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마르크스,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GA), 엥겔스
칼 마르크스만큼 세상을 뒤흔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의 죽음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죽은 뒤로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짧은 기간에 그의 명성이 울려 퍼졌다. 마르크스의 이름은 캘커타에서 최초의 인도 사회주의자들뿐 아니라 디트로이트와 시카고 노동자들의 입에서도 오르내렸다. 그의 이미지는 혁명 뒤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볼셰비키 당대회의 배경을 이루었다. 그의 사상은 유럽에서 상하이까지 모든 노동자 운동의 정치조직과 노동조합 조직 들의 강령과 규약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철학, 역사학, 경제학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들에 대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인류의 상당 부분에게는 [그의 이론들이 – 역자] 지배 이데올로기와 국가 교조로 변질되었으며, 그의 저서들이 광범하게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그의 저서들의 축약되지 않은 과학적인 판본이 여전히 출판되지 않고 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 중에서 이런 운명에 처한 경우는 그가 유일하다.
이런 특별한 상황이 발생한 주요한 이유는 마르크스의 저작(oeuvre)이 지닌 미완성의 성격에 기인한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신문 중의 하나인 <뉴욕 트리뷴>에 그 대부분이 실린 1848년부터 1862년까지 쓴 신문 칼럼들을 제외하면, 그가 단지 부분적으로 완성한 저작들의 양과 그가 수행한 연구의 방대한 범위에 비해 출판된 저작들은 거의 없다. 마르크스의 생애에서 마지막 시기 중의 한 해인 1881년에 칼 카우츠키가 저작의 완결본이 나올 가능성에 대해 물었을 때,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은 먼저 쓰는 것이 필요하다”(Kautsky, 1955: 32).
마르크스는 출판한 것보다 더 많은 초고를 남겼다.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의 저작은 파편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인데, 이런 측면들은 그 작업의 독특한 성격들 중의 하나인 불완전성의 증거다. 시작한 많은 작업들을 끝내지 못하게 만든 과도하게 엄격한 방법과 무자비한 자기비판;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과 자신의 전 생애를 괴롭힌 만성적으로 나쁜 건강 상태; 해가 가도 변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연구로 이끄는 식을 줄 모르는 지식에 대한 열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사의 복합성을 하나의 이론적 기획으로 한정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말년의 인식; 이런 것들이 그의 모든 지적 생산과 그의 삶 자체의 충실한 동료이자 저주이기도 한 것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그의 작업의 거대한 계획은 작은 부분 외에는 완결되지 않았다. 그의 끊임없는 지적 노력은 저술적(literary)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가 그의 노력을 덜 빛나게 하거나 또는 그의 지적 함의가 광범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Rubel, 2000: 439-440). 마르크스가 남긴 유산(Nachlass)의 파편적 상태와 사회적 교조의 창조에 대한 그의 본능적 혐오에도 불구하고 완결되지 않은 작업은 전복되었고, “마르크스주의”라는 새로운 체계가 등장했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불완전성 대 체계화
1883년 마르크스 사후,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의 친구의 유산을 편집하는 매우 어려운 작업 – 자료의 분산, 표현의 불명료함, 그리고 수기의 불가독성 때문에 – 에 헌신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의 작업은 원자료의 재구성과 선별, 편집되지 않았거나 미완성인 원고의 출간, 그리고 동시에 이미 알려진 저작들의 재출판과 번역에 집중되었다. 1888년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의 부록으로 편집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와 1891년에 출간된 「고타강령 비판」과 같은 예외가 있었지만,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죽기 전에 1권만 출간된 『자본론』의 완성을 위한 편집 작업에 거의 전적으로 집중했다. 10년 이상 수행된 이 작업은 “일관되고 가능한 한 완전한 저작”(Engels, 1963: 7)을 만들고자 하는 분명한 의도로 추진되었다. 『자본론』 2권과 3권의 편집과정 중에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원본 수고들의 기원과 전개과정을 재구성하는 것 이상을 했다. 최종판이 아닌 (그리고 사실상 매우 다른 변형판인) 텍스트들의 선별과정에 기반하여 엥겔스는 통일된 전체를 만들고자 했고, 그래서 책의 편집이 완성되어 완결된 상태로 출판업자에게 보냈다.
그렇지만 이전에 엥겔스는 자신의 저작들을 통해 이론적 체계화 과정에 직접 기여했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와 나 자신이 주장한 변증법적 방법론과 공산주의 세계관의 다소간 서로 연결된 설명”(Engels, 1988: 492)이라고 정의한 『반뒤링론』이 1879년에 출간됐는데, 이 책은 하나의 체계로서 “마르크스주의”의 형성과 그 당시에 만연하던 절충주의적 사회주의와의 차별화에서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진화』는 더욱 중요하다; 이 책은 1880년에 처음 출판된 이전 저작에서 세 개의 장을 뽑아 그 대중화를 위해 다시 정교하게 다듬은 것으로, 『공산당 선언』에 버금가는 성공을 거두었다.
백과사전식 종합이라는 극단적으로 단순하고 편리한 방법과의 공개적 논쟁을 통해 얻은 이런 방식의 대중화와 독일 사회민주당의 차세대 인물들이 채택한 방식의 대중화 사이에 명확한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에 대한 엥겔스의 의존은 곧 노동자운동에서 지지를 얻게 될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라는 진화주의적 개념에 길을 열어 주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비판적이고 개방적인 마르크스의 사상은, 때로는 결정론적 유혹의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19세기말 유럽의 문화적 풍토와 충돌했다. 유럽의 문화적 풍토는, 이전에는 없었던 것으로, 체계적 개념의 대중화, 특히 다윈주의에 의해 널리 퍼진 것이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카우츠키의 편집 하에 평론지 <신시대>(Die Neue Zeit)의 지면에서 일찍부터 정설이 된 마르크스주의가 새로 탄생했는데, 이 마르크스주의도 이 모델에 급속히 순응했다.
마르크스의 저작이 하나의 체계로 변형되는 것을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을 준 결정적 요소는 그 확산 과정에 수반되었던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당시 그의 원저작의 축약 인쇄본이 보여주는 것처럼, 종합적인 소책자와 매우 부분적인 요약본이 인기를 누렸다. 더욱이 그의 저작 중 일부는 정치적으로 유용한 효과를 지녔으며, 그의 저작의 첫 판본은 편집자들에 의해 수정되어 출판되었다. 마르크스의 유산의 불확실성에서 초래된 이런 관행은 점점 그의 저작들 중 일부에 대한 검열과 결합되어 갔다. 마르크스 사상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인 소책자라는 형식은 확실히 효과적인 선전 수단임이 드러났지만, 그러나 또한 그의 초기 생각과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프롤레타리아 당의 실용적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실증주의와의 조우에서 그의 복합적이고 미완성된 저작의 유통은 원저작을 그것에 대한 이론적으로 빈약하고 속류화된 설명으로 바꾸었고(Andreucci, 1979: 15), 결국에는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으며, 비판(kritik)에서 이데올로기(weltanschauung)로 변형시켰다.
