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 는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마르크스 저작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수고는 매우 자주 토론되었고, 또 그 저자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 수고가 나타내는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1932년 첫 판본의 출판으로 시작된 이론적이고 정치적 논쟁과 함께, 많은 논평자들이 마르크스의 젊은 시절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간주하는 것에 대한 오해를 낳는 데 기여하였다. 이 논문은 마르크스가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체류하던 당시의 지적 풍조와 그곳에서 시작한 경제학 연구에 관해 설명한 뒤에 이 주요한 발전의 시기에 그가 성취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거대한 성숙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와 그와 병행했던 정치경제학자들의 저작에서 발췌한 노트들 간의 밀접한 관계도 검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1843년 가을부터 1845년 1월까지 파리에서 작성한 마르크스의 수고들과 발췌노트의 연대기적 순서를 만든 표를 제시하겠다.
1. 파리: 신세계의 수도
파리는 “하나의 괴물 같은 기적, 운동들과 기계 그리고 관념들의 놀라운 조합(assemblage), 수많은 여러 로맨스들의 도시, 이 세계의 생각-상자이다”(Balzac, 1972: 33). 이것은 발자크가 자신의 소설 중 하나에서 파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거대도시의 영향을 묘사한 것이다. 1848년 혁명 이전의 기간 동안, 이 도시에는 끊임없이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는 장인들과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망명자들, 혁명가들, 작가들과 미술가들의 거류지들, 그리고 광범위한 사회적인 소요로부터 파리는 다른 시대에는 얻을 수 없는 강렬함을 얻었다. 매우 다양한 지적 재능을 가진 남녀들이 책, 잡지와 신문을 출간하고, 시를 쓰고, 회합에서 연설하고, 그리고 카페에서, 거리에서, 공원 벤치에서 끝없이 토론하였다. 그들의 밀접한 근접성은 서로 간에 지속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했다(Berlin, 1963: 81f.).
바쿠닌은 라인 강을 건너기로 결심하자마자 갑자기 “정치적 관념들이 사회의 모든 계층들 사이에서 순환하는 분위기에 휩싸였던 독일에서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새로운 요소들 사이에” 자신이 처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Bakunin, 1982: 482). 폰 슈타인은 “대중들의 삶 자체가 새로운 결합을 창조하고 새로운 혁명을 사고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적었다(von Stein, 1848: 509). 루게는 “파리에서 우리는 승리하거나 아니면 패배할 것”이라는 관점을 지녔다(Ruge, 1975: 59). 요약하면 파리는 역사상 특별한 순간에 있는 곳이었다.발자크에게 “파리의 거리들은 인간적 특징과 우리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인상들을 남기는 관상을 가졌다”(Balzac, 1972: 31). 이런 인상들 중 많은 것들이 또한 25살의 나이로 1843년 10월에 그곳에 온 마르크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인상들은 파리 체류 시기에 결정적으로 성숙했던 마르크스의 지적 진화에 심오한 영향을 남겼다.
≪라인신문≫에서 언론가로서의 경험을 한 뒤에 마르크스가 헤겔의 이성적 국가와 이와 관련된 민주적 급진주의라는 개념적 지평을 폐기한 것은 프랑스의 수도에 어떤 하나의 이론적 입장을 지니고 왔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 이론적 입장은 이제 프롤레타리아트의 뚜렷한 모습에 의해 흔들렸다. 새로운 사회-경제적 현실의 급속한 강화를 보여주는 그 시대의 문제적 분위기가 만들어낸 그 불확실성은 마르크스가 파리 노동자계급과 그들의 생활 및 노동 조건들을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접하고 나서 소멸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발견과 그들을 통한 혁명의 발견; 여전히 불명확하게 정의되었고 반쯤은 공상적인 공산주의에 대한 새로운 헌신; 헤겔의 사변철학과 헤겔 좌파에 대한 비판; 역사의 유물론적 해석에 관한 최초의 윤곽과 정치경제학 비판의 시작: 이런 것들이 마르크스가 이 시기에 발전시킬 기본적 주제들이다. 파리의 체류기간 동안 작성한 소위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라는 유명한 초기 텍스트에서의 비판적 해석보다 조금 앞서 작성한 일련의 노트들은 주로 철학적 문제에 집중했다.
