의 발명품이고 반면 자기들의 것은 신이 준 것이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현재의 관계들 – 부르주아 생산관계들 – 을 자연적이라고 할 때 그들은 그 속에서 부가 창조되고 생산력이 발전하는 부르주아 생산관계가 자연법칙과 일치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래서 이 관계들은 그 자체로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연법칙이다. 그것들은 사회를 지배해야 할 영원한 법칙이다. 그래서 역사는 있었지만, 더 이상의 역사는 없다(Marx, 1976: 174).

이런 주장을 그럴듯하게 하기 위해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탄생에 앞섰던 역사적 환경들을 자본주의적 특징들을 가진 ‘존재 자체의 결과’로 묘사했다(Marx, 1973: 460). 마르크스가 『그룬트리세』에 적었던 대로,

자본을 영원하고 자연적인(역사적이 아닌) 생산의 형태로 간주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은 이제 자본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본이 되기 위한 조건을 자본이 현재 실현되는 조건으로 정식화함으로써 즉, 자본가들이 아직 자본가가 되는 중이기 때문에 비자본가를 전유하는 순간을 자본가가 자본가로서 전유하는 바로 그 조건이라고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Marx, 1973: 460).

역사적 관점에서 본 마르크스와 고전 경제학자들 사이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마르크스 입장은 ‘자본이 세계를 태초부터 움직인 것이 아니라 자본이 생산과 생산물들을 그 자신의 과정 아래 종속시키기 이전부터 자본이 이미 존재하는 생산과 생산물들을 대면했다는 것이다'(Marx, 1973: 675). 왜냐하면,

새로운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무에서 발전하지 않고, 하늘에서 떨어지지도 않고, 자기 정립적인 관념의 자궁에서부터가 아니라 현존하는 생산의 발전과 그리고 전해져 내려온 전통적인 소유관계 내부로부터 그리고 그 대립물에서 발전해 나온다(Marx, 1973: 278).

유사하게, 생산하는 주체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는 환경은 추상노동(자본과 살아 있는 노동 사이의 교환을 위한 필수 요건)을 수행할 수 있는 무산 노동자를 자본가들이 발견할 수 있게 허용하는데, 이것은 ‘자본과 임금 노동의 원천이 되는 역사를 형성’(Marx, 1973: 489)하는 과정의 결과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에 대해 침묵한다.

『그룬트리세』의 여러 문장들은 경제학자들이 역사적 현실을 자연적 실재로 묘사하는 방법을 비판한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에게 화폐가 역사의 생산물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금이나 은의 자연적 속성 그 자체가 화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사회적 발전의 정확한 계기에 처음으로 획득한 단지 하나의 결정인 것이다(Marx, 1973: 239). 신용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대부와 차입은, 고리대금처럼, 여러 문명들에 공통적인 현상이었지만 일이 산업 노동, 자유 임금노동이 아니듯이, 이러한 대부와 차입 그 자체가 신용은 아니다. 발전된 생산관계에서 핵심적인 신용은 역사적으로 오직 자본에 근거한 유통에서만 나타난다’(Marx, 1973: 535). 가격과 교환 또한 고대사회에 존재했지만, ‘모든 생산관계에 대한 교환의 점증하는 지배와 생산비용이 점점 더 가격을 결정하게 되는 것은 오직 부르주아 사회, 자유경쟁 사회에서만. … 완전히 발전한다’. ‘아담 스미스가, 진정한 18세기 방식으로 말했던, 전(前)사의 시기, 역사 이전 시기는 오히려 역사의 산물이다’(Marx, 1973: 156). 게다가 그가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역사 감각 결여를 비판했던 것과 꼭 같이 마르크스는 프루동과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임금 노동으로 발전하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고, 교환가치가 자본으로 변화되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으며, 자본가 없는 자본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사회주의자들을 조롱했다(Marx, 1973: 248). ‘서설’ 첫 부분에서 마르크스의 주요한 목적은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적 특수성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가 『자본론』3권에서 다시 주장했던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절대적 생산양식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 일시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Marx, 1998: 240).

이 관점은, 노동과정과 그것의 다양한 특성들을 포함한 많은 질문들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룬트리세』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사회발전의 특수한 역사적 단계에 속하는 사상에 사로잡혀서 그들에게는 사회적 노동력 객체화의 필연성이 그 노동력 소외의 필연성과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Marx, 1973: 832).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이 특수한 형태들이 마치 그 자체로 불변하는 생산과정인 것처럼 제시되는 것을 반복해서 문제 삼았다. 임금노동을 생산의 특수한 역사적 형태의 명확한 관계로가 아니라 인간 경제적 존재의 보편적 실재로 묘사하는 것은 착취와 소외가 항상 존재했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의 특수성을 회피하는 것은 인식론적, 정치적 영향들 모두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그것은 생산의 구체적 역사적 수준들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조건들을 변하지 않고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을 생산 일반으로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 관계들을 자연적인 인간관계들로 표현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이런 이론들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 가치를 지녔다. 현실을 이해하는 데서 역사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뿐 아니라 다른 한편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불변성이라는 도그마를 논박한다는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졌다. 자본주의 질서의 역사성을 증명하는 것은 또한 그것의 일시적 성격과 제거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서설’의 첫 번째 부분에 담겨 있는 사상들의 메아리는 『자본론』3권의 마지막 페이지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여기서 마르크스는 ‘사회적 생산과정을 단순 노동과정과 동일시하는 것’은 ‘혼동’이라고 썼다(Marx, 1998: 870). 왜냐하면,

노동과정이 오로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일 때는, 그것의 단순한 요소들은 발전의 모든 사회적 형태들에 공통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과정 각각의 특수한 역사적 형태는 자신의 물질적 기반과 사회적 형태들을 더욱 발전시킨다. 특정 성숙 단계에 도달했을 때마다 이 특수한 역사적 형태는 버려지고 더 고도의 형태를 향해 나아간다(Marx, 1998: 870).

자본주의는 인간 역사의 유일한 단계도 아니고, 마지막 단계도 아니다. 마르크스는 그것이 ‘공동의 생산’(gemeinschaftliche Production)에 근거한 사회 조직으로 계승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안에서는 노동 생산물은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일반적’이다(Marx, 1973: 172).

총체성으로서 생산
‘서설’의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마르크스는 생산에 대한 더 깊은 사고를 전개하며 다음과 같은 정의로 시작한다. ‘모든 생산은 한 개인으로서는 어떤 특수한 사회 형태(bestimmten Gesellschaftsform) 내에서의 그리고 그 사회 형태를 통한 자연의 전유(Aneignung)다’(Marx, 1973: 87). ‘생산 일반’은 없다. 왜냐하면 생산은 농업, 목축업, 제조업 그리고 다른 분야들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산을 ‘단지 특수한 생산’으로 고려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생산은 ‘생산 부문들의 보다 크고 넓은 총체성 속에서 활동하는 하나의 사회적 본체(Gesellschaftskörper), 사회적 주체(gesellschaftliches Subject)’였다(Marx, 1973: 86).