이런 전개 과정에서 도식적 교조가 형태를 갖추었고, 기본적으로 진화론적 해석이 경제 결정론, 즉 제2인터내셔널 시기(1889-1914)의 마르크스주의에 스며들었다. 역사의 자동적 전진과 사회주의에 의한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대체에 관한 비록 순진하지만 확고한 확신에 이끌려진 경제결정론은 실제 발전을 이해할 수 없고 또 혁명적 실천(praxis)과의 필연적 연계를 깨뜨렸음을 스스로 드러냈을 뿐 아니라 현존 질서를 위한 안정성을 조장하는 일종의 운명론적 정적주의(quietism)를 생산했다(Matthias, 1957: 197). 이런 방식으로 경제결정론은 마르크스와 동떨어져 있음을 스스로 드러냈는데, 이미 마르크스는 그의 첫 저작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역사’는, 말하자면, 인간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그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을 활용한다; 역사는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의 활동에 다름 아니다”(Marx and Engels, 1962: 98).
공황론 또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의 임박한 파국에 관한 테제는 1873년 이후 20년 동안 펼쳐진 대공황의 경제위기에서 가장 적절한 표현을 발견했는데, 이것들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근본적 핵심으로 주장되었다. 자본주의의 동학 원리들을 설명하고자 했고 더 일반적으로 이들 내부에서의 발전 경향을 묘사(Sweezy, 1942: 19, 191)하고자 했던 마르크스의 주장들은 이로부터 사건들의 과정, 심지어는 특별한 세부사항까지 연역할 수 있는 보편적으로 유효한 역사법칙들로 변형되었다.
자동적으로 붕괴할 운명의 모순적이고 고뇌에 찬 자본주의라는 생각은 한 정당의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이라는 최초로 완벽한 “마르크스주의” 강령의 이론적 뼈대로 나타났다. 카우츠키의 논평에 따르면, 이 강령은 “불가피한 경제적 발전이 어떻게 하여 자연 법칙의 필연성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붕괴로 이끄는지”를 밝혀놓았다. 또 “현 사회형태를 대신한 새로운 사회형태의 창조는 단지 희망하는 어떤 것일 뿐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Kautsky, 1964: 131f). 이 구절은 그 구절을 고무했던 마르크스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그리고 그 시대의 개념이 갖고 있는 내재적 한계를 가장 명확하고 중요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심지어 사회주의를 불가피성이 아닌 가능성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그 시절에 지배적이었던 해석에 대한 불일치를 표명했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조차도 그 시절의 다른 독해들과 전혀 다르지 않게 마르크스를 똑같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석했고, 그래서 베른슈타인 논쟁의 폭넓은 반향을 통해 똑같이 거짓되고 도구적인 마르크스의 이미지를 유포시키는 데 기여했다. 20세기의 진행과정에서 마르크스 사상의 대중화에 근본적인 역할을 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체계화와 속류화의 궤적을 더 엄격하게 밟았다. 사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개척자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마르크스주의란 세계에 대한 가장 완벽한 개념이다”(Plekhanov, 1973: 3-4)라고 주장했듯이, 사회의 상부구조의 변형이 경제적 변화과 동시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에 기초한 매우 단순한 일원론에 물들었다. 1909년에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레닌은 유물론을 “객관적인 자연법칙의 인식이자 개인의 머리 속에 이런 법칙을 개략적으로 충실히 반영하는 것에 대한 인식”으로 정의했다(Lenin, 1972: 154). 인간의 의지와 의식은 “불가피하고 또 필연적으로”(Lenin, 1972: 187) 자연의 필연성에 맞추어 스스로 조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또 다시 실증주의적 패러다임이 승리했다.
이 시기의 격렬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제2인터내셔널을 특징짓는 이론적 요소들 중 많은 것들이 제3인터내셔널의 문화적 모체에 흔적을 남기며 전해졌다. 이런 연속성은 니콜라이 부하린이 1921년에 출간한 『사적 유물론』에 명백히 나타났는데, 이것에 따르면, “자연과 사회에는 명확한 규칙성, 고정의 자연법칙이 존재한다. 이런 자연법칙의 확인이 과학의 첫 번째 과제다”(Bukharin, 1921: 18). 생산력 발전에 전적으로 집중하는 이런 사회적 결정론(social determinism)의 산물로서 하나의 교조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에 따르면 “사회에서 행위가 발생하도록 하는 원인의 다중성(multiplicity)은 사회 진화라는 단일한 법칙의 존재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Bukharin, 1921: 248).
이 개념에 반대한 사람은 안토니오 그람시였는데, 그에게는 “연구의 문제를 불변적이고 규칙적이며 통일된 노선에 따라 배치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들의 예측이라는 실천적 문제를 강제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필요와 관련된 것으로, 이는 미숙하고 순진한 방법이다”(Gramsci, 1975: 1403). 마르크스의 실천철학을 조잡한 사회학으로 환원하는 것, 즉 “세계에 대한 개념을 역사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기계적 공식으로 환원하는 것”(Gramsci, 1975: 1428)에 대한 그의 분명한 거부는 더욱 중요한데, 그것이 부하린의 저서의 내용을 넘어설 뿐 아니라 나중에 소련에서 전례가 없는 방식으로 만연하게 될 더욱 일반적 지향성을 비판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부패 과정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해석을 통해 가장 결정적으로 표현되었다. 행위에 대한 안내자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이론은 그 사후적 정당화로 바뀌었다. “디아마트”(Diamat, 변증법적 유물론), 즉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의 세계관”(Stalin, 1941: 5)으로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지점까지 이르렀다. 스탈린의 1938년 소책자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이 널리 배포되었는데, 이 책은 이런 교조의 본질적 요소를 다음과 같이 고착시켰다: 집단생활의 현상은 “완전히 인식 가능한” “사회 발전의 필연적 법칙”의 규제를 받고 있으며, “사회의 역사는 사회의 필연적 발전으로 드러나고, 사회 역사에 대한 연구는 과학이 된다.” 이것은 “사회생활 현상이 매우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역사라는 과학이, 예를 들면 생물학처럼, 정확히 과학이 될 수 있어서 사회의 발전 법칙들을 실천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의미하고”(Stalin, 1941: 13-15),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당의 과제는 당의 활동을 이런 법칙들에 기초하게 하는 것이다. “과학적” 또는 “과학”이라는 개념의 오해가 어떻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가 분명해진다. 꼼꼼하고 일관된 이론적 척도에 기초한 마르크스 방법론의 과학성은 모순이 포함되지 않는 자연과학의 방법론으로 대체되었다. 마침내 역사적 법칙이 자연법칙처럼 인간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역사적 법칙의 객관성에 대한 미신이 단언되었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교리문답에 이어서 가장 엄격하고 엄중한 독단주의가 넓은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설은 경직된 일원주의를 강요하여 마르크스의 저작들에게 전도된 효과를 만들어냈다. 의심할 바 없이 소비에트 혁명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그때까지 배제당했던 지역과 사회계급에게 전파되고 유통될 중요한 계기를 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유통되는 자료들에는 마르크스 자신의 저작들이 아니라 당의 소책자, 안내서, 그리고 다양한 주장이 담긴 “마르크스주의” 선집들이 더 많이 포함되었다. 더욱이 일부 저작들에 대해서는 검열이 증가한 반면, 다른 저작들은 분할되고 교묘하게 처리되었다: 예를 들면 노골적 의도 하에 인용문 조합을 끼워 넣는 관행이 그렇다. 이런 것들에 대한 의존은 예정된 목적을 위한 것이었고, 저작들은 강도 프로크루스테스가 그 희생자들에게 적용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취급되었다: 그것들이 너무 길면 절단되었고, 너무 짧으면 늘려졌다. 