2. 정치경제학에 정착하기
≪라인신문≫에서 일했을 때 마르크스는 이미 특별한 경제적 문제들을 다루었지만, 항상 법적 혹은 정치적 관점에서였다. 결과적으로 1843년 크로이츠나흐에서 발전시켰던 관념들 ― 이 관념들은 〚헤겔법철학 비판 서설〛의 원천으로서 그 속에서 시민사회는 정치적 국가의 실질적 근거로 표현된다 ― 에서 마르크스는 최초로 사회적 관계에서 경제적 요소의 중요성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에 대한 의식적인 비판적 연구”를 시작한 것은 오직 파리에서였다(Marx, 1975d: 231). 법과 정치 영역의 모순들은 자신들의 영역 자체 내에서는 풀 수 없다는 것과 법과 정치 둘 다 사회적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에서 결정적 추진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개요”(『독불연보』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간행본에 실린 그의 두 논문 중 하나)도 이 시기의 마르크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때까지 주로 철학적, 정치학적, 역사적이었던 마르크스의 연구는 이후 과학적 관심의 지주가 되고, 결코 포기하지 않을 새로운 지평이 될 새 분야로 변경되었다(예를 들면, Rubel, 1968: liv~lv).
모제스 헤스의 “화폐의 본질”과 그의 사변에서 사회-경제적 지평으로의 소외 개념의 치환에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는 먼저 인간의 본질 실현에 대한 장벽으로서 화폐의 경제적 매개(기능)에 대한 비판에 집중했다. 브루노 바우어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마르크스는 유대인 문제를 자본주의 문명 전체로서 철학적, 사회-역사적 전제를 나타내는 사회적 문제로 간주했다. 유대인은 자본주의 문명이 생산한 관계의 은유이자 역사적 전위였고,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와 동일한 세계적 존재였다(Tuchscheerer, 1968: 56).
그 직후 마르크스는 새로운 연구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독서를 시작했고, 몇 가지 실례가 증명하듯이, 수고들과 보통 때처럼 독서한 재료에서 편집한 발췌와 노트의 노트북들에 구두점을 찍었다. 그의 작업의 지표는 정치경제학의 가장 거대한 신비화 ― 정치경제학의 범주들이 모든 시기, 모든 장소에서 유효하다는 생각 ― 를 폭로하고 반대하는 것이었다. 자기 시대의 경제적 조건들의 비인간성을 자연적 사실로 제시하며 이를 숨기고 정당화하려 했던 경제학자들의 맹목성과 역사적 감각의 결여에 대해 마르크스는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세이의 한 저작에 대한 논평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적 소유는 그 구성이 정치경제학에 관계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정치경제학이 그것의 기초인 어떤 사실이다. … 그러므로 정치경제학 전체는 필연성이 결여된 하나의 사실에 근거한다”(Marx, 1981: 316). 유사한 논평들이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은 사적 소유라는 사실과 함께 시작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 경제학자는 연역해야 할 것을 사실과 사건의 형태로 가정한다”(Marx, 1975d: 270~271).
그래서 정치경제학은 사적 소유의 체제, 연관된 생산양식과 그에 조응하는 경제적 범주를 영원불변한 것으로 간주한다. 부르주아 사회의 인간은 마치 자신이 자연적 인간인 것처럼 현상한다. 요약하면, “사람들이 사적 소유에 대하여 말할 때,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을 다루는 것으로 생각한다”(Marx, 1975d: 281). 이런 존재론적 전환에 대한 마르크스의 거부는 더 이상 명확하게 할 수 없었을 만큼 분명했다.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깊은 연구는 그에게 사회 구조의 시간적 진화에 대한 첫 번째 열쇠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사적 소유를 자연권으로 보는 관념에 대해 비판한 것을 포함하여 그가 프루동의 최고의 통찰이라고 여긴 것들을 마르크스는 또한 흡수하였다(Proudhon, 1890: 44f.). 이런 토대들을 통해 마르크스는 역사의 일시적 성격에 대한 주요한 인식론적 파악을 성취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법칙들을 인간 사회의 영원한 법칙으로 표현했다. 대조적으로 마르크스는 그의 시대의 특수한 관계, “산업의 파열된 세계”를 연구의 배타적이고 명확한 주제로 삼았다(Marx, 1975d: 292). 그는 역사에 의해 생성된 하나의 단계로서 그 일시성을 강조했고, 자본주의가 산출한 모순들과 자본주의의 지양으로 이끌 모순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상이한 이해 방식은 중요한 결과를 낳았는데, 그 중 으뜸은 소외된 노동의 개념과 관련된 것이었다. 소외된 노동이 자연스럽고 불변의 사회적 조건이라고 본 경제학자들이나 헤겔 그 자신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소외의 인류학적 차원을 거부하고 생산의 특정 구조와 사회적 관계 안에서 역사적으로 뿌리내린 개념, 즉 산업적 노동의 조건들 사이에서 인간의 소외라는 개념을 선호했다. 제임스 밀에서 마르크스가 발췌한 노트는 어떻게 “정치경제학이 사회적 교류의 소외된 형태를 인간의 본성에 조응하는 본질적이고 원천적 형태로 정의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마르크스에게 소외된 노동은 노동자 생산의 객체화라는 하나의 불변의 조건이기는커녕 “인간을 기계적 도구로 바꾸고 … 정신적, 육체적 괴물로 변형시키는” 현재의 노동분업의 제약 내에서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표현한 것이었다(Marx, 1975c: 217, 220).
