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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gyu Ha, Marxism 21

  1. 들어가

마르크스의 부활 ( , 2022) 무스토 외 은 마르크스학자로 널리 알려진 무스토가 편집한 책으로서 가지 개념 주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밝히는 논문들로 구성 22되어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견해란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마르크스 자신의 견 . ,해를 의미한다 이미 무스토가 마르크스의 지적 전기인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 󰡔들을 다시 생각한다󰡕( , 2013) 무스토 에서 밝혔듯이 그리고 마르크스의 부활 의 마 󰡔 󰡕지막 장에서 월러스틴이 강조하듯이 마르크스의 사상은 여러 종류의 마르크스주의들로 정설화되면서 사실상 왜곡되었다고 볼 수 있기에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마르크스의 견해를 밝히는 작업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각 개념 .주제에 대한 세계적 권위자들이 이 책을 위해 대부분 새로 쓴 것으로 보이는 편 22의 논문들은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최신의 백과사전적 지식을 제공한다고 할 수있다 그렇다고 이 책의 글들이 각 개념 주제에 대한 정설화된 정의와 해설로 구성 .된 고리타분한 종류인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논문들은 각 저자가 해당 주제 , .에 관한 마르크스의 견해라고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치부된 오해를 비판하고 자신 ,의 견해를 제시하는 논쟁적 방식의 글들로서 그 자체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필자와 같이 마르크스의 사상이 현재의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제공하는 제일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을 통해 얻게 된 가지 , 22주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사상을 정리할 기회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마 .르크스주의자가 아닌 마르크스 학도의 관점에서 이 책의 각 논문의 의의를 검토하고 그 성취와 한계를 밝히는 작업은 의미 있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우선 개 개념 . 22주제를 다룬 각 장의 개요와 의의를 간략히 알아보겠다 그다음은 특히 필자가 보 .기에 논쟁적인 일부 주장들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여 이 서평과 마르크스의 부활 󰡔 󰡕을 함께 읽는 독자들에게 참고가 될 수 있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번역서인 이 책의 성격과 관련하여 번역 용어 선택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담을 것이다 번역은 창 .작만큼 노고가 큰 작업이기에 그만큼 힘들지만 그에 걸맞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 책도 이런 관점에서 아직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굉장히 훌륭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 장 약 페이지에 달하는 각각의 주제 . , 22 , 600 ,에 대한 전문적이고 논쟁적인 글들을 이만큼 명료하게 번역한 작품을 찾기가 쉽지않을 것이지만 기대 이하로 시중에서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옥에 티로서 , . ,관성적으로 잘못 선택된 몇 가지 번역 용어들과 어쩔 수 없는 인간적 번역 실수들을 밝힘에 의해 앞으로 이 책의 재판이나 다른 번역들의 개선에 공헌할 수 있기를바라는 마음으로 이 부분을 감히 추가했다.

  1. 마르크스의 개념들에 대한 보배 같은 해설

마르크스의 분석은 자본주의 비판을 늘 내포하고 있지만 정작 마르크스 자신은 ,자본주의란 말 자체를 즐겨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자본주의라는 개념의 역사적 형성 과정과 그 의미를 정리하는 크레트케의 장 자본주의 는 이 책 1 “ ”의 시작이다 이어지는 무스토의 장 공산주의 는 초기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 . 2 “ ”의 선구자들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거쳐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개념을 서술하고 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지배한 세기 이론 지평의 유산으로 아직도 다수의 실 . – 20천가는 물론 마르크스주의를 안다고 생각하는 일부 학자들도 마르크스 자신의 공산주의 개념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지하다고 할 수 있다 무스토는 자유로운 연합 .