여기서 다시 마르크스는 경제이론의 주요 권위자들과의 비판적 만남을 통해 그의 주장들을 발전시켰다. 마르크스와 동시대의 경제학자들은 그들의 저작들에서 생산의 일반적 조건들과 다양한 사회들에서 생산성을 향상시킨 환경들에 대해 언급하며 서문을 시작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이런 예비 작업들은 ‘따분한 동어반복’일 뿐이었다(Marx, 1973: 86). 존 스튜어트 밀의 경우 ‘생산은 역사와 독립된 영원한 자연법칙에 둘러싸인 것으로’ 그리고 부르주아 관계들을 ‘그 위에 추상에서 사회가 건설되는 불가침의 자연법칙’으로 표현했다(Marx, 1973: 87). 밀에 따르면, ‘부의 생산 법칙들과 조건들은 물리학적 진리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 부의 분배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오로지 인간 제도의 문제다’(Mill, 1965: 199). 마르크스는 이것을 ‘생산과 분배 그리고 그들 사이 진정한 관계에 대한 저열한 분리’라고 보았는데(Marx, 1973: 87), 왜냐하면,『그룬트리세』의 다른 부분에서 적었던 것처럼, ‘부를 생산하는 “법칙과 조건들”과 “부를 분배”하는 법칙들은 형태만 다른 똑같은 법칙이고 둘 모두 똑같은 역사적 과정을 밟으며 변하며 그 자체들로 단지 역사적 과정의 계기들일 뿐이다’(Marx, 1973: 832). 이 점들을 지적한 후, ‘서설’의 둘째 절은 생산과 분배, 교환, 소비의 일반적 관계를 검토하는 데로 나아간다. 정치경제학의 이런 분할은 제임스 밀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그는 이 네 가지 범주들을 1821년의 그의 책,『정치경제학 요강』의 네 개 장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그전에는 장 바티스트 세이가 1803년에 자신의 책『정치경제학 개론』을 부의 생산, 분배, 소비에 관한 세 권으로 나눈 바 있다.

마르크스는 네 항목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헤겔의 보편-특수-개별의 도식에 일치시켜 논리적 방식으로 재구성했는데 ‘생산, 분배, 교환, 소비가 규칙적 삼단논법(syllogism)을 형성한다. 생산은 보편이고, 분배와 교환은 특수이며, 소비는 개별로서 그 안에서 전체가 결합된다’. 다른 말로 하면 생산은 인간 활동의 출발점이고 분배와 교환은 이중의 매개점인데 전자는 사회에 의해 작동되는 매개 후자는 개인에 의해 작동되는 매개가 되며 소비는 종착점이 된다. 그렇지만 이는 단지 ‘피상적 일관성’이었으므로 마르크스는 네 영역들이 각각 어떻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 지 보다 깊게 분석하고자 했다(Marx, 1973: 89).

그의 첫 번째 탐구 대상은 생산과 소비 사이의 관계였는데 마르크스는 이를 즉각적 동일성의 하나로 설명했다. ‘생산은 소비’이고 ‘소비는 생산이다’. 규정은 부정(determinatio est negatio)이라는 스피노자의 원리의 도움으로 마르크스는 생산적 행동이 원료뿐 아니라 개인의 능력을 소모하는 한 생산은 또한 소비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Spinoza, 1955: 370). 실제로 경제학자들은 이미 이런 측면을 ‘생산적 소비’라는 용어로 강조했고 이를 ‘소비적 생산’과 구별했다. 후자는 오직 생산물이 분배되고 재생산의 영역에 재투입되면서 ‘진정한 소비’를 이루면서 발생했다. 생산적 소비에서는 ‘생산자가 자신을 객체화하고’, 반면 소비적 생산에서는 ‘그가 창조한 물건이 자신을 인간화 한다’(Marx, 1973: 90–91). 생산과 소비의 동일성의 또 다른 특성은 그들 사이에서 발전된 상호간 ‘매개적 운동’에서 인식될 수 있다. 소비는 생산물에게 그 ‘최종 완성’을 주고, 생산 성향을 자극함으로써 ‘새로운 생산에 대한 필요’를 창출한다(Marx, 1973: 91). 같은 방법으로 생산은 소비를 위한 대상뿐 아니라, ‘물질에 대한 어떤 욕구’를 제공한다. 자연적 직접성의 단계를 넘어서면 욕구는 대상 자체에 의해서 발생 된다. ‘생산은 주체를 위한 대상뿐 아니라 그 대상을 위한 주체’ 즉, 소비자를 ‘창조한다’(Marx, 1973: 92). 그래서,

(1) 소비를 위한 물질을 창조함으로써, (2) 소비 방법을 규정함으로써, (3) 원래는 대상이었던 생산물을 소비자가 필요의 형태로 느끼게 하는 생산물로 창조함으로써 생산은 소비를 생산한다. 따라서 생산은 소비의 대상, 소비의 방법, 소비의 동기를 만들어 낸다(Marx, 1973: 92).

요약하면 생산과 소비 사이에 매개 되지 않은 동일성 과정이 존재한다. 생산과 소비는 또한 교대로 서로를 매개하고 서로가 실현됨에 따라 서로를 창출한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예를 들어 세이와 프루동처럼 두 가지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최종 분석에서 ‘긴급으로서, 필요로서 소비는 그 자체로 생산적 활동의 고유한 계기이기 때문이다’.그다음 마르크스는 생산과 분배의 관계에 대한 분석으로 전환한다. 마르크스는 분배는 생산과 소비의 고리이고, ‘사회적 법칙에 따라’ 생산물들의 얼마나 많은 몫이 생산자들에게 돌아가는지를 규정한다고 썼다(Marx, 1973: 94).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분배를 생산으로부터 자율적인 영역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논문들에서 경제적 범주들은 항상 두 가지 방식으로 제기된다. 생산에서는 토지, 노동, 자본이 분배의 대리인들로 나타나고, 반면 분배에서는 지대, 임금, 이윤의 형태로, 소득의 원천들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이런 분리에 대해 환상이고 잘못이라고 평가하며 반대한다. 왜냐하면 분배의 형태는 다를 수도 있는 ‘임의적 배열이 아니라 그것은 생산 형태 그 자체에 의해 정해진 것이다’(Marx, 1973: 594). ‘서설’에서 그는 이렇게 그의 생각을 표현한다.

임금 노동의 형태로 생산에 참가하는 개인은 생산의 결과, 생산물들의 몫을 임금의 형 태로 받는다. 분배 구조는 완전히 생산 구조에 의해 규정된다. 오직 생산의 결과들만 분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생산의 대상 측면뿐 아니라 생산에 대한 특정한 형태의 참여가 분배의 특정 형태 즉 분배의 참가 양상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 형태 측면에서도 분배는 생산의 산물이다. 생산에서 토지를, 분배에서 지대를 상정하는 것 등은 전적으로 환상이다(Marx, 1973: 95).