결론적으로, 사상을 보급하면서도 도식화를 피하는 것, 사상을 대중화하면서도 이론적 빈약화를 피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실현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그렇게 비판적이고 의도적으로 비체계적인 마르크스 사상의 경우에 특히 더 그렇다. 어쨌든 그에게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상이한 전망들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결정되는 함수가 되는 왜곡을 겪으면서 마르크스는 그 전망들에 동화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이름으로 매도되었다. 그의 이론은 비판적이기는커녕 성경 구절처럼 암송되었고, 이런 성경 주해로부터 가장 생각지도 못할 역설이 탄생했다. “미래의 식당에서 […] 영수증을 발행하는 것”(Marx, 1987: 704)에 대한 마르크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에 주의하기는커녕 그는 새로운 사회 체체의 비합법적인 대부로 전락했다. 매우 엄격한 비판자이자 자신의 결론들에 결코 안주하지 않았던 마르크스가 가장 완고한 공론주의(doctrinarianism)의 원천이 되어버렸다. 역사유물론에 대한 확고한 신봉자였던 마르크스에게서 다른 어느 저자보다도 더 역사적 맥락이 제거되었다. “노동자 계급 해방은 노동자 자신들의 과제”(Marx, 2003: 13)라는 것을 확신하기는커녕 그 반대로 마르크스는 정치적 전위와 당의 우월성이 계급의식의 옹호자이자 혁명의 지도부로서 이들의 역할에서 만연하게 된다고 보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혔다. 인간 능력의 성숙을 위한 기본적 조건이 노동일의 단축이라는 생각의 옹호자였던 마르크스가 스타하노프주의라는 생산주의적 신조로 흡수되어 버렸다. 국가 폐지의 필요성을 확신하고 있었던 마르크스가 국가의 강력한 옹호자로 인식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른 어떤 사상가보다 더 인간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에 관심을 가졌으며, “권리는 평등하기보다는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Marx, 1962: 21)며 단순한 법적 평등 뒤에 있는 사회적 불평등을 숨기는 부르주아적 권리에 반대한 마르크스가 사회적 삶의 집단적 차원의 풍요로움을 동질화의 모호함(indistinctness)으로 중화시키는 개념에 동화되어버렸다. 마르크스가 수행한 비판적 작업이 원래 불완전하다는 점이 그의 사상을 제거하여 명백한 부정으로 바꾸어놓을 때까지 무자비하게 변질시킨 그 모방자들의 체계화 과정에 종속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작들의 출판에 이르기까지의 장기간의 방랑
1897년에 안토니오 라브리올라는 그 당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이라고 알려진 것에 관하여 “저자 자신들의 […] 친한 동료나 사도 집단 외에 누가 이들의 저작을 […] 끝까지 읽어본 적이 있던가?” 하고 물었다. 그의 결론은 분명했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의 저작들을 읽는 것은 지금까지는 전수받은 자들의 특권으로 보인다”; “역사유물론”은 “무수히 많은 모호한 말, 오해, 괴상한 수정, 이상한 모습, 근거 없는 날조를 통해”(Labriola, 1973: 667-669) 번성했다. 사실 나중에 역사사료 연구에 의해 증명된 것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실제로 읽었다는 확신은 성인전적 신화의 산물이었다. 이와 반대로 이들의 많은 저작들은 원작의 언어로도 발견하기가 드물거나 어려웠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모든 저작들에 관한 완전하고 중요한 판본”을 만들자는 이탈리아 학자의 제안은 불가피하게 꼭 필요한 일이다. 라브리올라에게 필요했던 것은 선집의 편찬도 아니고 규범적 의무를 지닌 성서를 작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비록 가끔씩일지라도 비판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두 사람의 모든 정치적이고 과학적 활동, 모든 문헌상의 결과물들을 독자들이 마음대로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져 있을 필요가 있는데, […] 왜냐하면 읽고자 하는 사람이 그 누구라 할지라도 두 사람이 직접 그 독자에게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Labriola, 1973: 672). 라브리올라가 이런 바람을 표명한 이래로 한 세기가 더 지났지만 그 계획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
이런 포괄적 문헌학적 평가를 제쳐두더라도, 라브리올라는 그가 살았던 시기와 관련하여 놀랍게도 멀리 내다보는 이론적 성격의 다른 것을 제안했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모든 미완성 저작들과 작품들을 “계속 형성되어 가고 있는 과학과 정치학의 단편들”로 간주했다. 그 저작과 작품들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곳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 또는 “일종의 불가타 성경(Vulgate), 즉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역사 해석에 언제나 적용되는 교훈”을 찾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저작들이 그 발생의 계기와 맥락 하에 놓일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사상과 지식을 진행 중인 저작으로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 또는 “마음 속의 우상을 필요로 하는 모든 종류의 공론가들과 자부심 강한 자들, 영구적으로 유효한 고전적 체계들의 설계자, 안내서와 백과사전의 편찬자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어느 누구에게 제공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마르크스주의에서 헛되이 찾았다”(Labriola, 1973: 673-677). 즉, 역사 문제들에 대해 신뢰할 만한 요약된 해결책을 찾았다.
이런 전집(opera omnia)의 발간을 담당할 당연한 실행자는 유산(Nachlaβ)의 소유자이며, 언어와 이론에서 가장 뛰어난 역량을 갖춘 당원들이 있는 독일 사회민주당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 내의 정치적 갈등은 마르크스의 거대한 양의 미출판 저작들의 출판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체계적 출판을 위한 어떤 제안에도 타협하여 그의 수고들이 분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Rubel, 1956: 27). 믿을 수 없게도 독일사민당은 관리 책임자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들의 문헌 유산을 가장 태만하게 취급했다(Ryazanov, 1925: 385-386). 당의 이론가들 중 아무도 두 창시자의 지적 재산 목록을 만들지 않았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저작들의 일부는 아니지만 의미의 명확화를 위해 매우 유용한 자원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방대하지만 흩어져 있던 서신들을 모으는 데 헌신하지 않았다.
최초의 전집 출판이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GA)은 모스크바에 있는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소장인 다비드 보리소비치 리아자노프의 주도로 겨우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이 작업도 종종 발간에 유리하기보다 장애를 형성했던 국제 노동자 운동의 격랑들 때문에 좌절되었다. 이 계획에 참여했던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소련에서의 스탈린 숙청작업과 독일에서 나치의 부상은 그 발간을 조기에 중단시켰다. 이것은 그의 저작들이 부분적으로 발굴되지 않았던 한 저자로부터 영감을 이끌어냈던 경직된 이데올로기의 모순적 결과물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확신과 교조적 체계(dogmatic corpus)로의 결정화가 마르크스 사상의 형성과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했던 그 저작들을 파악하는 것보다 앞섰다(Rubel, 2000: 81).
사실상 초기 저작들은 MEGA에서 1927년이 되어서야 『헤겔 법철학 비판』과 1932년이 되어서야 『1844년 경제학과 철학 수고』와 『독일 이데올로기』로 출판되었다. 『자본론』 2권과 3권에서 이미 벌어진 일처럼, 그것들은 마치 완전한 작품들인 것처럼 편집되어 출판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선택이었고, 나중에 수많은 해석상의 오해들을 낳은 원천이 되었다. 나중에는 『자본론』을 위한 중요한 예비 작업들 중의 일부로 1933년에 「직접적 생산과정의 결과들」이라는 『자본론』 제6편의 초안, 그리고 1939년과 1941년 사이에 『그룬트리세』로 더 잘 알려진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등이 한정 부수로 인쇄되어 출판되었다. 더욱이 이들 미출판 저작들이 숨겨지지 않고 출간되었을 때, 뒤따르는 것들도 마찬가지지만, 지배적 이데올로기적 규범을 침식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정치적 필요에 맞는 해석을 동반했다. 이런 해석은 가장 좋게 가정하더라도 이미 전제되어 있는 해석에 맞추는 것이고 따라서 마르크스 저작에 대한 중요하고도 포괄적인 재평가를 하지 못하게 한다.