개인들의 노동 행위에서 자신의 특수성, 즉 자신에게 특유한 필요의 활성화가 확인된다. 그러나 “이 노동의 실현은 노동자에게 비실현로 현상한다”(Marx, 1975d: 272). 노동은 인간적 확인, 즉 자유로운 창조 활동일 수 있지만, “사적 소유를 전제하면, 나의 개성은 소외되어 이 활동이 참으로 나에게 해로운 것, 고문, 차라리 활동의 외양만 띤 것이 될 정도다. 또한, 그래서 노동은 오직 강요된 활동 그리고 오직 끝없는 우연적 필요를 통해서만 나에게 부과되는 활동이다”(Marx, 1975c: 228).
마르크스는 경제학의 유력한 이론들을 수집하고, 그 구성요소들을 비판하고, 그 결론들을 전도시켜서 이런 결론들에 도달했다. 이 작업에 강도 높고 끈질긴 노력을 쏟았다. 파리에 살고 있던 마르크스는 독서 재료에 굶주려서, 밤낮을 그 재료의 독서에 쏟아 부었다. 마르크스는 열정과 기획들로 충만한 사람이어서, 그가 구상한 작업 계획들은 너무 거대해서 결코 끝까지 해낼 수 없을 정도였고, 탐구 대상과 관련해서는 모든 문서들을 연구하였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지식을 번개같이 빠르게 진보시키는 데, 그리고 잠시 동안 자신을 새로운 지평들로 이끄는 변화하는 관심사, 더 많은 결심들과 더욱 더 많은 연구 분야들에 몰두하고 있었다.
세느 강의 왼쪽 강둑에서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의 초고를 계획했고, 국민공회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프랑스혁명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원칙들의 비판을 의제로 삼았다. 그 다음에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에 미친 사람처럼 몰두했는데, 그것은 독일에서 바우어 등의 초월적 비판주의 영역을 최종적으로 청산하는 과제보다 갑자기 우선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중단하고 『 신성가족』이라는 최초의 완성 출판물을 작성했다. 그런 후에 또 다른 100개의 기획들에 몰두했다: 만약 비판이 하나 이루어진다면 그 비판은 그의 두뇌를 통과하고 그의 펜을 통과하였다. 헤겔 좌파 중에서는 가장 다작인 청년은 그럼에도 나머지 많은 다른 사람들보다 여전히 적게 출판했었다. 마르크스의 모든 작업을 특징짓게 될 미완성이라는 점은 파리에서의 작업에서 이미 나타났다. 열 가지 다른 방법들로 증명할 수 없다면 한 문장도 쓰지 않는 마르크스의 꼼꼼함에는 어떤 굉장한 것이 있었다. 자신의 정보가 부족하고 판단이 미숙하다는 자신의 믿음 때문에 마르크스는 착수한 연구의 많은 부분을 출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은 개요와 단편들의 형태로만 남았다. 마르크스의 노트들은 그래서 극단적으로 정확하다. 그 노트들은 마르크스의 연구의 범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고, 그 자신의 일정한 성찰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의 전체 작업의 통합적 일부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수고들과 독서 노트들이 그가 저술한 것과 다른 사람들의 저작에 대한 논평들 사이의 밀접하고도 분리할 수 없는 고리를 증명하는 시기인 파리 시절에도 또한 진실이다.
3. 수고들과 발췌노트들: 1844년의 문헌들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의 불완전하고 단편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읽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나타내는 문헌학적 문제들을 무시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한다(Rojahn, 1983: 20). 이것은 1932년에서야 처음으로 온전히 출판되었다 ― 더욱이 두 편의 분리된 판본으로. 사회민주당의 학자 란트슈트와 메이어에 의해 역사유물론이란 명칭으로 편집된 판본에서는 “경제학과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Marx, 1932a: 283~375), 반면 MEGA에서는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였다(Marx,1932b: 29~172). 이 둘은 제목뿐 아니라 내용도 달랐고, 구성의 순서도 크게 차이가 났다. 란트슈트-메이어 판본은 원본 수고들에 대한 빈약한 독해 때문에 실수들이 가득한데, 첫 번째 수고 집단, 즉 소위 제1수고를 포함하지 않았고, 실질적으로 헤겔의 『 정신현상학』의 것을 제4수고로 즉 마르크스의 것으로 돌리는 잘못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사실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MEGA에서도 편집자들은 또한 수고의 제목을 선택하는 데서, 초두에 서문을 배치하는 데서(그것은 실제로 제3수고의 일부임), 그리고 전체 논문들을 그들의 방식으로 편집하는 데서 오류들을 범하여, 사람들이 마르크스의 의도가 항상 정치경제학을 비판하기 위해 저술하였고 원래 모든 것이 여러 장으로 나누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Rojahn, 2002: 33).