( ) 어소시에이션 , , 자유 시간 국가 폐지 등이 중심인 마르크스 공산주의 개념을 정당

하게 강조하고 있다.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민주주의 이론가 우드의 장 민주주의 는 마르크스와 어 3 “ ”울리지 않는다고 일반적으로 보는 민주주의와 마르크스의 밀접한 연관성을 증명하고 있다 판 데르 린덴의 장 프롤레타리아트 는 일반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별 . 4 “ ”칭으로 이해되는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이 막상 계급 구성과 관련하여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논쟁적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캘리니코스의 장 계급투쟁 은 공 . 5 “ ” 󰡔산주의 선언 과 관련하여 종종 오해되듯이 계급투쟁이 역사 변동의 근본 원천이 󰡕아니라 역사 변동을 낳는 근본 원인( )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의 집행자 역할을 한다는 점을 명료하게 밝히고 있다 후디스의 장 정치조직 은 마르크스의 정당 개념 . 6 “ ”과는 다른 일반적으로 더 널리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정당 개념을 라살주의에서부 ,터 시작해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마르크스의 정당 개념을 이해할 때 실천적으로 . ,현재 필요한 정당은 민주적일 뿐만이 아니라 혁명 이후를 구상하는 정당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새겨볼 만하다.

뢰비의 장 혁명 은 마르크스의 혁명적 실천 개념이 환경 변화와 자기 변화의 7 “ ”일치라는 점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이 중심부 자본주의 혁명만이 아니라 아일랜드와 러시아 등 주변부 자본주의 혁명을 포괄하는 이론으로 변화되었다는 점을 올바르게 강조한다 안투네스의 장 노동 은 노동 소외 가치법 . 8 “ ” , ,칙 자유롭게 연합한 생산자 개념들 사이의 연관성을 잘 정리해 주고 있다 포스톤 , .의 장 자본과 시간성 은 자본주의 폐지 혹은 지양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실현 9 “ ”이 아니라 자기 폐지 혹은 지양이라는 당연하지만 종종 간과되어 온 마르크스 개 ,념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시간의 동학에 지배된다는 마르 ,크스의 자본 분석의 독해에서 잘 놓치기 쉬운 지점에 대한 강조로 구성되어 있다.포스터의 장 생태학 은 저자 자신이 으뜸으로 공헌했다고 할 수 있는 마르크 10 “ ” ,스 저술에서 생태학적 요소의 발견과 재구성에 대해 잘 서술하고 있다.

브라운의 장 성평등 은 젠더와 페미니즘에 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추적하 11 “ ”고 있다 어떻게 보면 책의 절반쯤에 도달한 이 장부터 이어지는 장들은 마르크스 . ,가 명료히 서술했다기보다는 특유의 단편적 언급들로만 남겨놓은 개념들에 관한탐구와 미완의 재구성 시도 혹은 연구 과제 제시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장 역시 마르크스의 여성 해방과 성평등에 관한 단편적 언급들이 없지 않다는 점을 잘 밝히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대안 , .은 마르크스의 문헌에서 더 많은 중요한 언급들을 ( ) 생태학과 같이 발굴하거나 아니면 기존 언급들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킬 과제를 제기한다고 하겠다 앤더슨의 장 . 12 “ ” 민족주의와 종족성 은 마르크스의 다양한 저술들과 실천들이 민족주의에 관한정리된 견해를 밝힌 것은 아니지만 민족이 종족 인종 계급과 맺는 관계 혹은 자 , , ,본에 맞선 투쟁에서 맺는 관계에 관한 현대적 이론을 구성하는 데 좋은 근거를 제공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바소의 장 이주 는 마르크스 당시보다 몇 곱절로 늘어난 현대의 국제 이주를 13 “ ”분석하기 위한 틀을 마르크스의 시초 축적 관련 강제적 국제 이주 영국 식민지로 ,서 아일랜드 출신 노동자에 관한 언급 등을 통해 재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메바드라와 사마다르의 장 식민주의 는 식민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의 견해 . 14 “ ”가 년 인도와 중국의 반란을 기점으로 변했다는 점 1857 (단순화하면 해방의 대상에서주체로)을 지적하며 앞 장에서 다룬 혁명이론의 변화와의 논리적 연관성을 드러내준다 물론 식민주의에 관한 마르크스의 언급들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발전시켜야 . ,할 단편적인 논의라는 점도 분명히 하고 있다 제솝의 장 국가 는 마르크스의 . 15 “ ”국가 개념이 하나의 완결된 이론이 아니라 다양한 단편적 이론들로 표현되었다는점과 이론적 분석과 역사적 서술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정성진의 장 세계화 는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권 계획에서 최종 수 16 “ ” 6준에 해당하는 세계시장 개념이 요즘 말하는 세계화임을 밝히며 마르크스에서 세 ,계화에 대한 분석은 시대를 앞서 현대에 적용될 정도로 자본주의 분석 자체로서내장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장 테슈케의 전쟁과 국제관계 는 마르크스에서 특 . 16 “ ”히 부족한 부분으로서 제국주의적 지정학적 경쟁과 갈등이라는 자본주의의 본질 ·적 구성요소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물론 다른 주제와 마찬가지로 이 주제 .에 관한 마르크스의 언급들도 크림전쟁을 계기로 유럽 외교 문제에 관해 년 1855부터 년까지 작성한 권 분량의 발췌 노트가 있을 정도로 풍부하지만 저자는 1864 8 ,이 자료들이 역사와 이론의 관계에 관한 정립된 견해를 담고 있지는 않다는 점을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국제관계와 지정학적 경쟁에 .관한 분석을 발전시키는 중대한 과제를 제시하는 셈이다.