선집의 첫 번째 러시아 판본(소치네니아, Sočinenjia[전집])도 또한 소련에서 1928년에서 1947년 사이에 완결되었다. 전집이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저작 중 일부만 포함했지만, 28권(33책)으로 이루어진 이것은 당시에는 양적 측면에서 두 저자의 가장 완전한 선집이었다. 두 번째 소치네니아는 1955년에서 1968년 사이에 39권(42책)으로 출판되었다.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서 1956년부터 1968년까지 사회주의통일당(SED) 중앙위원회의 주도 하에 43책 41권의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집』(MEW)이 출판되었다. 이 판본도 완성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소련 판본의 모델을 따라 독자를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로 유도하는 머리말과 주석들에 의해 짓눌려졌다.
광범하고도 비판적인 기구를 통해 두 사상가의 모든 저작들을 충실히 재생산하고자 했던 “두 번째” MEGA 계획이 1960년대 동안에 다시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5년부터 시작된 출판이 또 중단되었는데, 이번에는 1989년의 사건 때문이었다. 1990년에 이 계획을 계속하려는 목적으로 암스테르담의 국제사회연구소와 트리에의 칼 마르크스 하우스가 국제 마르크스-엥겔스 재단(IMES)을 만들었다. 재조직의 어려운 국면을 지난 뒤 새로운 편집 원칙이 승인되고 아카데미 출판사(Akademie Verlag)가 디에츠 출판사(Dietz Verlag)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소위 MEGA2의 출판이 1998년에 시작되었다.
MEGA²: 오해받던 저자의 재발견
완전히 잊혀질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지난 몇 년 동안 마르크스는 국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의 가치를 다시 주장했고, 유럽, 미국, 그리고 일본의 도서관 서가에 있는 그의 저서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이런 재발견의 가장 중요한 예는 바로 MEGA2의 지속이다. 여러 나라들에서 참가한 다양한 학문적 역량을 지닌 학자들이 참가하는 이 완전한 계획은 4개 부문으로 이루어졌다; Ⅰ부는 모든 저작들, 논문들, 그리고 『자본론을 포함한 초고들을 포함하고 있다; Ⅱ부는 1857년부터 시작된 『자본론과 그 예비 연구들을 포함하고 있다; Ⅲ부는 편지들을 다루고 있다; 반면 Ⅳ부는 발췌문, 준비 노트, 그리고 장서의 방주를 포함하고 있다. 계획된 114권 중 53권이 출판되었는데(1998년에 재개된 이후 13권), 각 권은 2책, 즉 본문과 색인들과 많은 부기들을 포함한 중요한 연구자료로 이루어져 있다. 마르크스의 수고와 방대한 서신자료의 중요한 부분 그리고 그가 독서하는 동안 습관적으로 작성하였던 산더미같이 거대한 발췌록과 주해들이 출간된 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MEGA2 편집자들이 입수한 문서들은 4개 부문에서 모두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Ⅰ부에서는 저작(Werke), 논문(Artikel) 그리고 초고(Entwürfe) 연구가 재개되어 새로운 2권으로 출판되었다. 첫째 권인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논문, 초고, 1855년 1월부터 12월까지』(MEGA2Ⅰ/14, 2001)는 1855년에 <뉴욕 트리뷴>과 브레슬라우의 <신질서>에 기고하기 위해 두 저자가 쓴 200개의 논문과 초고를 포함하고 있다. 정치 및 유럽 외교와 관련된 잘 알려진 저작들과 국제경제 정세와 크리미아 전쟁의 고찰을 담은 모음집이라는 것 외에도 이 연구는 미국 신문에 익명으로 실렸기 때문에 이전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21개의 논문을 포함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편 둘째 권인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논문, 초고. 1886년 10월부터 1891년 2월까지』(MEGA2Ⅰ/31, 2002)는 엥겔스의 말기 저작 중 일부를 소개한다. 이 책은 계획과 노트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는 첫 판본을 편집한 베른슈타인의 개입이 있기 전 상태의 「역사에서 폭력의 역할」 초고, 노동자 운동의 조직들에게 한 연설들, 이미 출판된 저작과 논문들의 재출판을 위한 서문들이 들어 있다. 후자 중에서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러시아의 두 세기에 걸친 외교정치」인데, 이 글은 두 세기 동안 러시아 대외 정치의 역사를 다룬 것으로 <신시대>에 개제되었지만 1934년에 스탈린에 의해 탄압을 받았던 것이며, 다른 하나는 카우츠키와 공저한 「역사 사례-사회주의」인데, 각 부분의 저자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더욱이 상당한 흥미를 끄는 것은 IMES에 의해 새 시리즈로 출간된 『마르크스-엥겔스 연감』의 제1권인데, 이것은 전부 『독일 이데올로기』로 이루어져 있다(Marx, Engels and Weydemeyer, 2004). MEGA2의 Ⅰ/5로 예상되는 이 책은 「Ⅰ.포이어바흐」와 「Ⅱ.잔크트 브루노」의 수고들에 해당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들을 포함하고 있다. “쥐새끼들이 갉아먹는 비판”(Marx, 1980: 102)에서 살아남은 7권의 수고들은 독립된 판본으로 구성되어 연대순으로 편집되었다. 저작의 완결적이지 않은 점은 이 판본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이론적 정교화를 책임 있게 규명하는 과학적 연구에 새롭고 확실한 근거들이 주어진다. 지금까지 마르크스의 유물론 개념을 철저하게 표현한 것으로 알려진 『독일 이데올로기』는 이제 원본의 미완성 유고의 성격을 회복한다.