더욱이 마르크스가 이 텍스트를 오직 정치경제학의 저작들만 읽고 발췌한 후에 저술했다고 잘못 가정하였는데, 실제로는 구성 과정에서 수고들의 다른 집단들이 교차되어 작성되었고, 조응하는 발췌들도 『독불연보』를 위한 논문들에서부터 『신성가족』까지 파리 시절의 전 기간에 걸쳐 간격을 두고 작성되었다. 이 명백한 형식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다른 판본들의 출판에 따른 혼돈과 그리고, 무엇보다 제2수고(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흩어져 있는)의 많은 부분이 전체 집합에서 사라졌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해석자나 또는 새로운 판본의 편집자 중 아무도 원본의 재검토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재해석은 마르크스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사이에서의 논쟁에서 높은 비중을 가진 이 텍스트를 위해서 특별히 필요하다.
5월과 8월 사이에 씌어진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는 체계적이거나 사전에 조정된 방식으로 전개된 작품이 아니다. 그것이 하나의 정해진 방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 ― 마르크스 사상의 완전함을 발견하는 속성들이나 과학적 성숙기에 반대되는 명확한 개념화를 보여주는 속성들 ― 은 신중한 문헌학적 검토에 의해 반박되었다. 동질적이지도 심지어는 구성부분들 간에 밀접히 상호 관련되지도 않은 이 수고는 운동하고 있는 하나의 입장을 명백히 표현한 것이다. 우리에게 제시되는 200페이지가 넘는 발췌와 논평들로 이루어진 9권의 발췌노트를 면밀히 검토하면 마르크스가 읽은 독서 재료들을 흡수하고 이용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파리 노트는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과 조우한 흔적들과 그의 경제학의 가장 초창기에 이루어진 정교화의 구성 과정을 기록한다. 출판되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이 시기의 저술들과의 비교는 그의 사상의 발전을 위한 독서의 중요성을 결정적으로 증명한다. 정치경제학 발췌의 목록만으로 세이, 슈츠, 리스트, 오지안더, 스미스, 스카벡, 리카도, 제임스 밀, 맥컬록, 프레보스트, 데스툿 데 트레이시, 뷰렛, 드 브로길베어, 로, 로데데일의 텍스트들을 포함한다.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에서 그리고 그 시기의 마르크스의 논문과 편지들에서 우리는 또한 프루동, 슐츠, 피키, 라우동, 시스몽디, 가닐, 셔벌리, 맬더스, 더 폼페리, 벤담에 관한 언급들을 찾아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첫 번째 발췌를 세이의 『정치경제학 개론』에서 했는데, 경제학의 기초 지식을 습득하면서 전체 편들을 바꿔 썼다. 유일한 주석은 보통 이런 의도로 마련한 공간인 문제의 지면 오른쪽 편에 나중에 추가 되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의 후속적 발췌도 경제학의 기초 개념에 대하여 마르크스가 친숙해지는 유사한 목표에 봉사하였다. 사실 이들이 가장 광범위한 발췌일지라도, 거의 논평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의 사상은, 문장들의 몽타주로부터 그리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경우처럼 여러 경제학자들의 다양한 명제들을 함께 놓는 그의 방법에서 명확하게 두드러진다. 그렇지만,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의 경우에 그림은 변하는데, 여기서 마르크스의 첫 번째이자 아직은 완벽히 일치하는 것으로 상정되는 가치와 가격의 개념들에 관한 논평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상품의 가치와 가격의 이런 균등화는 마르크스의 최초의 개념에 위치하는데, 이 균등화는 오직 경쟁에 의해 산출된 교환가치에 현실을 부여하고 자연가격을 순전한 환상으로서 추상의 영역에 위임한다. 이런 연구들이 진척되자 그의 비판적 논평들이 더 이상 간헐적이지 않고 그의 요약들에 끼워 넣어지게 되었으며, 이 저자에서 저 저자로 옮겨감에 따라 그의 지식과 함께 확대되었다. 개별적 문장들이, 다음에는 더 긴 비평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 제임스 밀의 『정치경제학 요강』과 관련하여 ― 인간에 대한 사물의 완전한 지배를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화폐의 매개에 대한 확대된 비판적 논평이 있었다; 여기서 발췌와 마르크스 자신의 텍스트간의 관계가 완전히 전도되어 전자가 후자를 통하여 간격이 멀어졌다.