분배를 생산에서 자율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분배를 단지 생산물들의 분배로 생각했다. 현실에서는 분배는 생산에 선행하는 두 가지 중요한 현상들을 포함했다. 생산 도구들의 분배와 다양한 종류의 생산들에 사회 구성원들을 분배하는 것 즉 마르크스가 ‘특수한 생산관계 아래 개인들의 종속’이라고 정의한 것(Marx, 1973: 96)이다. 이 두 가지 현상들은 어떤 역사적 사례들에서는 예를 들면 정복한 인민들이 정복당한 인민들을 노예 노동에 종속시킬 때나 혹은 소유 토지의 재분할이 생산의 새로운 형태를 발생시킬 때(Marx, 1973: 96)는 ‘분배가 생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분배에 의해 생산이 구조화되고 규정된다’(Marx, 1973: 96)는 것을 의미했다. 두 가지는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왜냐하면 마르크스가『그룬트리세󰡕의 다른 곳에서 지적했듯이 ‘이 분배양식들은 생산관계 자체이지만 그러나 분배의 외양을 띤 것(sub specie distributionis)이다’(Marx, 1973: 832). 그래서 ‘서설’의 문구에 따르자면 ‘생산을 검토하면서 한편 생산 내부의 내재적인 분배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명백히 공허한 추상이다’.

마르크스가 생산과 분배의 연결을 이해한 것은 마르크스가 왜 존 스튜어트 밀이 이 둘을 엄격히 분리시킨 것을 혐오했는지 뿐 아니라 ‘근대 생산의 특수한 사회적 구조를 파악할’ 필요를 제기했던 리카도에 대한 그의 인정도 해명해준다(Marx, 1973: 96). 이 영국 경제학자는 실제 ‘분배를 규제하는 법칙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경제학의 근본적 문제’라고 주장했고(Ricardo, 1973: 3), 그래서 그는 분배를 주요 연구 대상들 중 하나로 정했다. 왜냐하면 ‘리카도는 분배 형태들을 어떤 주어진 사회의 생산 행위자들이 처하는 가장 분명한 표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Marx, 1973: 96). 마르크스에게도 역시 분배는 총 생산물의 몫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분배되는 행위로만 제한되지 않는 것이었다. 분배는 전체 생산 순환에서 하나의 결정적 요소였다. 하지만 이런 확신이 생산이 전체 생산과정 내에서 항상 가장 중요하다는 그의 테제를 뒤집지는 않았다.

분배와 생산 사이의 관계 문제에서 결정적인 것은 명백히 생산 자체 내에 속한다. … 생산은 실제 생산의 계기들을 형성하는 결정요인들과 전제조건들을 가진다. 처음에는 이것들은 자생적이고 자연적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산과정 자체에 의해 결정요인들과 전제조건들은 자연적인 결정요인에서 역사적인 결정요인들 전환되고 만약 그것들이 어떤 시대에는 생산의 자연적 전제조건들처럼 보일지라도 다른 시대를 위한 역사적 산물이었다(Marx, 1973: 97). 따라서 마르크스에게는 생산 도구들과 다양한 생산 부문들에 사회 구성원들을 분배하는 것이 ‘새로운 생산 시대의 전제조건들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분배는 … 그 자체로 생산의 산물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적 생산의 산물일 뿐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생산양식의 산물이다’(Marx, 1973: 98).

마르크스는 마지막으로 생산과 교환 사이의 관계를 검토했는데 그는 교환 또한 생산의 부분으로 여겼다. 노동력 사이의 ‘활동과 능력들의 교환’ 그리고 최종 생산물을 위해 필요한 원료들의 교환과 생산의 내부적 부문들 사이의 교환뿐만 아니라 상인들 사이의 교환 역시 완전히 생산에 의해 결정되고 ‘생산 활동’을 구성했다. 교환은 오직 ‘생산물이 직접 소비를 위해 교환되는’ 국면에서만 생산으로부터 자율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교환의 강도, 규모, 특징적 성격들은 생산의 발전과 구조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모든 계기들에서 … 교환은 직접적으로 생산에 포함되거나 혹은 생산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생산이 분배, 교환, 소비와 맺는 관계에 대한 분석 마지막에, 마르크스는 두 가지 결론들을 내린다.

1. 생산은 하나의 총체성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2. 그 총체성 내의 하나의 특정 부문으로서의 생산이 다른 요소들을 지배한다.

첫 번째 결론에 관해서 마르크스는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생산, 분배, 교환, 소비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두 총체성의 구성원이고 통일성 내에 차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Marx, 1973: 99). 헤겔주의 총체성 개념 을 사용하여 마르크스는, 이론적 도구를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사용한 제한된 추상과정보다 더 효율적인 것으로 강화하여 총체성 내의 부분들 사이의 상호 행동에 의하여 구체는 여러 결정요인과 관계들의 차별화된 통일성(Hall, 2003: 127)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고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분리된 네 영역이 자의적이고 실제 경제 관계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개념에서, 유기적 총체성으로서 생산의 정의는 그 내에서 그 다양한 분야들 사이에서 일치성을 항상 보장하는 어떤 구조화된, 자기 규제적인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정반대로, 마르크스가 같은 주장을 다루면서『그룬트리세』의 한 부분에서 적었던 대로 생산의 개별적 계기들은 ‘서로를 발견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서로 균형을 맞출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서로에게 조응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서로에게 속하는 내적 계기들의 필연성, 그리고 그것들의 서로 간을 향한 무관심하고 독립적인 실재는 이미 모순들의 근거다’. 마르크스는 그 모순들을 생산 일반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에 관련하여 분석하는 것이 항상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는데 자본주의 생산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결코 ‘생산력 발전의 절대적 형태’가 아니었고 과잉생산이라는 ‘근본적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Marx, 1973: 415).

마르크스의 두 번째 결론은 생산을 ‘생산의 총체성(otalität der Production)에서 다른 부분들’에 대한 ‘지배적 계기’(übergreifende Moment )로 만들었다(Marx, 1973: 86). 생산은 ‘과정이 항상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되돌아오는’ ‘진정한 출발점’(Ausgangspunkt )이고 그래서 ‘특정 생산은 이 다른 계기들 사이의 관계들을 규정할 뿐 아니라 특정 소비, 분배, 교환을 규정한다’(Marx, 1973: 99). 그러나 그런 우위는 다른 계기들의 중요성이나, 다른 계기들이 생산에 미치는 영향력을 없애지 않았다. 소비의 규모, 분배의 변형들, 교환 영역 혹은 시장의 크기 모두가 결합하여 생산을 규정하고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었다.