『『자본론』과 예비연구들』인 MEGA2의 Ⅱ부 연구는 최근 몇 년 동안 『자본론』 2권과 3권에 집중되어 왔다.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2권.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편집수고 1884/1885』(MEGA2Ⅱ/12, 2005)는 마르크스가 1865년에서 1881년 사이에 쓴 7개의 다양한 크기의 수고들에 근거하여 엥겔스가 편집한 2권의 텍스트를 포함하고 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로부터 2권에 관해 여러 판본을 받았지만, 출판을 위해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관련하여 특별한 지시를 받지는 않았다. 그 대신 엥겔스는,
[…] 구어체들로 가득 차 있는 부주의한 문체로 이루어진 원고들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거칠고 유머러스한 표현들과 영어와 불어의 기술적 용어들이 산재한 구절들 또는 전체 문장이나 심지어 전체 페이지가 영어로 되어 있는 구절들이 들어 있었다. 사상들은 저자의 두뇌에서 전개됨에 따라 간단히 적혀져 있었다. […] 장들의 결론들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는 저자의 욕구 때문에, 종종 나중에 발전시키기 위해 미완성으로 남긴다는 표시가 있는 단지 몇 줄의 흐트러진 문장들만 있곤 했다(Engels, 1884: 7)
그래서 엥겔스는 편집에서 분명한 결정을 해야 했다. 가장 최근의 문헌학적 파악에 따르면, 엥겔스가 원본에 대한 편집적 개입이 약 5,000개에 달한다고 추정되는데, 지금까지 가정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이다. 수정들은 원문에서 추가와 생략, 구조의 변경, 문단의 소제목 삽입, 개념의 대체, 마르크스의 일부 공식화에 대한 재정교화, 다른 언어로 쓴 단어들의 번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업을 마친 뒤에야 인쇄업자들에게 텍스트를 보냈다. 그래서 이 책은 마르크스 수고들의 선별, 구성, 교정의 전 과정을 우리가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고, 엥겔스가 수정한 가장 중요한 곳과,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사실상 그의 연구의 최종착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수고들을 충실히 존경할 수 있게 해 주는 곳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자본론』3권과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3권』(MEGA2Ⅱ/15, 2004)은 심지어 개략적으로 볼 때도 마르크스가 분명한 형식을 갖추지 않아서 더 많은 복잡한 편집 과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책이다. 엥겔스는 자신의 서문에서 이 판본이 어떠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 극단적으로 미완성된 초고였다. 여러 부분들의 처음은 대체로 매우 주의 깊게 시작되고 심지어 문체에서도 세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수고가 더 나아갈수록 더 개략적이고 미완성이며 더 많이 옆길로 새고 있고, 주장의 어느 부분에 배치할지를 나중에 판단하기 위해 남겨두어야 했던 지엽적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Engels, 2004: 6)
그래서 1885년에서 1894년의 긴 시간 동안 많은 정력을 쏟아 부었던 엥겔스의 강도 높은 편집 작업은 “생성중의 상태로 기록된”(Engels, 2004: 7) 사상들과 예비 노트들로 구성된 매우 임시적인 텍스트들을 하나의 통일적인 텍스트로 바꾸어놓았는데, 여기서 결론적이고 체계적인 경제이론의 외관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이 점은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자본론』 3권을 위한 수고와 편집판』(MEGA2Ⅱ/14, 2003)이라는 책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1871년부터 1882년까지 씌어진 『자본론』3권에 관한 마르크스의 마지막 6개의 수고들을 포함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엥겔스가 편집자로서 작업할 동안 추가한 부분뿐 아니라 1875년의 “수학적으로 전개된 잉여가치율과 이윤율 사이의 관계”에 관한 긴 부분이다. 엥겔스가 추가한 부분은 출판본에 이르는 과정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준다. 다루고 있는 이 책의 장점을 더욱 확증하는 것은 이 책의 51개 텍스트들 중에서 45개가 여기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막 이룬 (MEGA2의) Ⅱ부의 완성은 마르크스가 남긴 텍스트들의 상태와 엥겔스의 편집 작업의 가치와 한계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서신들로 이루어진 MEGA2의 Ⅲ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접촉한 수많은 사람들과 교환한 편지들뿐 아니라 그들이 일생 동안 서로 교환한 편지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서신교환에서 편지들의 총 숫자는 어마어마하게 많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4,000통(그 중 2,500통이 그들 사이에서 교환된 것이다) 이상이 발견되었고, 게다가 MEGA2 이전에는 대부분 출판된 적이 없는 제3자가 그들에게 보낸 10,000통이 발견되었다. 더욱이 비록 보존되어 있지는 않지만, 또 다른 6,000통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마르크스가 접촉한 사람들과 교환한 편지들을 통해 마르크스의 지적 일대기의 중요한 국면들을 재독해할 수 있게 해주는 4권의 책이 새로 편집되었다.
『칼 마르크스-엥겔스, 1858년 1월부터 1859년 8월까지의 서신교환』(MEGA2Ⅲ/9, 2003)에 모아진 편지들의 배경은 1857년의 경제 불황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에게는 1848년의 패배와 함께 시작된 10년간의 후퇴 이후에 혁명 운동의 고조에 대한 희망을 다시 생겨나게 하는 것이었다: “위기가 노련한 두더지같이 굴을 파고 있다.” 이런 기대가 그에게 지적 생산을 위한 새로운 원기를 주었고, 기대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실현되지는 않았던 “대홍수 이전에” 경제 이론의 기본 개요를 서술하도록 자극했다. 바로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그룬트리세』의 마지막 노트를 작성했고, 그의 작업을 소책자로 출판할 결심을 했다. 1859년 6월에 출판된 이 작업의 첫 번째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마르크스의 개인적 측면에서 이 시기는 “뿌리 깊은 궁핍”으로 나타난다: “나는 어떤 사람도 이렇게 화폐가 부족한 상태에서 ‘화폐’에 관한 글을 쓴 적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처지가 변덕스러운 점 때문에 “경제학”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목표를 추구해야 하고, 부르주아 사회가 나를 돈 버는 기계로 전락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소책자는 탄생하지 못했고, 경제학에 관한 다음 번 책의 출판은 출판업자에게 『자본론』 1권을 보낸 1867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1859년 9월부터 1860년 5월까지 서신교환』(MEGA2Ⅲ/10, 2000)과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1860년 6월부터 1861년 12월까지 서신교환』(MEGA2Ⅲ/11, 2005)은 『보그트 씨』의 출판이라는 고통스러운 일과 칼 보그트(K. Vogt)와 마르크스 사이에 있었던 열띤 논쟁과 관련된 서신교환들을 포함하고 있다. 1859년에 보그트는 마르크스를 1848년 봉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협박하여 살아가는 집단의 우두머리로 묘사했을 뿐 아니라 음모를 꾸민 혐의로 제소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방어할 의무를 느꼈다. 이것은 보그트에 관한 가능한 모든 서류들을 입수할 목적으로 1848년과 그 이후에 정치적 관계를 맺었던 투사들과의 정력적인 서신교환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물이 200페이지에 달하는 논쟁적 소책자 『보그트 씨』다.
제소를 반박하는 데 한 해를 몽땅 잡아먹었고, 그의 경제학 연구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더욱이 그는 이 책이 선풍적일 것으로 기대했지만 독일 언론은 그의 책을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개인적인 문제도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낙담스런 재정 문제 – 1861년 말에 마르크스는 “내년이 올해와 똑같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을 택할 것이다” 고 말했다 – 외에도 건강이 좋지 않은 문제가 변함없이 존재했는데, 이는 재정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는 몇 주 동안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내가 꼭 필요한 정신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는 수학이다.” 수학은 마르크스의 삶에서 가장 거대한 지적 열정의 대상들 중 하나였다. 1861년 정초에 그가 다시 한 번 간염으로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욥만큼 독실하지 않는데도 그처럼 고생하고 있다.” 그는 책을 읽는 데 필사적이어서, 한번은 문화에서 위안을 구하기도 했다. “모든 점에서 불확실한 현 상황 때문에 매우 우울해진 기분을 달래기 위해 나는 투키디데스를 읽는다. 적어도 이런 고전들은 나를 새롭게 한다.” 어쨌거나, 1861년 8월 그는 작업을 부지런히 재개했다. 1863년 6월까지 그는 『잉여가치학설사』를 포함하여 4절지 노트 23권, 1,472페이지를 작성했다. 그 중에서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환을 다루는 첫 5권의 노트가 100년 이상 무시되었다가, 1973년에서야 러시아어로 그리고 1976년에 원래 언어로 출판되었다.
