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좌파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한 고찰

1. 전쟁의 경제적 원인
정치학은 전쟁을 추동하는 이데올로기적·경제적·심지어 심리적 동기를 연구하 는 반면, 사회주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전쟁의 확산 사이의 연계를 강조함 으로써 가장 강력한 이론적 기여 가운데 하나를 이룩했다.

국제노동자협회(1864~1872, 제1인터내셔널)의 논쟁에서 주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세사르 드 페페(César de Paepe)는 전쟁 문제에 관한 노동자 운동의 고전적 입 장, 즉 자본주의적 생산 아래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정식화했다. 현대사회 에서 전쟁은 군주나 다른 개인의 야심이 아니라 지배적인 사회경제적 모델에 의해 야기된다(De Paepe, 2014a: 229~231). 사회주의운동 역시 주민의 어느 부문이 전쟁 의 참혹한 결과에 의해 가장 큰 타격을 받는지 보여줬다. 1868년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참석 대의원들은 노동자들이 승자가 되든 패자가 되든 그들의 지배계급 과 그들을 대표하는 정부들의 결정에 대해 경제적으로 또는 자신의 피로 대가를 치를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모든 전쟁의 최종적 폐지”를 추구할 것을 호소하 는 동의안을 채택했다(Freymond, 1962: 402; Marx, 2014: 92).1 노동자 운동에게 문 명적 교훈은 어떤 전쟁이라도 모두 ‘내전’(Freymond, 1962: 403; Musto, 2014: 49), 즉 노동자들의 생존에 필요한 수단을 박탈하는 것은 노동자들 사이의 격렬한 충돌 로 간주해야 한다는 신념으로부터 나왔다. 노동자들은 징집에 저항하고 파업투쟁 을 벌여 어떤 전쟁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투쟁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국제주의 는 미래 사회의 핵심적 사항이 되었고, 미래 사회는 세계시장에서 부르주아 국가 들 사이의 경쟁과 자본주의의 종식과 함께 전쟁의 주요한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게 된다.

사회주의의 선구자 가운데 클로드 앙리 드 생시몽(Claude Henri de Saint-Simon) 은 전쟁과 사회적 갈등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고, 양자를 산업생산의 근본적 진보에 장애물이 된다고 간주했다. 칼 마르크스는 그의 저술에서 전쟁에 관한 견 해를 발전시키지 않았고, 그의 견해는 단편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이기도 했다. 마르 크스는 또한 전쟁에 대해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의 지침을 제시하지 않았다. 마르 크스가 대립하는 진영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 그의 유일한 상수는 반혁 명의 전초기지이자 노동계급 해방의 주요한 장벽 가운데 하나로 여겼던 차르체제 러시아(Tsarist Russia)에 대한 반대였다. 『자본』(1867)에서 마르크스는 폭력이 경제 적 힘이며, “새로운 사회를 잉태한 모든 낡은 사회의 산파”(Marx, 1996: 739)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전쟁을 사회의 혁명적 변혁을 위한 결정적 지름길이 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마르크스의 정치적 활동에서 주요한 목표는 노동자들이 국 제연대에 헌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주장하듯이, 외부의 적 이라는 선전주의적 발명이 어떤 전쟁의 발발을 가져올 위협이 존재하는 개별 나라 들에서 노동자들은 계급투쟁의 위축에 맞서 결연하게 투쟁해야 한다. 노동자 운동 의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여러 편지에서 엥겔스는 애국주의라는 덫과 배외주의의 물결로부터 발생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지연의 이데올로기적 힘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반뒤링론』(1878)에서 엥겔스는 훨씬 더 치명적인 무기의 효과에 대한 분 석에 이어 사회주의의 임무는 “군사주의와 모든 상비군을 분쇄하는 것”이라고 선 언했다(Engels, 1987: 158).

전쟁은 엥겔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여서 그는 마지막 저술 가운데 하나를 전쟁 에 집중했다. 「유럽의 무장해제는 가능한가」(1893)에서 엥겔스는 지난 25년 동안 모든 주요 열강이 군사적으로, 전쟁 준비의 면에서 제압하려고 경쟁국보다 노력했 다고 지적했다. 유례없는 수준의 무기 생산이 이루어졌고, 구대륙은 “세계가 결코 본 적 없는 그런 파괴의 전쟁”(Engels, 1990: 372)에 더 접근하게 되었다. 『공산당 선 언』(1848)의 공저자인 엥겔스에 따르면, “상비군 시스템은 유럽 전역에서 극단적 으로 발전해서 상비군은 군사적 부담 때문에 민족들에게 경제적 파산을 가져오거 나 또는 전면적인 박멸전에 빠지게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분석에서 엥겔스는 상비 군이 외부에 대한 군사적 목적만큼 주로 국내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유지된다고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상비군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자 투쟁을 탄압할 세 력을 강화함으로써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에 맞서 보호를 제공할” 의도로 구 성되어 있다. 민중들이 국가에 세금을 내고, 병력을 제공함으로써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하기 때문에, 노동자 운동은 “국제협약에 의한 [군사] 서비스 조건의 점진적 감소”와 유일하게 효과적인 “평화의 보장책”으로서 무장해제를 위 해 투쟁해야 한다(Engels ,1990: 371, 괄호는 저자).