여기에 다시 마르크스의 통찰은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가치를 모두 지녔다. 유통의 도구를 변형시킴에 의해 지배적 생산관계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던 그 시대의 다른 사회주의자들에 반대하여 마르크스는 이런 주장은 ‘생산관계, 분배관계, 유통관계 사이의 내적 연관’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이해’를 명확히 보여준다고 주장했다(Marx, 1973: 122). 왜냐하면 화폐 형태에서의 어떤 변화는 생산관계와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다른 사회관계들을 변경하지 않은 채 남겨둘 뿐 아니라 유통은 오직 생산관계의 변화와 함께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난센스임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사회의 악은 은행들의 ‘변형’, ‘합리적 화폐체계’ 건설, 무료 신용을 보장하는 맹목적 임시처방, 노동자들을 자본가들로 전환시키는 망상(chimera)으로 교정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Marx, 1973: 134). 핵심 문제는 임금 노동을 극복하는 것이고 최우선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과 관련된 것이었다.

방법을 찾아서
마르크스는 이 지점에서 중요한 방법론적 문제를 다루었다: 어떻게 현실을 사고에서 재생산할 것인가? 어떻게 사회를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 모델을 구성할 것인가? 그의 ‘서설’에서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과학적 표현과 실제 운동 사이의 관계’에 할애됐다(Marx, 1973: 86). 그렇지만, 그것은 확정된 사고가 아니었고 이 문제를 이론화하는 아직 불충하게 발전된 방식을 제공할 뿐이고 단지 몇몇 의견들을 스케치하는 것이다. 어떤 문장들은 때때로 서로 모순되는 불명료한 주장들을 담고 있는데, 한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헤겔주의 용어법에 영향받은 언어를 사용하여 글의 애매모호함을 더한다. 마르크스는 이 대목을 쓸 때 그의 방법을 정교화하려고 했었고, 따라서 이 대목은 그 탐색의 자취와 궤적들을 보여준다.

이전의 위대한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는 어디서 출발할 것인지의 문제, 또는 그의 경우, 정치경제학에서 분석의 출발점은 무엇이 되어야 하나에서 시작했다. 그가 검토한 첫 번째 가정은 ‘실제 전제조건을 가진 현실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전 사회적 생산 행위의 토대이자 주체’인 인구에서 시작한다는 가정이었다(Marx, 1973: 100).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의 창설자들인 페티(William Petty)와 보아규베르(Pierre de Boisguillebert)가 취했던 이 경로는 불충분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구와 같이 비규정적 실체로 시작하는 것은 전체에 대해 지나치게 포괄적 이미지를 포함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계급으로 분할(부르주아지, 지주, 프롤레타리아트)을 보여주지 못하게 될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이 계급들은 오직 그들 각각의 토대들인 자본, 토지 소유, 임금 노동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만 구별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본, 토지 소유, 임금 노동과 같은 것에 대한 경험적 접근은, 국가 같은 구체적 요소들을 노동 분업, 화폐 또는 가치 같은 추상적 규정들로 분해시킬 것이었다. 비록 이 방법이 현실 해석을 위해서는 불충분하다고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그룬트리세』의 다른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이 방법은 정치경제학의 시초의 잠정적 단계들에서 역사적 가치를 가졌다’고 인정했는데, ‘그때는 경제 형식들이 내용들에서 여전히 힘들여 벗겨져 나와야 했고, 많은 노력을 들인 대가로 적절한 연구 대상이 정해졌다’(Marx, 1973: 853).

18세기 경제학자들이 그들의 추상적 범주들을 정의하자마자 ‘경제학적 체계들이 시작되었는데, 그 체계들은 노동, 노동 분업, 필요, 교환가치 같은 단순한 관계들로부터 국가, 국가들과 세계시장에서의 교환이라는 수준으로 상승했다’. 경제학에서 스미스와 리카도에 의해 전개된 이 절차는, 철학에서 헤겔에 의해서도 적용되었는데 이 주장은 ‘사고를 통해 추상적 규정들이 구체적인 것의 재생산으로 나가게 된다’는 테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wissenschaftlich richtige Methode)이라고 묘사한 것이다. 올바른 범주들이 있다면, ‘여정을 되밟아서 결국 인구에 다시 도달하게 되는 것’이 가능한데, ‘이제는 전체에 대한 혼란스런 개념이 아니라 여러 결정요인들과 관계들의 풍부한 총체성으로서’다(Marx, 1973: 100–101). 사실, 헤겔은『논리학』에서 종합적이고 체계적 과학을 위한 첫째 필수조건은 [다음으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썼었다.

하나의 보편적 형태의 주제로 [시작하는 것이다] … 앞부분(prius)의 것은 반드시 … 단순한 것, 구체로부터 추상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형태에서는 주제가 그 스스로 동일한 보편성의 형태를 갖기 때문이다. … 추상적 단순 사고 결정을 인식하는 것이 구체적 주제보다 더 쉬운데, 그 구체적 주제는 그런 사고 결정요인들과 그 결정요인들 간 연관들의 다층적 연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그 보편성은 즉자 그리고 대자적으로 개념의 첫 번째 계기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 계기이기 때문이고, 특수자는 오직 보편자에 후속하는데 왜냐하면 특수자는 매개된 계기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단순한 것이 더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것은 이미 보편적인 것으로부터의 변형을 전제한다(Hegel, 1969: 800).

‘서설’에 대하여 일부 논평자들이 주장했던 것과 반대로, 마르크스의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의 정의대로 마르크스 자신이 모든 이후 작업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Marx, 1973: 101). 무엇보다, 마르크스는 관념 수준에서 구체적인 것을 논리적으로 재구축하는 것이 현실의 충실한 복제라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확신을 공유하지 않았다(Dal Pra, 1965: 461). ‘서설’에서 종합적으로 제시된 방법은 헤겔의 방법에서 다양한 요소들을 빌려왔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또한 커다란 차이들을 보여준다. 그 이전 시대의 헤겔 같이, 마르크스는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상승은 사고가 구체적인 것을 전유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사고에서 현실의 재구성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일반적인 결정요인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더욱이 두 사람 모두 구체적인 것은 ‘많은 결정요인들의 집적이고, 그래서 다양한 것의 통일’이었다. 비록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것은 ‘관찰(Anschauung)과 개념화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항상 필수적이라고 여겼지만 구체는 사고에서 ‘출발점이 아닌 집적 과정으로, 결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이런 공통 기반을 넘어서면 ‘헤겔이 실재하는 것을 사고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환상에 빠졌던’ 반면, 마르크스는 ‘사고는 결코 구체적인 것 스스로가 존재하게 되는 과정이 아니’라고 본 차이점이 있었다. 마르크스가 주장하길, 헤겔적 관념주의에서, ‘범주들의 운동은 실제 생산 행위로 나타난다. … 범주들의 운동이 세계를 생산했다’. ‘개념적 사고가 실제 인간 존재’ 이고 ‘그래서 개념적 세계 자체가 유일한 현실’로, 관념들로 실제 세계를 표현할 뿐 아니라 관념들이 세계의 구성 과정으로 작동한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경제적 범주들이 ‘이미 주어진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전체 내에서 추상적 관계[들]로서’ 존재한다(Marx, 1973: 101). 이 범주들은 ‘존재의 형태들, 실존의 결정요인들(Daseinsformen, Existenzbestimmungen)을 표현한다’(Marx, 1973: 106). 예를 들어, 교환가치는 인구와 그 인구가 규정된 관계들 속에서 생산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마르크스는 헤겔에 반대하여, ‘사고의 총체성이자 구체적 사고인 구체적 총체성은 사실 사고행위와 이해하기의 산물이지만,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생각하고 생성하는 개념의 산물은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왜냐하면 ‘실제 주체는 이전과 꼭 같이 두뇌 바깥에 자신의 자율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 … 따라서 이론적 방법에서 역시 사회라는 주체는 반드시 항상 전제조건으로 염두에 두어야 한다’(Marx, 1973: 101–102).