『칼 마르크스-엥겔스, 1864년 10월부터 1865년 12월까지 서신교환』(MEGA2Ⅲ/13, 2002)의 주요한 주제는 1864년 9월 28일 런던에서 창립된 국제노동자협회에서의 마르크스의 정치 활동이다. 이 편지들은 그 조직의 초창기에 마르크스의 활동 기록을 담고 있는데, 그 활동 기간에 그는 지도적 역할을 재빨리 획득했고 16년 이후에 다시 한 번 최우선 관심사가 된 이런 공적 의무들을 과학적 작업과 결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논쟁이 된 쟁점들 중에는 노동조합 조직의 기능이 있었는데, 그는 그 조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프러시아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아 협동조합을 만들자는 라쌀레의 제안에 반대했다: “노동자 계급은 혁명적이며,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 오웬주의자 존 웨스톤(J. Weston)과의 논쟁은 그가 죽은 뒤인 1898년에 글들을 모아 『가치, 가격 그리고 이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미국 내전에 대한 고찰들; 그리고 『프러시아의 군사 문제와 독일 노동자당』이라는 엥겔스의 소책자.
역사적으로 중요한 판본의 진귀함은 Ⅳ부의 ‘발췌문, 준비 노트, 장서의 방주들’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엄청난 작업에 대한 중요한 시금석이 되는 수많은 요약들과 연구 주석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읽은 책들에서 발췌문을 기록한 노트를 모아두었다가 종종 노트들이 그를 자극하여 아이디어를 얻으면 노트들을 없애버리는 습관을 평생 지니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유산(Nachlaβ)에는 대략 200권의 요약 노트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들은 마르크스 이론의 발생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그 중 일부는 그가 바라는 바대로 발전시킬 기회를 갖지 못했다. 1838년부터 1882년까지 오랜 기간에 작성되어 보존된 발췌문들은 8개 국어로 씌어졌고 – 독어,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그리고 러시아어 – 광범한 학문 분야를 다루고 있다. 그것들은 철학, 예술, 종교, 정치, 법, 문학, 역사, 정치경제, 국제관계, 기술, 수학, 생리학, 지질학, 광물학, 농경학, 인종학, 화학, 그리고 물리학 자료들뿐 아니라 신문, 잡지 기사, 의회 보고서, 통계자료, 그리고 정부기관의 출간물들에서 뽑은 발췌물들이다. 정부기관의 출간물들 중에서 유명한 “청서”(Blue Books), 특히 『공장 감독관의 보고서들』은 그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조사결과들을 포함하고 있다. 많은 부분이 아직 출판되지 않은 이 거대한 지식의 보고는 마르크스의 비판이론이 만들어진 곳이다. 32권으로 계획되어 있는 MEGA2의 Ⅳ부는 최초로 이것들에 대한 접근을 제공할 것이다.
네 권이 최근에 발간되었다. 『칼 마르크스, 1844년 여름부터 1847년 초까지 발췌문과 준비 노트』(MEGA2Ⅳ/3, 1998)는 마르크스가 1844년 여름부터 1845년 12월까지 작성하여 모은 8권의 발췌 노트를 포함하고 있다. 첫 2권은 파리에서의 체류기간 동안의 것인데, 1844년의 『경제학과 철학 수고』바로 뒤에 작성된 것들이다. 나머지 6권은 파리에서 추방된 뒤에 갔던 브뤼셀에서의 시기와 7월과 8월에 머물렀던 영국에서의 기간 동안 작성된 것이다. 이 노트에는 정치경제학과의 조우를 보여주는 자취와 경제이론의 첫 번째 정교화 과정이 들어 있다. 이것은, 보아규베르(Boisguillebert), 로더데일(Lauderdale), 시스몽디(Sismondi)로부터 발췌된 것처럼, 슈토르히(Storch)와 로시(Rossi)의 정치경제학 소책자에서 뽑은 발췌들과 기계와 제조업의 기술과 관련해서는 배기지(Baggage)와 유어(Ure)로부터 발췌한 것이다. 출판되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 시기의 저술들이 담긴 노트들을 비교해 보면 이런 독서들이 그의 사상의 발전에 미친 논박할 수 없는 영향력이 명백히 드러난다. 성숙화의 역사적 재구성을 하고 있는 이들 노트의 총체성은 강도 높은 작업을 하던 시기에 형성된 그의 비판적 사상의 진전과 복합성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 텍스트는 또한 유명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포함하고 있다.
『칼 마르크스, 1853년 9월부터 1855년 1월까지 발췌문과 준비노트』(MEGA2Ⅳ/12, 2007)는 주로 1854년에 작성된 9권의 방대한 발췌 노트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들은 <뉴욕 트리뷴>에 중요한 일련의 기사들을 발표했을 때와 같은 시기에 쓴 것들이다: 1853년 10월에서 12월 사이의 “팔머스톤 경”(Lord Palmerston)에 관한 것들, 1854년 7월에서 12월 사이의 “혁명적 스페인”에 관한 생각들이 그것이다. 반면 크리미아 전쟁에 관한 글들 – 거의 전부가 엥겔스에 의해 씌어진- 은 1856년에 나왔다. 그 가운데 4권은 외교사에 관한 주석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주석들은 주로 역사가 파민(Famin)과 프란시스(Francis), 법률가이자 독일 외교관인 폰 마르텐즈(von Martens), 토리당 정치가 어쿠하트(Urquhart)뿐 아니라 “레반트 정세에 관련된 서신교환”과 “의회 논쟁에 관한 의사록”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스페인 작가 데 호베야노스(de Jovellanos), 스페인 장군 상 미구엘(San Miguel), 그의 동료 데 마를리아니(de Marliani), 그리고 다른 많은 작가들의 것에서 발췌된 또 다른 5권은 주로 스페인에만 집중한 것으로, 마르크스가 스페인 사회와 정치사 및 문화를 심도 깊게 검토했음을 보여 준다. 게다가 오거스틴 티에리(A. Thierry)의 「평민의 형성과 진보의 역사에 관한 논문」에서 발췌한 노트는 특히 흥미롭다. 이 노트들은 모두 매우 중요한데, 그것들은 마르크스가 이용한 원자료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가 기사 작성을 위해 이런 독서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마지막으로 엥겔스가 작성한 군대의 역사에 관한 일련의 발췌를 포함하고 있다.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자연과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커다란 관심이 『칼 마르크스, 자연과학에 관한 발췌문과 준비노트. 1877년 중반부터 1883년 초까지』(MEGA2Ⅳ/31, 1999)에서 드러난다. 이 책은 1877-1883년에 유기화학과 비유기화학에 관한 노트를 보여주는데, 그것을 통해 우리는 마르크스가 한 작업의 깊숙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연구들은 수많은 그의 전기들에서 언급되는 거짓 전설, 즉 마르크스를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자신의 연구를 포기하고 지적 호기심을 완전히 충족시켰던 작가로 묘사하는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출판된 노트들은 화학공식들, 화학자 마이어(Meyer), 로스코(Roscoe), 쇼를레머(Schorlemmer)의 책에서 발췌한 글들, 그리고 물리학, 생리학, 지질학에 관한 노트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학문 분야들은 19세기 마지막 4반세기 동안에 중요한 과학적 발전들이 번성했던 영역이었데, 마르크스는 이에 관해 항상 알고 싶어했다. 이 연구들은 마르크스가 가장 적게 탐구한 분야들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것들은 『자본론』의 집필 작업과 직접 관련되지 않았기에 마르크스가 관심을 기울인 이유들에 관하여 답하지 않은 물음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같은 시기에 엥겔스가 쓴 유사한 주제에 관한 발췌문들이 있다.