2. 시험과 몰락
머지않아 평화 시의 이론적 논쟁은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전환되었 다. 이 시기 노동자 운동은 그들의 대표들이 처음에 어떤 전쟁에도 반대하는 현실 과 직면해야 했다. 1879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파리 코뮌 직전에 일어난)에서 독 일 사회민주당 의원인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와 아우구스트 베 벨(August Bebel)은 비스마르크의 독일이 추진하는 병합주의적 목적을 규탄했고, 전쟁공채에 반대투표를 했다. “전쟁을 계속하려는 추가적 자금을 위한 법안을 거 부하는”(Pelz, 2016: 50) 결정으로 인해 그들은 2년 징역형을 받았지만, 그들의 행동 은 노동계급에게 위기에 대한 대안적 방식을 보여주는 데 기여했다.

유럽의 주요 열강들이 제국주의적 팽창을 지속하면서, 전쟁에 관한 논쟁은 제2 인터내셔널(1889~1916)에서 훨씬 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창립 대회에 서 채택한 결의안은 평화를 “노동자 해방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Dominick, 1982: 343)으로 정립했다. 부르주아지가 주장하는 평화정책은 비웃음을 샀고, “무 장한 평화”의 정책으로 규정되었다. 1895년 프랑스 사회당(SFIO)의 지도자인 장 조레스(Jean Jaures̀ )는 유명한 의회 연설에서 좌파의 우려를 요약했다. “여러분의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운 사회는 심지어 평화를 원할 때에도, 심지어 명백한 휴지 상태에 있을 때에도, 잠자는 구름이 폭풍우를 품고 있는 것처럼 전쟁을 자체 내부 에 품고 있다”(Jaures̀ , 1982: 32).

독일제국이 국제적 영역에서 권력을 확대하려는 공격적 정책인 ‘세계정책 (Weltpolitik)’을 전개함에 따라 지정학적 상황을 변화시키면서 반제국주의 원칙은 노동자 운동에서 더 깊은 뿌리를 내렸고 무장갈등에 관한 토론에 영향을 주었다. 전쟁은 더 이상 혁명적 기회를 열고 체제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것(1872년 혁명전쟁 이후 좌파의 사상)으로 간주되지 않았다.2 기아, 궁핍, 실업의 형태로 프롤레타리아 트에게 미치는 심각한 영향 때문에 전쟁은 이제 위험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전 쟁은 진보세력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고, 『사회혁명』(1902)에서 칼 카우츠키(Karl Kautsky)가 썼던 것처럼, 진보세력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비핵심적인 임무로 과도 하게 부담”(Kautsky, 1903: 77)하게 되며, 이는 최종적 승리를 더 가까이 가져오기 보다는 더 멀어지게 할 것이다.

1907년 제2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안 「군사주의와 국 제분쟁에 관하여」는 노동자 운동의 공통적 유산이 된 모든 핵심을 되풀이해서 요 약했다. 그 핵심은 군비 지출을 증가시키는 예산에 반대하는 투표, 상비군에 대한 반감, 민중의 민병대 시스템에 대한 선호,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중재법 원을 창출할 계획에 대한 지지 등이다. 여기에는 구스타브 에르베(Gustave Hervé) 가 제시한 바대로 어떤 종류의 전쟁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총파업 호소는 배제되었 다. 왜냐하면 참석자의 다수가 그 방침을 너무 급진적이고 마니교적(이분법적 — 옮 긴이)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의안은 로자 룩셈부르크, 블라디미르 레닌, 율리 마르토프가 작성한 수정안으로 마무리되었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 전쟁 의 신속한 종식을 위해 개입하고, 전쟁이 야기한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활용할 모 든 능력을 발휘해 대중들을 고무하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적 계급지배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의무이다”(Vv. Aa, 1972: 80). 그러나 이 결의안이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정치노선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사민당 의원 들은 전쟁에 찬성하는 투표를 했다. 수정된 텍스트는 제2인터내셔널에서 만장일치 의 지지를 확보한 전쟁에 관한 마지막 문서였다.