한 번 더 발췌노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노트들이 그가 작성할 때나 이후에나 그에게 얼마나 유용했던가가 지적되어야 한다. 1844년에 그것들 중 일부가 파리의 독일 이민자들을 위한 격주간지 ≪다음 페이지!≫에 그 독자들의 지적 교육에 기여하기 위해 실렸다(Grandjonc, 1974: 61~62). 무엇보다 마르크스가 그의 발췌노트를 먼 훗날에도 다시 읽는 습관을 가졌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는 이 철저한 자료들을 〚그룬트리세〛뿐 아니라 『잉여가치 학설사』로 더 잘 알려진 1861~1863년 경제학 수고와 『자본론』 1권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결론을 내리자: 마르크스는 그의 사상을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와 독서로부터의 발췌노트 양자에서 공히 발전시켰다. 그 수고는 인용들, 거의 직접적인 수집들로 채워져 있는 반면에 발췌노트는 주로 그 당시 독서하였던 텍스트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의 논평들도 부수되어 있다. 양자의 내용들, 장들을 열로 나눈 형식, 페이지 매김, 그리고 그들의 작성 시기는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가 홀로 설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마르크스의 비판적 생산의 부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증한다. 그 비판적 생산은 그가 연구한 텍스트들로부터의 발췌, 그 재료에 대한 비판적 숙고들, 그리고 그가 종이에 작성한, 단독으로도 괜찮거나 더 많은 사고들이 보태져야 하는 원고들로 구성되어 있다. 수고를 나머지와 분리하고, 그것들을 맥락과 분리시켜 일반화하는 것은 그래서 해석의 오류를 초해할지도 모른다. 오직 전체로 간주된 이 발췌노트들만이, 마르크스의 두뇌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원숙하였는지에 관한 역사적 재구성과 함께, 파리에서의 연구의 매우 강도 높은 해 동안 그의 사상의 여정과 복합성을 진실로 보여준다(Rojahn, 2002: 45).
4. 철학 비판과 정치학 비판
마르크스의 사상이 발전한 환경과 그 사상이 하나의 이론적이거나 실천적 수준에서 행사한 영향은 가장 간단한 주목을 마땅히 받을 만하다. 그것들은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변형의 시기였고,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의 숫자의 거대한 증가의 시기였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발견과 함께 마르크스는 헤겔주의 시민사회 개념과 결별하고 계급 용어로 갈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빈곤이 노동 조건에서 도출되기 때문에 ‘빈민’과 다른 새로운 계급이라는 인식을 획득했다. 과제는 부르주아 사회의 주요 모순들 중 하나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는 그가 더 많은 부를 생산할수록 더 빈곤해지고, 그의 생산은 위력과 크기에서 더 증대한다”(Marx, 1975d: 271~272).
1844년 6월의 실레지안 직공의 폭동은 마르크스에게 그의 사상을 발전시킬 마지막 기회를 허용하였다. ≪다음 페이지!≫에 실린 「‘프러시아 왕과 사회개혁. 한 프러시아인 것에 의한’이라는 논문에 대한 비판적 주변적 논평」에서, 마르크스는 루게에 관한 비평문과 자신이 그 폭동이 정치적 정신이 부족한 것으로 보았던 이전의 논문에 관한 비평문을 사용하여, 헤겔의 국가를 일반이익의 유일한 대표자로 만들고 시민사회의 어떠한 운동도 부분적 이익의 사적 영역으로 격하시키는 개념화로부터 멀리 떠났다(Löwy, 2003: 29~30). 반대로, 마르크스는 “하나의 사회 혁명은 전체의 관점을 가진다는 것을 발견하였고”(Marx, 1975c: 205), 실레지아 사건들의 자극 아래 그것들의 상당하고 명시적인 혁명적 성격과 함께 그는 사회적 병폐의 뿌리를 “국가의 본질적 성격에서 찾지 않고 특정한 국가의 형태에서 찾는”(Marx, 1975c: 197) 사람들의 엄청난 잘못을 강조하였다.