하지만 실제로는 마르크스의 해석은 헤겔 철학을 공정히 다루지 않는다. 헤겔 저서의 많은 문장들은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의 초월적 관념주의와 셀링(Friedrich Schelling)의 객관적 관념주의와 달리 헤겔의 사상이 지식의 운동을 자연의 질서와, 주체를 객체와 혼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철학사전』의 두 번째 문단에서, 헤겔은 분명하게 쓰기를,

사물들에 대한 사고 연구는 일반적으로 철학에 대한 하나의 묘사가 될 수도 있다. … 엄밀하게 인간적이며 사고가 유발한 의식의 현상은 원래 사고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느낌, 지각, 정신적 이미지로 나타나는 데 이 모든 양상들은 진정한 사고 형태와 구별되어야 한다(Hegel, 1892: 4).

『법철학』에서도 간스(Eduard Gans)에 의해 1827년의 두 번째 판 에 32번째 문단에 첨가된 일부 문장들은 마르크스의 헤겔 해석의 오류를 확인할 뿐 아니라 마르크스 자신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 방식을 실제로 보여준다(Jánoska et al, 1994: 115–119).

우리는 소유가 가족 이전에 존재했다(dagewesen)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소유를 맨 처음 다뤄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왜 우리가 가장 고도의 지점에서, 즉, 구체적으로 진실인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찾는 것은 정확히 결과의 형태를 띤 진실이고,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추상적 개념 자체를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념이 체현된 실제 모습은 현실 세계에서는 그 자체로 일차적이지만 우리에게는 이차적이고 후속적이다.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그 발전은 추상적 형태들이 그들 자신을 자립적으로가 아니라 거짓 형태들로 드러내는 것이다(Hegel, 1952: 233).

‘서설’에서 마르크스는 곧이어 단순한 범주들이 더 구체적인 범주들 전에 앞서 그 범주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헤겔이『법철학』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점유나 소유 범주의 경우 마르크스는 이 범주가 가족 같은 ‘더 구체적인 관계들’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존재할 수 없었고 ‘개별 야만인’을 하나의 자산 소유자로 분석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질문은 더욱 복잡하다. 왜냐하면, 화폐는 ‘역사적으로 자본이 존재하기 이전에, 은행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임금 노동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Marx, 1973: 102). 화폐는 더 복합적 현실들의 발전보다 먼저 나타났고, 따라서 어떤 경우는 논리적 범주들의 배열이 보다 발전되고 보다 최신의 역사적 배열을 따라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Marx, 1973: 247). 그래서 ‘단순한 것에서 결합된 것으로 상승하는 추상적 사고의 경로는 실제 역사적 과정과 조응할 것이다’(Marx, 1973: 102). 하지만 고대에서 화폐는 오직 교역하는 민족들에게서만 지배적 기능을 수행했다. 그래서 화폐가 ‘완전한 모습으로 역사적으로 출현한 것은 오직 사회의 가장 발달된 조건들에서만 나타난다’. 또는 ‘비록 더 단순한 범주가 더 구체적 범주 이전에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의 완전한 (내포적이고 외연적인) 발전은 정확히 결합된 형태의 사회에서 성취할 수 있다’.

이 결론은 노동 범주에 더 잘 적용된다. 왜냐하면 비록 노동은 인간 최초의 문명화와 함께 출현했고 매우 단순한 과정으로 보이지만, 마르크스는 ‘그것을 경제적으로 생각할 때 … ‘노동’은 이 단순한 추상을 창조하는 관계들이 그러하듯 근대적 범주’라고 강조했다(Marx, 1973: 103). 중금주의와 중상주의 옹호론자들은 부의 원천은 화폐에 새겨져 있고, 화폐는 그래서 노동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후에 중농학파들은 노동은 부의 궁극적 창조자지만, 그러나 오직 농업노동 형태에서 그렇다고 주장했다. 스미스의 저서는 최종적으로 이러한 ‘부를 창조하는 활동을 제한적으로 특정화하는 것’을 종결지었다. 그래서 이제 노동은 더 이상 하나의 특수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제조업, 상업, 농업 노동으로서뿐 아니라, 하나가 아니라 나머지도 더한 ‘노동 그 자체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인간들이 어떤 형태의 사회에서도 생산자 역할을 하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오래된 관계에 대한’ ‘추상적 표현’이 발견되었다. 화폐의 경우에서처럼, ‘노동’의 범주는 오직 ‘가능한 가장 풍부한 구체적인 발전’이 있는 곳, ‘하나의 사물이 다수에게, 모두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곳인’ 어떤 사회에서만 추출될 수 있었다. 그래서 ‘특정한 노동의 종류와 무관한 노동은 그 속에서 어떤 하나의 노동이 더 이상 지배적이지 않은, 실제 하는 노동 종류들의 매우 발전된 총체성을 전제한다’.

게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일반’은 하나의 범주일 뿐 아니라 ‘개인들이 한 종류의 노동에서 다른 종류의 노동으로 쉽게 이전할 수 있는 사회, 노동의 종류가 변화 대상이므로 중요하지 않은 사회와 조응한다’. 노동자의 노동은 과거에 그 노동이 가졌던 집단적, 공예적 성격을 잃고 ‘노동 일반’, ‘한마디로(sans phrase) 노동’, ‘범주로서 노동뿐 아니라, 실제 노동’이 된다(Marx, 1973: 104). 임금 노동은 ‘이 노동 혹은 또 다른 어떤 노동이 아니라 개별적 특수성(Bestimmtheit)에 완전히 무관심하고 모든 특수성들을 포괄할 수 있는 순수하고 단순한 노동, 추상 노동이다’(Marx, 1973: 297). 요약하면, 노동은 ‘순전히 역학적 활동에 관한 것이고 그 특수한 형태는 상관없는’ 문제다(Marx, 1973: 297).

가장 단순한 범주들과 가장 구체적인 범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 마지막에서 마르크스는 가장 현대적인 부르주아 사회 형태들에서 – 그는 미국을 염두에 두었다 – ‘노동 일반’이라는 범주의 추상이 ‘현실에서 진실’이 되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근대 경제학이 그 논의들의 꼭대기에 놓고 헤아릴 수 없이 오래된 관계로 모든 사회 형태들에 유효한 것으로 표현된 … 가장 단순한 추상이 실제로는 가장 근대적인 사회의 범주로서의 추상일 때 그 실질적 진리를 성취한다’(Marx, 1973: 104–105). 혹은, 마르크스가『그룬트리세』의 다른 곳에서 재확인하였듯이, 그 범주는 ‘어떤 특수한 물질적 생산양식의 발전과 함께 그리고 산업의 생산력의 발전에서 어떤 특수한 단계의 발전과 함께일 때만 오직 실재가 된다’(Marx, 1973: 297).