세계시장에서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더욱 격렬한 경쟁은 수많은 국제분쟁의 발발과 함께 전반적인 상황을 훨씬 더 경악스럽게 만들었다. 조레스의 『새로운 군 대』(1911)의 출판은 이 시기의 또 다른 중심적 주제, 즉 공격적 전쟁과 방어적 전쟁 사이의 구분과, 하나의 독립이 위협받는 경우를 포함해 방어적 전쟁에 대해 취할 태도에 관한 토론을 자극했다. 조레스에게 군대의 유일한 임무는 어떤 공격적 침 략 또는 중재를 통한 분쟁의 해결을 받아들이지 않는 어떤 침략국으로부터 민족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 범주에 들어가는 모든 군사적 행동은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입장에 대해 룩셈부르크는 “현대전과 같은 역사적 현 상은 ‘정의’라는 잣대로 또는 방어와 공격이라는 문서상의 도식을 통해 측정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Luxemburg, 1911). 그녀의 견해로는 어떤 전쟁이 진정으로 공 격적인지 아니면 방어적인지 또는 전쟁을 시작한 국가가 고의로 공격하기로 결정 했는지 아니면 전쟁에 반대하는 나라가 채택한 전략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 는지를 판단할 때의 어려움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룩셈부르크는 그런 구별을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무장한 국가’가 궁극적으로 사회에서 점증하는 군사화를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다는 근거로 조레스의 개념을 더욱 비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2인터내셔널은 평화를 위한 투쟁의 정책을 더욱더 방기했 다. 재무장과 전쟁 준비에 대한 반대는 활기를 잃었고, SPD의 더욱 온건하고 합법 주의적 영향은 독일에서 정치적 자유를 더 많이 부여받는 대가로 군사공채, 그리 고 그다음엔 심지어 식민지 팽창에 대한 지지와 거래했다. 구스타브 노스케(Gustav Noske), 헨리 하인드먼(Henry Hyndman), 아르투로 라브리올라(Arturo Labriola) 등 과 같은 중요한 지도자와 저명한 이론가들은 이런 입장에 처음으로 도달한 자들이 었다. 이후에 독일 사민당원, 프랑스 사회당원, 영국 노동당 지도자들, 다른 유럽의 개량주의자들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지지하게 된다. 이런 경로는 재앙적 결과를 가져왔다. ‘진보의 혜택’을 자본가들이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으로 노동자 운동은 지배계급의 팽창주의적 목표를 공유하게 되었고 민족주의 이 데올로기의 수렁에 빠졌다. 제2인터내셔널은 전쟁에 직면해 완전히 무력했고, 평 화의 유지라는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에서 실패했다.