아슈카르의 장 종교 는 다른 후반부 장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에 관한 마르크 18 “ ”스의 이론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초기 종교비판부터 .성숙기의 이중적 태도-한편으로 국가의 간섭을 배제한 종교의 자유 옹호와 다른한편으로 종교적 신앙에 맞서 해방투쟁을 벌이는 것의 옹호-에 대한 잘 정리된 서술을 통해 마르크스의 종교 개념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고 하겠다 , .스몰의 장 교육 은 다른 후반부 장들과 달리 마르크스의 교육 개념이 이와 밀 19 “ ”접히 연관된 지식 개념 국가와 사회의 교육에서의 역할 교육의 실천가로서 교사 , ,의 노동에 대한 논의들로 잘 정리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가로의 장 예술 은 다른 후반부 주제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가 예술에 관한 20 “ ”체계적 저술을 남기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단편적 서술들을 통해 그의 견해를 재 ,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마르크스의 미학을 초기의 예술 작품과 .그것을 수용하는 사회적 조건에 관한 분석으로부터 성숙기의 예술 작품의 생산 및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 구상과 밀접히 연관된 사회인류학적 과정으로의 전환으로 규정하고 있다 웬들링의 장 기술과 과학 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서 기술 . 21 “ ”발전이 중립적이지 않고 이윤 추출에 도움 되는 기술을 발전시키는 계급성을 지닌다는 점을 밝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관점에서는 일반적 기술 .발전은 없다 단지 주어진 정치 사회 경제 맥락에서 기술의 발전이 있을 뿐이다 . , ,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 자본주의에서 발전한 기술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기술 발전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마지막 월러스틴의 장은 여러 . 22 “마르크스주의 는 여러 종류의 마르크스주의들이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쇠퇴하였다 ”는 새삼스럽지만 종종 망각하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내일의 마르크스주 , .의를 위한 기본 전제가 마르크스를 명석하고 주의 깊게 비판적으로 읽는 것 “ , ”(무스토 외, 2022: 578)이라는 중요한 당위를 지적하고 있다 , .