더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사회 개혁(그 당시 사회주의 학설의 목표), 임금 평등, 자본주의 체계 내에서의 노동의 재조직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이 싸우는(프루동) 가정들의 포로이고 또는 무엇보다 사적 소유와 소외된 노동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비록 사적 소유가 소외된 노동의 이유, 원인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오히려 소외된 노동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적 소유는 소외된 노동의 산물, 결과, 필연적 귀결이다”(Marx, 1975d: 279). 그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의 이론들과 반대로 마르크스는 경제 체계의 근본적 변형 ― “바로 자본 ‘그 자체’가 폐지되어야 하는 것”인 기획 ― 을 제안했다(Marx, 1975d: 294).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학설이 그의 자신의 사상에 더 밀접해지는 것으로 느낄수록, 그는 명쾌함에 대한 필요를 더 강렬히 느꼈고, 그 학설들에 대해 더 날카로이 비판하게 되었다. 자신의 개념화는 끊임없이 마르크스를 주변의 사상들과 자신이 진행 중인 연구 결과들 간의 지속적 비교로 이끌게 하였다. 그가 완성시키는 속도는 이 비교를 필수작업으로 만들었다. 똑 같은 운명이 헤겔 좌파에게 닥치려고 하고 있었다. 참으로 그 주요 옹호자들에 대한 마르크스의 판단들은 가장 엄격하였다. 왜냐하면 그 판단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기비판을 표현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브루노 바우어가 편집하는 월간지 ≪일반 문학 신문≫은 지면에서 단호히 선언하였다: “비판은 그 자신이 사회의 고통과 쾌락에 연루되는 것을 삼가게 한다. … 그는 혼자 장엄하게 상세히 비평한다”(Bauer, 1844: 32). 대조적으로 마르크스에게 “비판은 열정 없이 두뇌로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 그것은 수술용 칼이 아니라, 무기이다. 비판의 대상은 적이며, 그 원하는 것은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절멸시키는 것이다. … 비판은 더 이상 목적 그 자체로가 아니라 단지 수단으로서 드러난다”(Marx, 1975a: 177). 소외를 인식하는 것이 이미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라는 하나의 추상적 신념으로부터 시작하는 “비판적 비판(critical criticism)” 이라는 유아론(solipsism)에 반대하여, 마르크스는 “물질적 힘은 반드시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는 것, 사회적 존재는 오직 인간의 실천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인간의 소외된 조건을 발견하고 의식하게 되는 것은 동시에 그것의 실질적 제거를 위해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무익한 전투만 낳을 뿐인 사변적 고립에 갇힌 철학과 “백병전에서의 비판”(Marx, 1975a: 182, 178)인 철학의 비판 사이에는 거대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자유로운 노동에 대한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자기의식에 대한 요구를 분리시키는 심연이다.
5. 결론
마르크스의 사상은 파리 체류 동안 결정적 진화를 겪었다. 그는 이제 세계를 변형하는 것은 “철학이 이 문제를 단지 이론적인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풀 수 없는”(Marx, 1975d: 302) 하나의 실천적 문제라는 것을 확신했다. 마르크스는 이런 인식에 도달하지 않은 철학과는 영원한 작별을 고했고 실천의 철학으로 필연적 전환을 하였다. 이제부터 그 자신의 분석은 출발점을 소외된 노동이라는 범주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비참한 실존이라는 현실로부터 취했다. 마르크스의 결론들은 사변적이지 않고 혁명적 행동을 지시했다(Mandel, 1971: 210).
마르크스의 정치 개념 자체가 심오하게 변했다. 당시의 좁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학설의 어느 것도 채택하지 않고, 그들과 참으로 멀리 떠난 반면, 마르크스는 경제적 관계가 사회의 연결망을 형성한다는 것과 “종교, 가족, 국가, 법, 도덕, 과학, 예술, 등이 오직 특정한 생산 양식이고, 그것의 일반법칙 아래 떨어진다는 것”(Marx, 1975d: 302)에 대해 완전한 이해에 도달했다. 국가는 헤겔의 정치 철학에서 가졌던 으뜸의 지위를 잃었다; 사회에 흡수되어, 국가는 결정하기보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한 영역으로 생각되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오직 정치적 미신만이 오늘날 여전히 시민 생활이 국가에 의해 지탱되어야한다고 상상하는 반면, 현실에서는 반대로 국가가 시민 생활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Marx and Engels, 1975: 121).
마르크스의 개념적 틀도 혁명의 주체와 관련하여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그는 시초의 “고통 받는 인간성”(Marx, 1982: 479)에 대한 언급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특수한 동일시로 이동하였는데, 처음에는 그것을 변증법적 반테제 ― 이론의 “수동적 요소”(Marx, 1975a: 183) ― 에 근거한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서 생각하였으나, 나중에 자신의 최초의 사회경제적 분석 후에는 자체의 해방의 능동적 요소로서, 자본주의 사회 질서에서 혁명적 잠재력을 수여받은 유일한 계급으로서 생각하였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흐의 공통의 인간 본질의 실현에 대한 장애물로 생각된, 국가의 정치적 매개와 화폐의 경제적 매개에 대한 다소 모호한 비판은, 그 속에서 물질적 생산이 현재에 대한 어떠한 분석과 변형을 위한 근거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역사적 관계에 대한 비판에 굴복하였다: “인간의 예속 전체는 노동자의 생산에 대한 관계에 연루되고, 모든 예속관계는 이 관계의 오직 변형과 결과일 뿐이다”(Marx, 1975d: 280). 마르크스가 제안하는 것은 더 이상 해방에 관한 일반적 요구가 아니라 실제 생산과정의 근본적 변형이다.