치머발트 협의회(1915)에 참석한 레닌과 다른 대의원들은 최종 선언을 작성한 레브 트로츠키를 포함해 “수십 년 동안 전비 지출은 민족들의 최상의 에너지를 흡 수할 것이고, 사회적 개선을 침해하고 어떤 진보도 방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들의 눈에는 전쟁이 “노동 대중의 이해뿐만 아니라 […] 심지어 인류의 공동 생존 의 첫 번째 조건과도 화해할 수 없게 된 적나라한 형태의 현대 자본주의”임을 폭로 했다(Vv. Aa, 1915). 이런 경고에 노동자 운동의 소수만이 귀를 기울였고, 킨탈 협의 회(1916)의 모든 유럽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도 그러했다. “여러분의 정부와 그 들의 신문은 여러분에게 군사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해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 한다. 그들은 여러분을 기만하고 있다! 전쟁은 결코 전쟁을 종식시킨 적이 없다. 정말로 전쟁은 복수의 감정과 소망을 낳는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에게 희생을 강 요해 여러분을 연옥의 순회 속에 가둔다”(Vv. Aa, 1977: 371). 국제 중재법원을 호소 했던 슈투트가르트 대화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킨탈의 최종 문서는 “부르주아적 평 화주의의 환상”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경제적 시 스템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래의 군사적 분쟁을 막는 유 일한 방식은 인민대중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해 자본주의적 소유를 타도하는 것이 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블라디미르 레닌은 전쟁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두 사람이 었다. 룩셈부르크는 좌파의 이론적 이해를 확대했고, 군사주의가 어떻게 국가의 핵 심 중추인지 보여줬다.3)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보다 강력한 확신과 뛰어난 효율 성을 보여준 룩셈부르크는 “전쟁에 대한 전쟁을!”이라는 슬로건이 “노동계급 정치 의 초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임무에 관한 테제』(1915)에 썼던 것처럼 제2인터내셔널은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공 동 전술과 투쟁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자멸했다. 따라서 그 이후로 프롤 레타리아트의 “주요한 목적”은 “전쟁 시처럼 평화 시에 제국주의와 투쟁하고 전쟁 을 막는 것”이어야 한다(Luxemburg, 1915b).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사회주의와 전쟁』(1915)과 다른 많은 저술에서, 레닌의 커다란 장점은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부르주아 지가 이번에 어느 교전국이 가장 많은 외국 민족을 억압하고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증가시킬지 결정할 유일한 목표로 실제로 수행되는 ‘약탈’ 전쟁에 ‘민족해방의 진 보적 의미’(Lenin, 1971: 299~300)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려고 할 때면 언제나 저지르 는 ‘역사적 위조’와 관련된 것이다. 두 번째는 사회개량주의자들, 또는 ‘사회배외주 의자들’(Lenin, 1971: 306)에 의한 모순의 은폐였다. 이들은 제2인터내셔널이 채택 한 결의안에서 ‘범죄적’ 활동이라고 규정했음에도 궁극적으로 전쟁의 정당화를 승 인했다. ‘조국을 수호한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특정 열강들이 ‘식민지를 강탈하고 외국 민족들을 억압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여한 권리가 존재한다. 전쟁은 ‘민족 의 존속’을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특권과 지배, 약탈과 폭력을 방어하기 위해’ 치러진다(Lenin, 1971: 307). 애국주의에 굴복 한 사회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을 ‘다른 나라들을 약탈하여 자국 부르주아지가 획득 한 이유의 한 조각’에 대한 권리 주장으로 대체했다. 따라서 레닌은 ‘방어적 전쟁’을 지지했다. 즉 조레스식으로 유럽 나라들의 민족방어가 아니라 ‘노예를 소유한 열강 들’에게 ‘약탈당하고 권리를 박탈당한 피억압 예속 민족들의 정당한 전쟁’을 지지 했다(Lenin, 1971: 314). 레닌의 팸플릿의 가장 유명한 테제, 즉 혁명가들은 ‘제국주 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Lenin, 1971: 315)4 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테제는 ‘지 속적인 민주적 평화’를 원한다면 ‘자신들의 정부와 부르주아지에 대한 내전’(Lenin, 1971: 316)5 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레닌은 역사가 이후에 무엇이 부정 확한지 보여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전쟁의 시기에 수행하는 어떤 계급투쟁도 ‘불가피하게’ 대중들 사이에서 혁명적 정신을 창조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3. 구획선
제1차 세계대전은 제2인터내셔널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 운동에서도 분열을 낳았다. 전쟁 발발 직후에 발표된 논문에서 크로포트킨(Kropotkin)은 “인간 진보에 관한 사상을 소중히 여기는 모든 사람의 임무는 독일의 서유럽 침공을 분쇄하는 것”이라고 썼다(Kropotkin, 1914: 76~77). 많은 사람이 자기가 평생 투쟁한 원칙을 저버린 것으로 보는 이 진술은 노동대중들에게 주목받지 못한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이라는 슬로건을 넘어서고 독일의 승리가 가져올 유럽 정치의 전반적인 퇴 행을 회피하려는 시도였다.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만약 반군국주의자들이 무력하 면 침략자들의 정복 계획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게 되며, 그에 따른 장래는 사회혁 명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극복하기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크로포트킨에 대한 답변으로 이탈리아 무정부의자 에리코 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는 비록 그가 평화주의자는 아니고 해방전쟁에서 무기를 잡는 것이 정당 하다고 생각함에도 세계 전쟁은 부르주아 선전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주주의의 “공 동의 적에 맞서 보편 선을 위한” 투쟁이 아니며, 노동대중들이 지배계급에 종속되 는 또 다른 사례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말라테스타는 “독일의 승리가 확실히 군사 주의의 승리임을 확인하겠지만, 동맹국의 승리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영 국의 지배를 의미할 것”임을 인식했다(Malatesta, 1993: 230).

「16인 선언」(1916년)에서 크로포트킨은 “우리 모두의 해방이란 희망의 파괴를 의미하는 침략자에 저항할” 필요를 주장했다(Kropotkin et al., 1916). 독일에 맞선 삼각동맹(triple entente)의 승리는 더 작은 악이며, 기존의 자유를 덜 침해할 것이다. 다른 편에서 말라테스타와 그의 동료 서명자들은 무정부주의 인터내셔널의 반전 선언(1915)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공격전과 방어전 사이의 구별은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그들은 “어떤 교전국들도 정당한 자기방어를 주장할 자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명을 주장할 어떤 권리도 없다”라고 덧붙였다(Malatesta et al., 1998: 388).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은 노동계급의 희생으로 치러지는 다양한 제국주의 열강의 자본가들 사이의 전쟁에서 추가적 에피소드였다고 주장했다. 말라테스타, 에마 골드먼(Emma Goldman), 페르딘(Ferdin), 뉴엔하위스(Nieuwenhuis)와 대다수의 무정부주의 운동가들은 부르주아 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오류라고 확신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어떤 조건이나 반대도 없이 “군대에는 단 한 명도 단 한 푼도 거부한다(no man and no penny for the army)”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쟁 추진을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어떤 슬로건도 거부했다.