마르크스의 수고들이 출판되기 전에 여러 번의 기복을 겪었다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소유한 책들은 더 불행한 운명을 겪었다. 엥겔스의 사후에 흥미로운 장서의 방주들과 밑줄들이 그어져 있는 책들을 포함하고 있는 두 명의 장서들은 무시되었고, 부분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재구성되어 어렵게 목록이 작성되었다.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장서들』(MEGA2Ⅳ/32, 1999)은 사실상 75년간의 연구 성과물이다. 2,100권으로 이루어진 1,450책 –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소유했던 것의 3분의 2에 해당 – 에 관한 색인은 주석들이 있는 각 책들의 모든 페이지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MEGA2가 오늘날 입수할 수 없는 책들에 관한 색인(회생시킨 책의 총 권수는 3,200권의 2,100책이다), 830권의 40,000페이지에 표시된 장서 방주들, 그리고 책들의 여백에 쓴 논평들의 출판과 함께 완료할 때 통합될 예정으로 미리 출판된 것이다.
마르크스와 가까웠던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마르크스는 책들을 사치의 대상이 아니라 작업 도구로 생각했다. 그는 책들을 거칠게 다루었고, 페이지의 끝을 접었으며, 밑줄을 그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책에 대해 “그것들은 나의 노예들이고, 내 의지에 복종해야 한다”(Lafargue, 1965: 152)고 말했다. 한편 그는 “역사의 배설물에 다른 형태로 배설하기 위해 책들을 게걸스럽게 먹도록 저주받은 기계” 라고 자신을 규정할 정도로 책들에 극단적으로 매진했다. 독서에 관련된 논평뿐 아니라 그의 독서의 일부를 알 수 있다는 것 – 그리고 그의 장서는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에서 수십 년 동안 수행한 지칠 줄 모르는 작업의 부분적 횡단면만을 보여 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은 그의 연구의 재구성을 위한 소중한 자원이다. 또한 이것은 그의 사상을, 사실상 그렇듯이, 선행자와 동시대인들로부터 추출한 이론적 요소들을 충분히 정교화한 것이 아니라 벼락처럼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의 산물로 보는 거짓 성인전의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해석을 논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새 판본으로부터 어떤 새로운 마르크스가 떠오르는가? 수많은 추종자들과 반대자들이 오랫동안 받아들인 것과는 확실히 다른 마르크스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그의 저작들의 배포 과정과 저작들을 완전히 통합한 판본이 없었다는 점은, 그 근본적 불완전성, 모방자들의 극악무도한 짓들, 경향성이 있는 독서, 마르크스를 읽는 데서 수많은 실패들과 함께, 거대한 역설의 근본 원인들이었다: 칼 마르크스는 오해를 받은 저자이며, 심각하고 종종 반복되는 몰이해의 희생양이다. 오늘날 우리는 마르크스를 교조적 확신으로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동유럽의 비자유주의 정권의 많은 광장에서 볼 수 있는 딱딱한 모습의 동상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자신의 테제들의 유효함을 증명하는 연구에 헌신하기 위해 저작의 많은 부분을 미완성으로 남긴 저자로 인식할 수 있다. 그의 저작들에 대한 재발견에서 미래의 마르크스 연구(Marx Forschung)를 위한 풍부한 지평을 형성하는 문제의식적이고 다형적인(polymorphic) 사고의 풍부함이 다시 등장한다.
“죽은 개” 마르크스
이론적 갈등이나 정치적 사건들 때문에 마르크스의 저작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지속적이지도 않았고 또 그 출발부터 논란의 여지가 없는 쇠락의 시기를 경험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서부터 제2인터내셔널의 해체까지, 잉여가치이론의 한계에 관한 토론에서부터 소련 공산주의의 비극에까지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비판들은 항상 그 개념적 지평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로 귀환”이 항상 있어왔다. 그의 저작에 대해 언급할 새로운 필요가 생겨나고 있으며, 정치경제학 비판에서부터 소외에 관한 공식화 또는 정치적 논쟁의 화려한 지면들에까지 추종자들과 반대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계속 행사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기말에는 사라졌다고 이구동성으로 선언했던 마르크스의 모든 것이 갑작스레 역사의 무대에 재등장했다.
과거에 위임되었던 지배의 도구(instrumentum regni)라는 끔찍한 기능에서 해방되고 이제는 확실히 분리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슬로부터 벗어난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신선한 지식의 영역에서 재배치되고, 전 세계에서 다시 읽혀지고 있다. 뻔뻔스러운 소유자들과 제한된 사용 방법에서 떨어져 나온 그의 소중한 이론적 유산이 다시 한 번 만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가 20세기의 회색 “현실 사회주의”라는 조각된 스핑크스와 동일시할 수 없다면 그의 이론적·정치적 유산이 과거에만 한정되어 있고 현재의 갈등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다거나 그의 사상을 오늘과는 무관한 미라가 된 고전으로 규정하거나 또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단지 학술적 전공으로 한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똑같이 잘못된 것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의 귀환은, 중요한 문헌학적 연구가 보여주듯이, 제한된 학자 집단이라는 한계를 훨씬 넘어서서 마르크스에 대한 수많은 해석가들과 관련하여 그 다양성을 증명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재발견은 현재를 설명하는 그의 지속적인 능력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현재를 이해하고 그것을 변혁시키는 데서 필수불가결한 도구로 남아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와 그것을 관통하는 심대한 모순들에 직면하면서 1989년 이후 마르크스가 너무도 빨리 밀려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반향이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를 읽지 않고, 재독해하지 않고, 토론하지 않는 것은 항상 잘못이다”(Derrida, 1993: 35)라는 자크 데리다(J. Derrida)의 단언은 몇 년 전만 해도 고립된 도발로 보였지만 이제는 지지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신문, 정기간행물,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들이 계속해서 우리 시대와 가장 관련 있는 사상가로서 마르크스를 논의하고 있다. 1998년에 출판 150주년을 맞이하여 『공산주의자 선언』은 전 세계 곳곳에서 수십 개의 신규 판본이 출판되었고,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정치 저작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경향들에 대한 가장 혜안을 가진 예측으로 칭송을 받았다(Habsbawm, 1998: 3-74). 게다가 지난 15년 전부터 거의 사라졌던 마르크스를 다루는 문헌이 등장해 여러 나라들에서 부활의 신호를 보여주고 있고, 새로운 연구가 번성하는 것과 함께 가령 『왜 오늘날 마르크스를 읽는가?』 같은 제목의 수많은 소책자들이 여러 언어로 출판되고 있다. 이 저자에게 바쳐진 국제학술대회, 대학 학과과정, 세미나 등이 있는 것처럼, 마르크스와 다양한 마르크스주의를 다루는 기고 논문에 개방적인 학술지들이 이와 비슷한 합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비록 소심하고 종종 혼돈스러운 방식이라 할지라도 – 남미에서 유럽까지 그리고 대안세계화운동을 거치면서 –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또한 정치적 측면에서 등장하고 있다.