이런 결론들에 도달하자, 마르크스는 다양한 다른 연구를 계획했다. 『신성가족』 이후에 그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연구와 발췌를 계속했고, 슈티르너에 대한 비판을 개괄했고, 국가에 대한 연구의 줄거리를 그렸고, 헤겔에 관한 일련의 노트를 작성했고, 조만간 완성하게 될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에 대한 비판의 초고를 준비했다.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엥겔스가 “하늘에 맹세코 지금이 적기이다!”라며 마르크스에게 그의 재료를 출판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Marx and Engels, 1982; E–Marx, beginning of October 1844, 6). 그리고 마르크스가 파리에서 추방당하기 전에, 레스케라는 출판업자와 “정치와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책을 출판하기로 계약했다. 그렇지만, 1859년에 그의 연구의 첫 부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가 빛을 보기까지 15년을 기다려야 했다.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와 발췌와 비평노트는 이 기획의 첫 번째 단계들에서 마르크스가 취했던 방향성을 시사한다. 그의 기록들은 선행자들과 동시대인들에게서 도출한 이론적 요소들로 충만해 있다. 이 시기의 개요들과 연구들의 어느 것도 단일한 분야로 분류할 수 없다: 순수하게 철학적이거나 본질적으로 경제학적이거나 유일하게 정치학적인 텍스트들은 없다. 이들에게서 부상하는 것은 새로운 체계, 동질적 전체가 아닌, 하나의 비판적 이론이다.
1844년의 마르크스는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들의 경험과 프랑스 혁명 연구를, 아담 스미스에 대한 독서를 프루동의 통찰과, 실레지아 직공들의 반란을 헤겔의 국가개념에 대한 비판과, 뷰렛의 빈곤에 대한 분석을 공산주의와 결합하는 역량을 가졌다. 그는 이 다른 지식과 경험의 분야들을 모우고, 함께 엮어서, 혁명의 이론을 탄생시키는 방법을 아는 하나의 마르크스이다. 파리 체류 동안 발전하기 시작하였던 그의 사상과 특히 경제적 비평들은 갑작스런 폭발의 과실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의 결과였다. 매우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 성인전은 불가능한 직접성과 도구적 최종 모표를 마르크스의 사상에다 부여하여, 지식에 대한 그의 경로를 왜곡되고 빈약하게 설명하였다. 목표는 대신 발생, 지적 부채와 마르크스의 노동의 이론적 성취를 재구성하는 것과 여전히 어떠한 현재의 비판적 이론과 대화하는 한 연구의 복합성과 풍부함을 조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번역: 하태규
APPENDIX
파리 체류 동안 마르크스의 발췌노트와 수고를 담고 있는 연표
이 연표는 1843년에서 1845년까지 파리 체류동안 마르크스가 작성한 모든 노트를 포함한다. 발췌노트의 정확한 작성 날짜는 종종 불명확하고, 많은 경우 추정되는 시간의 범위를 지시할 필요가 있는데, 시간 범위의 시작점이 연대 순서에 포함된다. 더구나 마르크스는 발췌노트를 순서대로 작성한 것이 아니라 때때로 서로 간에 교차하여 작성하였다(e.g., B 19 and B 24). 이 때문에 발췌노트의 다른 부분에 근거하여 재료를 배열하는 것이 선호되었다. 소위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A 7, A 8 and A 9)를 포함한 발췌노트는 직접적으로 마르크스가 저자임을 지시하고, 〚〛속에 포함된 부문 제목이 그에게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 나중의 편집자가 붙인 것임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열(발췌노트의 특징)이 마르크스에 의해 인용된 저자의 저작의 제목을 특정하지 않을 때, 항상 두 번째 열(발췌노트의 내용)에서 이미 언급된 것에 상응한다. “RGASPI f1, op. 1, d.124”라는 제목으로 모스크바에 있는 Rossiiskii gosudarstvennyi arkhiv sotsial’nopoliticheskoiistorii(RGASPI)에 보관되어 있는 MH의 예외를 제외하면, 이 시기의 모든 발췌노트는 세 번째 열(문서보관코드)에서 지시하는 제목 아래 암스테르담에 있는 사회역사국제연구소[Internationaal Instituut voor Sociale Geschiedenis(IISG)]에 보관되어 있다.