전쟁에 대한 태도는 여성운동에서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오랫동안 남성이 독 점한 직업에서 징집 남성을 대신할 여성의 필요성은 훨씬 낮은 임금과 과잉 착취 라는 조건 속에서도 새로 태어난 여성 투표권 운동의 상당한 부분에서 배외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자극했다. 일부 지도자들은 여성의 입대를 허용하는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 청원하기도 했다. 내부의 적을 소환해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역전시 키려고 전쟁을 이용한 일구이언 정부들의 폭로는 이 시대 주요한 여성 공산주의자 들의 가장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 실비아 팽크허스트(Sylvia Pankhurst), 그리고 당연히 로자 룩셈부르크는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가부장제에 반대하는 투쟁에 핵 심적임을 후세대에게 보여주는 경로에 명료하고 용감하게 나섰다. 후에 전쟁 거부 는 국제여성의 날의 명확한 의제가 되었고, 새로운 분쟁이 발발하는 경우 전쟁예 산 반대는 국제 여성운동의 많은 강령에서 뚜렷한 특징이 되었다.

4.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잘못된 수단은 목적에 피해를 가한다
혁명가와 개량주의자 사이의 깊은 분열은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6 과 1920년대 와 1930년대 이데올로기적 교조주의의 성장 이후 전략적 차이를 확대했고, 공산주 의 인터내셔널(1919~1943)과 유럽의 사회당 및 사민당 사이의 어떤 동맹도 배제했 다.7 전쟁을 지지했던 정당들은 노동·사회주의 인터내셔널(LSI: 1923~1940)을 결 성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눈으로 볼 때 모든 신뢰를 상실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는 레닌주의적 사상은 여전히 모스크바에서 우위를 보였고, 소 련의 지도적 정치인과 이론가들은 ‘새로운 1914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 런데 양측의 토론은 처음부터 전쟁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보다는 새로운 전쟁이 일 어날 경우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슬로건과 원칙선언은 일어날 것으 로 예상되는 사태나 그 이후의 정치 행동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공산주의 진영의 비판적 목소리는 “평화를 위한 투쟁”이라는 슬로건을 주창한 니콜라이 부 하린(Nikolai Bukharin)을 비롯하여 러시아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현대사회의 핵심 적 이슈 가운데 하나라고 확신한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모든 열강의 전쟁 위협에 동등하게 책임이 있지는 않다고 주장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광범한 인민전 선을 건설하기 위해 개량주의 정당들과의 화해를 지지했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Georgi Dimitrov)도 있다. 이들의 견해는 모두 소비에트 정통의 장황한 논리와 대 조된다. 소비에트는 이론적 분석을 업데이트하기는커녕 전쟁의 위험은 동등하게, 아무런 차이도 없이 모든 제국주의의 열강이 야기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 문제에 관한 마오쩌둥의 견해는 전혀 달랐다. 일본 침략에 맞선 해방운동의 지도자로서 마오는 『지구전에 관하여』(1938)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참 여해야 하는 “정당한 전쟁(Mao Tse-Tung, 1966: 15)은 엄청난 권력을 부여받으며, 그 권력은 많은 것을 변혁할 수 있고 또는 변혁을 위한 길을 닦는다”라고 썼다 (Mao Tse-Tung, 1966: 26~27). 따라서 마오가 제시한 전략은 “정당한 전쟁으로 부 당한 전쟁에 대항하는 것”이자(Mao Tse-Tung, 1966: 53), 더 나아가 “정치적 목적 을 성취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혁명전쟁의 전능함”에 관한 주장 은 『전쟁과 전략 문제』(1938)에서 반복되는데, 마오는 “오직 총으로만 전 세계를 변혁할 수 있으며(Mao Tse-Tung, 1965: 219), 군대에 의한 권력장악, 전쟁에 의한 문제 해결은 혁명의 중심적 임무이자 최고 형태”라고 주장했다(Mao Tse-Tung, 1965: 225).

유럽에서 국내외적으로 강화되는 나치-파시스트 전선의 폭력과 제2차 세계대 전(1939~1945)의 발발로 1914~1918년 전쟁보다 훨씬 더 극악한 시나리오가 펼쳐 졌다. 1941년 히틀러의 군대가 소련을 공격한 이후 나치즘의 패배로 끝난 대애국 전쟁은 러시아 민족단결의 중심적 요소가 되어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서도 살아남 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전후 세계가 두 진영으로 분할되자 조셉 스탈린(Joseph Stalin, Iosif Vissarionovich Stalin)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한 임무는 소련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가르쳤 다. 동유럽 8개 나라(유고슬라비아의 퇴장 이후 7개)의 의 완충지대를 창출하는 것이 이 정책은 중심축이었다. 같은 시기 트루먼 독트린은 새로운 유형의 전쟁인 냉전 의 도래를 상징한다. 그리스에서 반공주의 세력의 지지, 마셜플랜(1948), NATO 설립(1949) 등을 통해 미국은 서유럽 진보세력의 전진을 피하는 데 기여했다. 소련 은 바르샤바 조약(1955)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구도는 거대한 무기경쟁으로 이어 졌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실험의 확산을 자극 했다.