하지만 노동의 특수한 종류에 대한 무관심은 많은 역사적 현실들에 공통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이 경우 또한, 차이들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연적으로 뭐든지 노동하는 야만인과 자신의 노동을 모든 것에 적용시킨 문명인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다시 한 번 추상을 실제 역사와 관련시키면서, 마르크스는 그의 테제를 확증시켰다. 이 노동의 사례는 심지어 가장 추상적 범주들조차도 정확히 그 추상성 때문에 모든 시대에 유효함에도 불구하고 그 추상성의 특정 성격에서 역사적 관계의 생산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 완전한 유효성은 오직 이런 역사적 관계들 내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Marx, 1973: 105).

이 요점을 지적하고서, 마르크스는 또 다른 핵심적 문제로 전환했다. 그가 쓰려고 하는 저작에서 어떤 순서로 범주들을 배치시켜야 하나? 복합성이 단순성을 이해시키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는 명확하게 첫 번째 경우를 선택했다. 부르주아 사회는 생산의 가장 복잡한 역사적 조직이다. 그 관계들을 표현하고, 구조를 이해시키는 범주들은 따라서 파괴된 사회 구성의 잔해들과 부르주아 사회가 이를 통해 건설된 요소들로 부르주아 사회와 함께 여전히 정복되지 않고 남아 있는 잔존물에 대한 통찰 역시 가능하게 한다(Marx, 1973: 105).

과거를 재구성하기 위한 지표들을 제공하는 것은 현재다. ‘인간 해부학은 원숭이 해부학의 열쇠를 함유하고 있고 …〔그리고〕그 하위 동물 종들 사이의 보다 높은 발달을 시사하는데 … 이것은 오로지 더욱 고도의 발달이 이미 알려진 이후에만 이해될 수 있다’(Marx, 1973: 105). 하지만 이 유명한 주장은 진화론의 용어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 마르크스는 ‘가장 최근의 형태들이 이전의 형태들을 자신에게 이르게 되는 단계들이라는 진부한’, ‘소위 역사적 진화’의 개념을 명시적으로 비판했다(Marx, 1973: 106). 가장 단순한 유기체들에서 가장 복잡한 유기체들로 점진적으로 나간다는 순진한 궤적을 그렸던 진화론 이론가들과 달리 마르크스는 반대로 훨씬 더 복합적인 논리적 방법을 사용하기를 선택했고, 생산양식들(고대, 아시아적, 봉건적, 자본주의)의 계승에 의해 표현되는 역사에 대한 어떤 개념화를 정교화했는데, 그것은 범주들이 그 다양한 양식들 내에서 지니는 지위와 기능들을 설명하는 것을 의미했다(Hall, 2003: 133). 따라서 비록, 이 사회들의 엄청난 차이들을 고려할 때 그 단서들이 조정될 필요가 있지만, 이전의 역사 시대들의 경제들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들을 제공하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다. 마르크스는 ‘모든 역사적 차이들을 흐리게 하고 모든 사회 형태들에서 부르주아 관계들을 보는 경제학자들의 태도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했다(Marx, 1973: 105).

비록 이 주장은 이전 저작들에서의 표현된 입장과 동일 선상에 있지만, 마르크스는 여기서 경제적 범주들에 할당되어야 할 순서에 관한 골치 아픈 문제와 이전과는 다르게 씨름한다. 그는『철학의 빈곤』에서 ‘사건들의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 관념들의 계승에 일치하여 역사’를 구성하려는 푸르동의 희망에 반대하여(Proudhon, 1972: 184), 마르크스는 ‘사고의 운동에 의해 세계를 구성하겠다는’ 사상을 비판했다(Marx, 1976: 175). 그래서 1847년에 마르크스는 프루동과 헤겔에 의해 채택된 논리변증법적 방법에 대한 논쟁에 의거해 엄격하게 역사적인 순서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10년 후 ‘서설’에서 그의 입장은 변화했다. 마르크스는 역사적-실증적 점검이라는 논리적 방법을 선호하여 과학적 범주들에 대한 연대기적 계승이라는 기준을 버렸다. 현재가 과거를, 인간의 구조가 원숭이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에 가장 성숙한 단계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부터, 그리고 더욱 구체적으로 다른 모든 요소를 지배하는 요소인 자본으로부터 분석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했다. ‘자본은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경제적 권력이다. 자본이 반드시 종착점뿐 아니라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Marx, 1973: 107).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결정된 순서와 같은 순서에 따라 경제적 범주들을 배치하는 것은 실행할 수도 없고 잘못된 것이다. 그 배치는 범주들의 자연스러운 순서나 역사적 발전에 조응하는 순서와 정확히 반대되는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상호 관계로부터 결정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사회 형태들의 계승에서 경제적 관계들의 역사적 지위가 아니다. 더욱이 그것의 ‘관념상의’ 순서(프루동식의 역사적 운동의 흐릿한 개념)는 더욱 아니다. 오히려,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그것들의 배치다(Marx, 1973: 107–108).

본질적으로, 범주들을 정확한 논리적 순서에서 정리하는 것과 실제 역사가 작동하는 것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더욱이, 마르크스가『자본론』 3권을 위한 수고들에서 썼듯이, ‘만약 사물의 외양과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Marx, 1998: 804).