작성시기 | 발췌노트의 내용 | 문서보관코드 | 발췌노트의 특징 |
1843 후반부터 | R. Levasseur, Mémoires | MH | 발췌가 2열로 작성됨 |
1844 초반까지 | |||
1843 후반부터 | 세이, 정치경제학 | B19 | 대형 노트. 2열 발췌 |
1844 초반까지 | 개요 | 왼쪽: 개요, 오른쪽: 스카벡과 세이의 정치경제학 실천의 완전한 과정 | |
1843 후반부터 1844 초반까지 |
슈츠, 정치경제학 원리 | B24 | 대형 노트. 2열 |
1843 후반부터 1844 초반까지 |
리스트,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 | B24 | |
1843 후반부터 1844 초반까지 |
오시엔데르, 교역, 산업, 농업의 이해에 관한 대중의 실망 | B24 | |
1843 후반부터 1844 초반까지 |
오시엔데르, 인민의 교역에 관하여 | B24 | |
1844 봄 | 스카벡, 사회적 부에 관한 이론 | B19 | |
1844 봄 | 세이, 정치경제학 실천의 완전한 과정 | B19 | |
1844 5~6월 | 스미스, 국부론 | B20 | 소형 노트, 정상적 페이지 매김 |
1844 5월말~6월 | 마르크스, 임금, 자본의 이윤, 지대(소외된 노동과 사적 소유) | A7 | 대형 노트, 3페이지, 2열 재료는 세이, 스미스, 슐츠의 생산의 운동, 페커의 사회적 경제와 정치에 관한 새 이론, 라우동과 뷸렛의 인구와 재산문제에 관한 해법 |
1844 6~7월 | 맥컬록, 정치경제학의 기원, 진보, 특수 목적에 관한 논문 | B21 | 소형노트, 2열 11페이지는 예외인데, 엥겔스의 논문에 관한 안내서가 포함됨 |
1844 6~7월 | 프레보스트, 리카도체계에 관한 번역과 성찰 | B21 | |
1844 6~7월 | 엥겔스, 국민경제학 비판에 관한 개요 | B21 | |
1844 6~7월 | 트레이시, 이데올로기의 기본적 부분 | B21 | |
1844 7월말 | 마르크스, 사적 소유의 비율 | A8 | 대형 용지의 2열 |
1844 7~8월 | 헤겔, 정신현상학 | A9(헤겔) | 용지가 나중에 A9와 합쳐짐 |
1844 8월 | 마르크스, 사적 소유와 노동, 사적 소유와 공산주의, 헤겔변증법과 철학 비판, 사적 소유와 필요, 기타, 노도의 분업, 서문, 화폐 | A9 | 대형 노트, 바우어의 발견된 기독교로부터 인용, 스미스, 트레이시, 스카벡, 밀, 괴테의 파우스트, 셰익스피어의 아테네의 티몬 더하기 바우어의 일반문학신문의 다양한 칼럼으로부터의 인용. 또한 간접적 참조가 있다: 엥겔스, 세이, 리카도, 케네, 프루동, 빌레가델, 오언, 헤스, 로드데일, 맬더스, 세빌레, 스트라우스, 포이에르바흐, 헤겔, 바이틀링 |
1844 9월 | 리카도,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 B23 | 대형 노트, 2 또는 드물지만 3열. 첫 2페이지는 세노폰테로부터의 발췌인데 열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
1844 9월 | 밀, 정치경제학 요강 | B23 | |
1844 여름에서 1845 1월까지 |
뷰렛, 노동계급의 비참에 관하여 | B25 | 소형 노트, 정상적 페이지 번호 매김 |
1844 9월 | 중에서 1845 1월까지 보이스길버트, 프랑스의 세부사항 | B26 | 대형 노트, 보이스길버트로부터 발췌. 정상적 페이지 번호 매김. 2열에서 몇 개의 예외 |
1844 9월 | 중에서 1845 1월까지 보이스길버트, 부, 화폐, 공물의 속성에 관한 논문 | B26 | |
1844 9월 | 중에서 1845 1월까지 보이스길버트, 곡물의 자연, 문화, 교역, 이자에 관한 논의 | B26 | |
1844 9월 | 중에서 1845 1월까지 로, 화폐, 무역에 관한 논의 | B26 | |
1844 9월 | 중에서 1845 1월까지 로더데일, 공공의 부의 성격과 원천에 관한 논의 | B22 | 대형 노트, 2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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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ello
Mu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