1961년부터 니키라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의 지도로 소련은 ‘평화공존’으 로 알려진 새로운 정치적 경로를 밟기 시작했다. 이 전환은 불개입과 민족권의 존 중, 자본주의 나라들과의 경제협력에 대한 강조와 함께 제3차 세계대전의 위험을 회피하고(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가능성을 보여준) 전쟁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이런 건설적 협력 시도는 오직 미국 에만 적용되었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주의’ 나라들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1956년 소련은 이미 헝가리의 반란을 분쇄했고, 서유럽의 공산당들은 사회주의 블 록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자행된 군사개입을 비난하지 않고 정당화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공산당의 서기인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는 “우리는 비록 실수를 하더라도 우리 편에 선다”라고 선언했다(Vittoria, 2015: 219). 이 입장을 공 유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소비에트 작전의 파괴적 영향을 이해한 이후에 이를 뼈저 리게 후회했다.

비슷한 사건들이 평화공존의 정점인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났다. 프 라하의 봄 동안 민주화와 경제적 탈집중화 요구에 직면한 소련공산당의 정치국은 만장일치로 50만 명의 군대와 수천 대의 탱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1968년 폴란 드 통합노동자당 대회에서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는 바르샤바 조약 나라들의 ‘제한주권’을 언급함으로서 이 행동을 설명했다.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세력이 어떤 사회주의 나라의 발전을 자본주의로 전환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관 련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의 공동의 문제이자 관심이 된 다”(1968년 11월 13일 브레즈네프가 폴란드 통합노동자당 5차대회에 참석해 한 연설 — 옮긴 이). 이 반민주적 논리에 따라 무엇이 ‘사회주의’인지 아닌지의 규정은 자연스럽게 소련 지도자들의 자의적 결정에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좌파에서 비판은 더욱 적극적으로 개진되어 심지어 다수를 대표하기도 했다. 소련의 행동에 대한 반대는 신좌파 운동만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을 포함한 다수의 공산당들이 표현했 음에도, 러시아는 후퇴하지 않고 ‘정상화’라고 부르는 과정을 관철시켰다. 소련은 계속 경제자원의 상당 부분을 군비 지출에 책정했고, 이는 사회의 권위주의적 문 화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식으로 소련은 평화운동의 선의를 영원히 상실 했다. 반면 평화운동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강력한 투쟁을 통해 훨씬 더 크게 성장 했다.

그 이후 가장 중요한 전쟁 가운데 하나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시작되 었다. 1917년 붉은 군대는 또다시 소련 외교정책의 주요한 도구가 되었고, 소련은 스스로 ‘안보 지역’이라고 규정한 곳에 개입할 권리를 계속해서 주장했다. 불운한 결정은 10년 이상 늘어지는 소모적 모험으로 전환되었고, 엄청난 사망자와 수백만 명의 난민을 만들어냈다. 이때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소련 침공에 비해 훨씬 더 억제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 새 전쟁은 ‘실제 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와 평화와 군국주의 반대에 기초한 정치적 대안 사이에 갈 라진 국제 여론을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군사적 개입은 전반적 군비축소에 반해 작동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를 불신하게 만들고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소련 은 점차 미국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제국주의 열강으로 여겨졌다. 미 국은 냉전의 개시 이후 다소 은밀하게 쿠데타를 지원했고, 전 세계 20개국 이상에 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도록 지원했다. 중소분쟁을 배경으로 1977~1979년 캄보디아와 베트남,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사회주의 전쟁’은 전쟁 을 전적으로 자본주의의 경제적 불균형으로 돌렸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 로기(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제기한 원래의 기초로부터 이미 아주 멀어진)의 모든 권위를 날 려버렸다.