마르크스는 구체적 요소들을 추상적 정의들로의 해소시켰던 초기의 경제학자들의 경험주의로부터, 현실에 대한 사고를 현실 자체로 환원시켰던 고전 경제학자들의 방법으로부터, 사고에 구체적인 것을 생산하는 능력을 주었다고 마르크스가 비난했던 그가 보기엔 헤겔의 철학을 포함한 철학적 관념주의로부터, 사고 형식들과 객관적 현실을 엄격히 대치시키는 영지주의(gnoseological) 개념들로부터, 역사주의와 그것의 논리를 역사로 해소시키는 것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역사의 행진’(Marx, 1976: 172)을 따랐던『철학의 빈곤』에서 그 스스로 확신했던 것으로부터 분기하여 그 자신의 종합에 도달했던 것이었다. 구체적인 것과 사고 사이의 일대일 대응을 확립하는 것에 대한 마르크스의 혐오는 그가 사고의 특수성을 인식하고 구체적인 것이 사고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그 둘을 분리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범주들의 설명 순서는 그 범주가 실제 역사적 과정의 관계들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순서와 달라졌다(Althusser and Balibar, 1979: 47–48, 87). 인식과정이 역사에서 발생했던 단계들의 단순한 반복으로 제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추상의 과정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했고 이를 통해 사회의 모든 복잡함 속에서도 사회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편, 이 목적에 진정으로 유용하려면, 추상은, 일반적인 논리적 결정요인들과 구체적 역사적 관계들이 구별되는 방식으로, 다양한 역사적 현실들과 계속해서 비교되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마르크스의 역사 개념은 효험과 예리함을 획득할 수 있었다. 논리적 순서와 실제 역사적 순서의 대칭을 거부하자 역사는 현실 이해에 결정적인 것이 되었고 한편, 논리는 역사를 평이한 사건들의 연대기가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마르크스에게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모든 경제적 관계의 역사적 발생을 재구성하고 그에 대해 적절하게 묘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그룬트리세』의 한 문장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의 방법은 역사적 탐구가 반드시 개입해야 할 지점들, 혹은 단지 생산 과정의 한 역사적 형태로서의 부르주아 경제가 이전의 역사적 생산양식을 넘어선 지점이 어디 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부르주아 경제 법칙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생산관계의 실제 역사를 쓰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자체로 역사가 된 이 경제 법칙들의 올바른 관찰과 추론은 항상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 즉, 체제 배후에 과거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점은 현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더불어 과거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 이 올바른 관점은 마찬가지로 생산관계의 현재 형태를 극복하는 미래의 전조들과 생성의 운동들에 대한 지점들로 이끈다. 한편, 전(前) 부르주아 국면들이 단순히 역사적으로, 즉, 대체할 수 있는 전제들로 나타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생산의 현대적 조건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대체하는 데 연루되고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위한 역사적 전제조건들로 상정된다(Marx, 1973: 460–461).

마르크스에 의해 발전된 방법은 생산이 역사속에서 표출했던 모든 생산양식들 사이의 차이들을 이해할 뿐 아니라, 새로운 생산양식을 제시하는 현재의 경향을 포착하여 자본주의의 불변성을 선언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을 마르크스에게 제공했다. 마르크스의 연구는, 인식론을 포함하여, 결코 배타적으로 이론적 동기에 의해 수행되지 않았다. 그의 연구는 항상 정치 투쟁에 더 잘 개입하기 위해 세계를 해석할 필요에 의해 추동됐다. 사실, 마르크스는 방법에 관한 부분을 그의 ‘경제학’을 쓸 때 의도한 하나의 순서를 나열하는 것으로 끝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생애 동안 그가 작성했던 그의 작업에 대한 수많은 계획 중에 최초의 것인데, ‘서설’에서 전술한 부분들에 대한 숙고들을 재반영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그룬트리세』를 작성하기 전에, 그는 아래와 같은 것을 다루려 했다.

(1) 거의 모든 사회 형태들에 존재하는 일반적, 추상적 결정요인들 그리고 나서 (2) 부르주아 사회 내부 구조를 구성하고 기본 계급들의 바탕이 되는 범주들인 자본, 임금 노동, 토지 재산 (3) 그 내부 관계로 보았을 때 국가 형태로의 부르주아 사회의 집중 (4) 국제적 생산관계 … 국제적 교환 그리고 (5) 세계시장과 위기들(Marx, 1973: 108).

이것이 적어도 1857년 8월의 마르크스의 계획이었는데, 나중에 매우 많은 변화를 겪었다.

물질적 생산과 지적 생산 사이의 불균등 관계
‘서설’의 마지막 절은 마르크스가 그의 저작에서 취급하려고 의도했던 짧고 단편적인 여덟 개 주장들의 목록에 덧붙여 그리스 예술과 근대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찰들로 구성된다. 여덟 가지 요점들에 대하여 마르크스가 주되게 고려해 썼던 것은 임금 노동의 특징들은 부르주아 사회에서보다 더 일찍이 군대에서 표현되었다는 확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에 관한 생각, 생산관계와 법적 관계 사이에 그가 ‘불균등발전’(ungleiche Entwicklung)이라고 불렀던 것, 특히 로마 민법으로부터 발생기의 부르주아 사회의 법의 도출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어떠한 구조도 없는 메모일 뿐이어서 단지 이 문제들에 대한 마르크스 사고의 희미한 아이디어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의 예술에 대한 평가들은 좀 더 발전되어, ‘물질적 생산과 예술적 발전 사이의 불균등 관계(ungleiche Verhältniß)’에 초점을 맞추었다(Marx, 1973: 109). 마르크스는 이미 두 초기 자작들에서 생산과 의식 형태들 사이의 관계를 다뤘다.『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종교, 가족, 국가, 법률, 과학, 예술 등은 단지 특수한 생산양식들이고, 생산양식의 일반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으며’(Marx, 1975b: 297),『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관념의, 개념의, 의식의 생산은 인간의 물질적 활동 및 물질적 교류와 가장 우선 직접적으로 결합된다. … 인간의 인지, 사고, 정신적 교류는 이 단계에서 물질적 행위의 직접적 발산(direkter Ausfluß)으로 나타난다(Marx and Engels, 1976: 36). 『 』

그렇지만, ‘서설’에서는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나중에 주창했던 엄격한 종류의 병행성에 대한 단언과는 매우 다르게, 마르크스는 사회·경제적 발전과 예술적 생산 사이에 직접적 관계가 없다고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그가 읽고 1852년 수고들에 발췌했던 시스몽디(Leonard Simonde de Sismondi)의『남부유럽 문학에 관한 역사적 관점』의 특정 견해들에 대해 재해석하면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예술의 경우, 그것이 꽃피는 시기가 사회의 일반적 발전, 따라서 그 물질적 토대(materiellen Grundlage), 그 사회 조직의 … 골격 구조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어떤 예술 형식을 예를 들며, 서사시는 ‘오직 예술적 발전의 미발전의 단계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예술의 영역 내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예술들 사이의 관계에 적용된다면, 예술의 전체 영역과 일반적 사회 발전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렇다는 것은 이미 덜 당혹스러운 것'(Marx, 1973: 110)이라고 지적했다. 그리스 예술은 그리스 신화, 말하자면, 사회적 형태들이 ‘무의식적으로 예술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근대 같은 진보된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자연을 합리적으로 인식하고 자연이 사람들을 억누르고 공격하는 외적인 힘으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신화는 그 존재이유(raison d’’être)를 잃고, 서사시는 더 이상 반복될 수 없다. ‘탄약(powder and lead)이 있는 데서 아킬레스가 가능할까? 혹은 인쇄기가 있는 데서 일리아드가 가능할까? 서사시의 노래와 영웅전설(saga)과 뮤즈의 신은 인쇄업자의 공장과 함께 끝나고, 그래서 서사시의 필수 조건들이 사라지지 않았나?’(Marx, 1973: 111)

그렇다면, 마르크스에게 예술과 지적 생산 일반은 반드시 사회의 물질적 조건들과 그들이 맺는 관계 속에서 탐구되어야 하지만 두 영역들 사이의 엄격한 조화를 이끌어 내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우리가 고대인들보다 기술에서 더 앞서 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서사시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사고하는 볼테르의 오류(마르크스에 의해서 그의 1861-3년 수고들에서 상기되었다)에 빠지게 될 것이다(Marx, 1989a: 182–183).