오늘날 마르크스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가? 그의 사상이 인류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얼마나 유효한가? 그의 저작의 어떤 부분이 우리 시대에 대한 비판을 고무하는 데 가장 기름 진 토양인가? 우리는 어떻게 “마르크스와 함께하면서 그를 넘어설” 수 있을까? 이것들은 결코 만장일치가 아닌 대답들을 듣게 될 몇 가지 질문들이다. 현재의 마르크스 르네상스에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철학자에 대한 해석을 지배했고 또 조건지웠던 천편일률적(monolithic) 정설들이 특징이었던 과거와는 불연속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명백한 한계와 절충주의(syncretism)의 위험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마르크스들이 특징인 시대가 도래했고, 정말이지 교조주의의 시대가 지난 뒤로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교조주의가 나타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응하는 과제는 새 세대의 학자들과 정치 활동가들이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연구에 달려 있다.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남아 있는 마르크스들 중에서 적어도 두 가지는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비판가이다: 그는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발전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분석하였으며, 부르주아 사회를 어느 누구보다 더 잘 묘사하였던 분석적이고 통찰력 있으며 지칠 줄 모르는 연구자였다. 이 사상가는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 체제를 인간 본성에 내재한 영원한 각본으로 여기기를 거부했으며, 신자유주의 경제·사회·정치 조직들에 대한 대안들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제안들을 제공하고 있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또 다른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의 이론가이다: 그는 이미 당시에 라쌀레와 로드베르투스가 주장했던 국가사회주의라는 생각을 논박한 저자였다; 사회주의를 사회 문제들에 대한 부드러운 완화제들이 아니라 생산관계의 가능한 변혁으로 이해했던 사상가였다. 마르크스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실어증에 걸릴 것이며, 인간 해방의 대의는 그를 계속 이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의 “유령”은 전 세계에 배회하며 앞으로 다가올 한참 동안 인류를 뒤흔들 운명이다.
번역 하태규
References
1. 이 글은 International Review of Social History의 52호(2007: 477-498)에 실린 것이다.
2. 마르크스의 전기작가 보리스 니콜라에프스키와 오토 멘첸-헬펜은 그들의 저서 서문에서 “수천 명의 사회주의자들 중에서 아마도 단 한 명만이 마르크스의 경제 저서를 읽었을 것이다; 수천 명의 반(反)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서는 단 한 명도 마르크스를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Nikolaevskij and Maenchen-Helfen, 1976: Ⅶ).
3. 리아자노프는 1931년에 해고되어 추방되었고, 그 발간은 1935년에 중단되었다. 원래 계획된 42권 중 단지 12권(13책)만 출판되었다(Marx and Engels, 1933; Ryazanov(ed), 1932).
4. 예를 들면 이 판본도 1844년의 『경제학과 철학 수고』와 『그룬트리세』를 포함하지 않다가 나중에 추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언어로 된 많은 유사 판본들이 MEW에 근거하였다. 이 판본의 재출판이 2006년에 시작되었다.
5. MEGA2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www.bbaw.de/vs/mega를 통해 이용할 수 있다.
6. “칼 마르크스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1858년 2월 22일”, 상동, p. 75.
7. “칼 마르크스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1857년 12월 8일”, MEGA2Ⅲ/8(베를린, 1990), p.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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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칼 마르크스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1859년 1월 21일”, 상동, p.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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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칼 마르크스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1861년 12월 27일, 상동”, p. 636.
12. “칼 마르크스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1860년 11월 23일, 상동”, p. 229.
13. “칼 마르크스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1861년 1월 18일, 상동”, p. 319.
14. “칼 마르크스가 페르디난트 라살레에게, 1861년 5월 29일, 상동”, p. 481.
15. “칼 마르크스가 요한 침례교파인 쉬바이쩌에게, 1865년 2월 13일”, 상동, p. 236.
16. “칼 마르크스가 라우라와 폴 라파르그에게, 1868년 4월 11일”,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 32권(베를린, 1965), p. 545.
17. 지금까지 설명한 “마르크스주의적” 오해 다음에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반마르크스주의적” 오해도 지적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편견에 사로잡힌 적대감 때문에 역시 심각하다.
18. 이런 방향으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킨 첫 번째 논문은 존 캐시디(J. Cassidy)의 것이다(Cassidy, 1997: 248-259). 그 다음은 천 년 동안 가장 위대한 사상가의 왕관을 마르크스에게 수여한 BBC의 차례였다. 몇 년 뒤 주간지 Nouvel Observateur가 “칼 마르크스 – 세 번째 천 년의 사상가인가?”(Nouvel Observateur, 1 October 2003)라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곧 이어 독일은 40년 동안 추방당했던 그 사람에게 헌사를 바쳤다. 국립 텔레비전 방송 ZDF의 500,000명이 넘는 시청자가 마르크스를 모든 시대를 통틀어 독일인 중 세 번째 중요한 인물로 뽑았다(그는 “현재와의 관련성” 범주에서는 1위였다). 그리고 지난 총선에서 유명한 잡지 Der Spiegel은 ‘유령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마르크스가 손으로 승리 표시를 하는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Der Spiegel, 22 August 2005). 이런 흥미로운 모음의 결정판이 2005년 BBC라디오4에서 실시된 투표였는데, 여기서 영국 청취자들은 마르크스에게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의 영예를 수여했다.
19. 지난 수년간 출판된 수많은 책들을 여기서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장 대중적이고 중요한 찬사를 받은 책은 언급되어야 한다. 베스트셀러가 된 두 신간 전기서 – 프랜시스 윈(F. Wheen)의 『칼 마르크스』(런던, 1999)와 자크 아탈리(J. Attali)의 『칼 마르크스 또는 시대정신』(파리, 2005) – 는 그 사상가의 삶을 트리에에 살 때부터 집중 조명하고 있다. 모이쉬 포이스톤(M. Poistone)의 책 『시간, 노동 그리고 사회적 지배』(캠브리지)는 어울리지 않게도 1993년에 출판되었고, 그래서 그때 이후 몇 차례 재출판되었다; 이 책과 마찬가지로 트렐 카버(T. Carver)의 『포스트모던 마르크스』(맨체스터, 1998)와 마이클 A. 리보위츠(M. A. Lebowitz)의 『자본론을 넘어』(런던, 2003, 두 번째 판) 같은 책들은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혁신적이고 포괄적 해석으로 두드러진다. 그의 초기 저작에 관한 최근의 연구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 데이비드 레오폴드(D. Leopold)의 『젊은 마르크스: 독일 철학, 현대 정치, 그리고 인류의 번영』(캠브리지, 2007)이 그것이다. 게다가 존 벨라미 포스터(J. B. Foster)의 『마르크스의 생태주의』(뉴욕, 2000), 폴 버킷(P. Burkett)의 『마르크스주의와 생태주의 경제학』(보스턴, MA, 2006)은 마르크스를 환경 문제와 연결시킨 것으로 가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의 증거로 남미의 사상가 엔리케 두셀(E. Dussel)의 『알려지지 않은 마르크스를 향하여』라는 주요 저작의 영어 번역물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서구 언어들과 점점 친숙해지고 있고, 교조적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더 멀어지고 있는 중국의 신세대 연구자들의 이론적 발전뿐 아니라 히로시 우치다(H. Uchida)가 편찬한 일본의 몇 가지 연구를 묶은 『21세기를 위한 마르크스』도 있다.
20. 가장 중요한 잡지들 중에는 영어권에서는 Monthly Review, Science & Society, Historical Materialism, Rethinking Marxism 등이 있고, 독일에서는 Das Argument, Marx-Engels-Jahrbuch, 프랑스에서는 Actuel Marx, 이탈리아에서는 Critica Marxista, 아르헨티나에서는 Herramienta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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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타이핑해서 참고문헌 형식으로 맞추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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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4) Cassidy, J. …1997년 10월 20일에 발행된 <뉴요커>, pp. 248-259의 “칼 마르크스의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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