5. 좌파가 된다는 것은 전쟁에 반대하는 것
냉전의 종식은 다른 나라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줄이지도 않았고, 모든 민중이 정치체제를 선택할 자유를 증대시키지도 않았다. 지난 25년 동안 심지어 UN의 위 임도 없이 터무니없이 ‘인도주의적’라고 규정한 수많은 전쟁들과 그밖에 불법 제 재, 정치·경제·언론의 통제 등 새로운 형태의 분쟁은 초강대국을 사이에 둔 세계의 양극 분할로 인해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신자유주의적 주문(mantra)이 약속한 자 유와 진보의 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과거에 좌파의 가치를 내세 웠던 많은 정치세력들이 수많은 전쟁에 참여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NATO 가 수행한 주요한 전쟁만 언급하더라도 코소보에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 세력은 매번 무장개입을 지지했고, 더욱더 우파와 구별할 수 없도록 행동했다.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한 나라의 주권이 공격받을 때 좌파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딜레마에 다시 한번 직면하게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지 않는 것은 베네수엘라 정부의 정치적 오류이며, 미국이 미래에 자행할 공격 행위에 대한 베네수엘라의 비난이 덜 신뢰성을 갖도록 보이게 한다. 마르크스가 1860년 페르디난트 라살(Ferdinand Lassale)에게 썼듯이, “대외정책에 서 ‘반동적’이나 ‘혁명적’이라는 구호를 사용해 얻을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은 사실 이다. 즉 “주관적으로 반동적인 것이 대외정책에서 객관적으로 혁명적”(Marx, 1860: MECW, Vol.41, pp.154)이다(인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그러나 좌파세력은 20 세기로부터 ‘적의 적과의’(Musto, 2018: 132) 동맹이 비생산적 협정으로 귀결되고, 특히 우리 시대처럼 진보적 전선이 정치적으로 취약하고, 이론적으로 혼란스럽고, 대중투쟁의 지지를 결여하고 있을 때에 더욱 그렇다는 교훈을 배웠어야 했다.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자결권』에 실린 레닌의 말을 상기해 보자. “한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한 민족해방 투쟁이 특정한 상황 아래에서 동일하게 제국주의적인 이 해를 가진 다른 ‘거대’ 열강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사회민주주의가 민 족자결권의 승인을 비난하도록 하는 데 어떤 비중을 가져서는 안 된다”(Lenin, 1964b: 148). 지정학적 이해와 그 안에서 역시 대부분 작동하는 책략을 넘어 좌파세 력은 역사적으로 민족자결의 원칙을 지지했으며, 인민의 명확한 의지에 기초해 그 들의 국경을 수립할 원칙을 바탕으로 개별 국가의 권리를 수호했다. 좌파는 전쟁 과 ‘병합’이 지배민족과 피억압 민족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극적인 갈등으로 이어 지고, 후자가 전자를 자신의 적으로 간주해 자국의 부르주아지와 단결할 조건을 창출한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에 전쟁과 병합에 반대해 투쟁했다. 『자결에 관한 토론 결과』(1916년)에서 레닌은 이렇게 썼다. “만약 사회주의 혁명이 페트로그라 드, 베를린, 바르샤바에서 승리한다면,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부는 러시아와 독일의 사회주의 정부처럼 폴란드 국가의 국경 내에서 우크라이나인의 ‘강제적 억류’를 비난할 것이다”(Lenin, 1964a: 329~330). 그렇다면 왜 블라디미르 푸틴이 이끄는 민 족주의 정부에 대해 어떤 다른 것을 양보해야 한다고 암시하는가?

다른 한편, 좌파에서 너무나 많은 이들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공동 교전자가 되는 유혹에 굴복해 새로운 신성한 연합(union sacrée: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정부의 전쟁 선택을 승인하기로 결정한 프랑스 좌파세력의 선서를 환영하기 위해 1914년 만들어진 표현)을 부추기고 있다. 오늘날 그런 입장은 더욱 대서양주의와 태평양주의 사이의 구별을 모호하게 한다. 역사는 진보세력이 전쟁에 반대하지 않을 때 존재 이유의 본질적 부분을 상실하여 결국 반대 진영의 이데올로기를 삼키게 된다는 사실을 보 여준다. 이런 일은 좌파 정당이 정부 참여를 정치 행동을 측정하는 근본적 방식으 로 삼을 때마다 일어난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은 코소보와 아프가니 스탄에 대한 NATO의 개입을 지지했고, 오늘날 스페인 좌파(Unidas Podemos)의 다 수는 스페인 의회 전체의 합창에 목소리를 더해 우크라이나 군대에 무기를 보내는 데 찬성했다. 그런 저급한 행위는 상황이 발생하자마자 치러지는 선거를 포함해 과거에 수차례 처벌받은 바 있다.

6. 보나파르트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1850년대 마르크스는 크림전쟁에 관한 훌륭한 일련의 논문을 작성했고, 거기에 는 오늘날과 비교해도 흥미롭고 유익한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19 세기 외교사의 폭로』(1857)에서 러시아를 통일시키고 전제정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여겨지는 15세기 모스크바 군주정에 관해 말하면서 이렇게 진술했다. “단지 일련 의 이름과 날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면 […] 이반 3세의 정책 과 오늘날 러시아의 정책이 단지 비슷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다는 것이 분명해진 다”(Marx, 1986: 86). 그러나 ≪뉴욕 데일리 트리뷴(New York Daily Tribune)≫에 기 고한 논설에서 마르크스는 반러시아 연합을 찬양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에 반대하면서 이렇게 썼다. “러시아에 대한 전쟁을 자유와 폭정 사이의 전쟁으로 묘 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한 경우가 사실이라면 자유가 임시로 보나파르트로 대 표될 것이라는 사실과는 별도로, 전쟁의 전체적인 공인된 목표는 […] 비엔나 조약 의 유지이지만, 바로 조약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무효화한다”(Marx, 1980: 228). 보나파르트를 미국으로, 비엔나 조약을 NATO로 바꾸면, 이런 관찰은 오늘의 상 황을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인다.