예술가를 하나의 창조하는 주체로 생각하면서, 마르크스는 예술적 생산과 그로부터 즐거움을 얻어내는 대중을 다룬다. 이 문제는 해석상에 엄청난 어려움들을 주었다. ‘그리스 예술과 서사시가 사회적 발전의 특정 형태들과 결합되어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예술적 즐거움을 제공하고 어떤 점에서 그것들이 규범으로 그리고 도달 불가능한 모델로서 간주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고대 예술 창조물들이 왜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 대답은 그리스 세계는 ‘인류의 역사적 유아기’, ‘결코 돌아갈 수 없는 단계로서’ ‘영원한 매력’을 발휘하는 시기를 대표한다는 것이다(Marx, 1973: 111). 그래서 결론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들의 예술 매력은 그 예술이 성장한 사회의 미발전된 단계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매력은 사회의 미발전단계의 결과로 그 예술이 발생했고 그 조건에서만 발생할 수 있었으며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미성숙된 사회조건과 … 불가분하게 결합돼 있다(Marx, 1973: 111).

‘서설’에서 미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언급들이 가지는 가치는 그렇지만, 그 대략적인 언급이나 그 언급들에 제공하는 종종 설득력 없는 해결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물질적 생산 형태들이 지적 창조나 행동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반 독단적 접근에 있다. 둘 사이의 ‘불균등발전’에 대한 그의 의식은 사회적 총체성의 다양한 영역들 사이의 단일한 관계를 상정하는 어떠한 도식적 절차도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다(Marx, 1973: 109). 마르크스가 ‘서설’을 쓰고 나서 이 년 뒤에 출판된『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서문’의 더욱 잘 알려진 테제인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 정치, 지적 생활의 일반적 과정을 조건 짓는다’(Marx, 1987a: 263)는 말은 결코 결정론적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 사회 상부구조에서의 현상들은 단지 인류의 물질적 조건의 반영일 뿐이라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편협하고 너무 뻔한 독해로부터 이 테제는 확실히 구분되어야 한다.

결론
마르크스가『그룬트리세』를 착수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경제학’ 연구방법론에 관한 부분을 서문에 쓰려고 했다. ‘서설’은 단지 자기 명료화를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만은 아니었다. ‘서설’은 다른 경제학자들의 저작들에서처럼, 저자의 일반적 주제에 관한 예비적 논평들을 포함할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1859년 6월에 마르크스가 그의 연구들의 첫 부분을『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로 출판하기 위하여 보냈을 때, 그는 자신의 동기를 다룬 부분을 제외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초안으로 작성하였던, 일반적 서설을 생략했다. 왜냐하면 더 깊이 고려하였을 때 여전히 입증되어야 하는 결과들을 앞질러 내는 것이 내게 혼란스러워 보였기 때문이고, 진정으로 나를 따르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특수한 것에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전진(von dem Einzelnenzum Allgemeinen aufzusteigen)하기를 결심해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Marx, 1987a: 261).

그래서 1857년의 분석의 길잡이였던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상승’은 1859년 텍스트에서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전진’으로 바꿨다(Marx, 1987a: 261). ‘서설’의 출발점이었던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적 결정요인들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결정된 실재인 상품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1857년 텍스트가 출판되지 않은 채로 남았기 때문에, 그런 변화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제시되지 않았다. 사실『그룬트리세』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미 그가 꼼꼼하게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정치경제의 개념들을 수백 페이지에 걸쳐 분석한 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부가 자신을 표현하는 첫 번째 범주는 상품 범주’라고 주장했다(Marx, 1973: 881). 그는 상품에 대한 탐구에『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와『자본론』둘 모두의 첫 장을 할애했는데 여기서 상품을 특별히 이에 대한 분석으로 연구가 시작되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 형태’(Marx, 1996: 45)라고 정의했다.

계획된 서설 대신, 마르크스는 그의 지적 일대기와 소위 역사의 유물론적 개념을 간명하게 요약한 짧은 ‘서론’으로 1859년의 저작을 시작했다. 그 후에 그는 매우 드문 경우들을 제외하고 약간의 짧은 논평들 이외에 더 이상 방법에 관한 논의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들 중 확실히 가장 중요한 것은『자본론』초판의 1873년의 ‘후기’였는데, 그곳에서 자본론의 출판에 따른 논평들에 자극받아, 그는 자신의 탐구 방법에 관하여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서설’에 있는 주제들의 일부를 다시 논의했다. 이렇게 한 또 다른 이유는 마르크스가 설명 방법과 탐구 방법 사이의 차이들을 주장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설명 방법은 일반적인 것으로 시작할 수 있으며 보편적 형태에서 역사적으로 결정된 형태들로 이동하고 그래서 1857년의 정식화인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을 적용할 수 있지만, 탐구 방법은 직접적인 현실에서 시작해야 하고 그래서 1859년에 말했듯이 ‘특수에서 일반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설명 방법(Darstellungsweise)은 반드시 조사 방법(Forschungsweise)과 형식에서 달라야 한다. 조사 방법은 반드시 소재의 세부사항들까지 알아내야 하고 발전의 서로 다른 형태들을 분석하고 그 형태들의 내적 연관성을 찾아내야 한다. 이런 작업을 수행한 이후에야 실제적 운동이 제대로 묘사될 수 있다(Marx, 1996: 19).

1857년 ’서설‘ 이후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더 이상 방법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 이에 대한 저작이 가지는 특징인 공개적이고 문제제기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고 그의 생각들이 도출된 복잡한 발생적 기원에 대해 무시하지 않으면서 그의 최종 생각만을 표현했다(Carver, 1975: 135). 바로 이런 이유로 ‘서설’의 내용은 극히 중요하다. 몇몇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사상과의 밀접한 만남 속에서 마르크스는 분명한 확신을 다시 확인했고 중요한 이론적 성취를 이뤘다. 다른 무엇보다 첫째로, 그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그 사회적 관계의 역사적 특수성을 다시 강조했다. 둘째, 그는 생산, 분배, 교환, 소비를 하나의 총체성으로 고려했는데 그 총체성 안에서 생산이 전체의 다른 부분들을 지배하는 요소를 구성한다. 게다가, 사고에서 현실을 재생하는 것과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순전히 역사적 방법에만 의존하지 않고 추상을 활용하여 지식의 경로의 건설하는 데서 추상이 가지는 가치를 인식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생산관계와 지적관계의 발전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등한 관계를 강조했다.

처음으로 출판된 지 100년 후에, 이러한 깊이 있는 사고 때문에 ‘서설’은 마르크스의 해석자들과 독자들에게 문학적 관점에서도 매력적인 원고일 뿐만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이론적 원고가 되었다. 이 점은 미래 세대에 마르크스의 저서를 새롭게 접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 경우가 될 것이다.

번역 하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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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마르크스주의 연구 Marxism 21

Pub Info:

Vol. 8 (2011), n. 3, 100-142

Reference:

DOI: 10.26587/marx.8.3.201108.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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