NATO의 확대만이 아니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에 모두 반대하는 사 람들의 생각은 정치적 우유부단함 또는 이론적 모호성의 증거를 보여주지 않는다. 최근 몇 주 동안 수많은 전문가들이 분쟁의 뿌리에 관한 설명을 제공했고(그것은 결 코 러시아 침공의 야만성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비동맹정책을 제안하는 사람들의 입장 은 가능한 한 조속하게 전쟁을 중지하고 피해자 수의 최소화를 보장하는 가장 효 과적 방식이다. 그것은 추상적 이상주의에 빠진 ‘아름다운 영혼’처럼 행동하는 문 제가 아니며, 헤겔은 그런 사람이 지상의 모순의 실제적 현실에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문제는 전쟁은 무제한적 확대의 유일하고 진정한 해독제에 현실 을 부여하는 것이다. 군비 지출 확대와 추가 징집을 호소하는 목소리 또는 외교 사 안 및 안보정책 고위 대표로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제공 하는 것이 유럽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끝이 없다(Borrell, 2022). 그러나 이 런 입장과 대조적으로, 두 가지 확고한 원칙, 즉 분쟁의 비확대와 독립 우크라이나 의 중립성에 기초해 끊임없는 외교 활동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러시아의 움직임에 따라 NATO에 대한 지지가 늘어났지만, 여론이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전쟁 기계인 NATO를 전 세계 안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지 않도록 활동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NATO는 위험하고 비효율적인 조직이며, 확 장과 전일적 지배를 추진하면서 전 세계를 전쟁으로 이끌 긴장을 부추기는 조직임 을 보여줘야 한다.

『사회주의와 전쟁』에서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는 “각각의 전쟁을 분리해서 연 구하는 것(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이 역사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 다”는 점에서 평화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계속해서 레닌 은 이렇게 주장했다. “역사에서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모든 전쟁에 불가피하게 수 반하는 모든 공포, 잔혹, 고난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진보적이었다, 즉 인류 의 발전에 혜택을 줬다”(Lenin, 1971: 299). 이 말이 과거에는 진실이었다 해도, 대 량살상무기가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그런 말을 단순히 되풀이 하는 것은 근시안적일 것이다. 혁명과 혼동해서는 안 되지만, 전쟁은 사회주의 이 론가들이 희망하는 민주화 효과를 낸 적이 드물었다. 사실 전쟁은 대부분 인간 생 명의 희생과 그에 수반하는 생산력의 파괴 때문에 혁명을 수행하는 최악의 방법으 로 판명되었다. 사실 전쟁은 폭력 이데올로기를 유포하고 자주 민족주의 감정과 결합되어 노동자 운동을 갈기갈기 분열시켰다. 전쟁이 자주관리와 직접 민주주의 의 실천을 유리하게 했던 적은 드물었고, 그 대신 권위주의적 기관들의 권력을 강 화했다. 이것은 온건한 좌파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전쟁에 관한 성찰』(1933)의 가장 풍부한 문구 가운데 하나에서 시몬 베이유는 ‘혁명이 전쟁을 회피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견해로는 그것은 우리가 ‘모든 희망을 포기’하길 원하지 않는 경우에 가질 수 있는 ‘박약한 가능성’일 뿐이 다(Weil, 2021[1933], op. cit., p.101). 혁명전쟁은 대부분 ‘혁명의 무덤’으로 바뀐다. 왜냐하면 “무장한 시민에게는 통제 기구 없이, 경찰의 압력 없이, 특별법원 없이, 탈영에 대한 처벌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단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사회적 현상보다 더 전쟁은 군사, 관료, 경찰 기구를 팽창시킨다. “전쟁은 국가기 구 앞에서 개인의 총체적 소실로 이어진다”. 따라서 “만약 전쟁이 즉각적으로, 그 리고 영구히 종식되지 않으면 […] 그 결과는 마르크스의 말대로 국가의 분쇄 대신 에 국가기구를 완성하는 그런 혁명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또는 더욱 더 명 확하게 “전쟁은 우리가 억압하길 원하는 체제를 다른 형태로 확대하는 것을 의미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쟁이 일어날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톱니바퀴로 전락 시키는 전쟁 기계의 작동을 방해하는 것과 맹목적으로 인간 생명을 말살하는 기계 를 돕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8

좌파에게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문구를 인용하자면,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 한 정치의 계속”이 될 수 없다. 현실에서 전쟁은 정치의 실패를 확인할 뿐이다. 좌 파가 헤게모니를 회복하고 자신이 오늘날의 과제를 위해 자신의 역사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좌파는 부정할 여지없이 자신의 깃발에 ‘반군사 주의’와 ‘전쟁 반대’를 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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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마르크스주의 연구 Marxism 21

Pub Info:

Vol. 19 (2022), n. 2, 142-163

Reference:

DOI: 10.26587/marx.19.2.20220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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