  1. 논쟁적 주장에 대한 검토

논쟁적 주장을 검토하기 전에 이 책에서 아쉬운 부분을 먼저 지적하고 가겠다.이 책이 마르크스의 주요 개념 가지를 포함했지만 가치론 화폐론 위기론 같은 22 , ,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의 본류를 제외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주제들이 .워낙 논쟁적이라서 편집자가 이렇게 제외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듯 하나의 입장 ,이든 아니면 논쟁하는 주요한 입장들이든 정리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당면 이슈인 금융화 문제나 디지털혁명 차 산업혁명 문제를 정리하는 장 , , 4들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리고 사족일 수도 있지만 세계 최고의 권위 . ,자들이 각 장을 서술하는 방식에 걸맞게 공산주의 에 관한 장은 편집자인 무스토 , “ ”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개념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 “ ” 이 책에서는 정치조직 을 서술한) 후디스(Hudis, 2012)가 더 적합하였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특히 공산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위상에 관한 무스토의 서술이 국가 폐지 혹은 지양으로 명료하게드러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장에서 저자 크뢰트케는 마르크스가 이윤율의 하락을 법 , 1칙으로 논증하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 2022: 44) 무스토 외 . , 하지만 이에정반대되는 시점간단일체계 해석도 있다(Carchedi and Robert, 2013; Kliman et al., 2013). , 물론 저자의 견해를 서술할 권리가 있지만 중요한 쟁점에 대해 다른 견해를같이 소개하거나 비판도 제시하는 친절함이 아쉬운 지점이다.

2 “ , 장에서 저자 무스토는 새로운 사회에서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고기를잡고 저녁에는 목축하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하는 것이 가능하다 라는 독일 , , ” 󰡔이데올로기 의 유명한 문구가 푸리에의 생각을 엥겔스가 채택한 것일 뿐 마르크 󰡕 ,스의 생각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이 구절은 엥겔스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 ( , 2022: 63) 무스토 외 . , 2017 하지만 년 MEGA2 출판 이후의 문헌 연구에서도 독일 󰡔이데올로기 의 대부분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동 저술로 구분 󰡕 할 뿐 두 사람 중누구의 실제 작품인지를 명확히 구분한 것은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1) 무스토가 제시하는 근거는 책의 각주 에서 보듯이 히로마츠의 년 연구와 카버 50 1974의 년 연구이지만 이 연구들은 1998 , MEGA2 I-5 최종판 출판 이전의 연구들로서얼마나 근거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더 중요한 점은 마르크스가 고타강령 비판 의 공산주의 사회의 높은 국면에 󰡔 󰡕 “서 개인들의 노동 분업에의 예속과 그래서 또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사라진 후에”(MECW 24: 87) 등의 언급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 분업의 지양을 계속 상정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지금 문제 되는 문구가 분업 .의 지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설령 엥겔스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마르 ,크스가 동의했을 거라는 점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유토피 . “아 사회주의자들의 환상을 무너뜨리려는 진지한 작업에서 잠시나마 빗나간 엥겔스를 날카롭게 꾸짖었다”( , 2022: 64, 50) 무스토 외 각주 라는 서술은 재검토해 봐야할 것이다 위의 문제 되는 문구를 문자 그대로 각 개인이 하루에 .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여러 가지 사회적 노동 혹은 활동을 하는 사회를 상정하는 공상으로 치부할수도 있지만 더 장기적 과정에 대한 비유적 의미로 이해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더 나아가 생산력의 고도 발전과 사회적 재구성의 결과 사회적 노동과 활동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모든 개인이 실제로 하루에 다양한 사회적 노동이나 활동을 하는사회로서 공산주의가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4장에서 저자 판 데르 린덴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범주에서 룸펜프롤레타리아트와 노예가 제외된다는 점과 이들을 제외한 진짜 프롤레타리아트도 경 “ ”험적 논리적으로 모순투성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저자는 그 근거로 경험적으로 마 · .르크스 당대의 슐레지엔 방직공으로 대표되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사실상 노동자가아닌 자영업자였다는 점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화 ,의 규모와 속도를 과대평가했다는 점 프롤레타리아트를 체제에 통합하는 자본주 ,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래서 자영업자와 노예를 포함하는 .서발턴 개념처럼 경제적 비경제적 강제로 인해 노동하는 모든 집단으로 프롤레타 , ·리아트의 개념을 확장하거나 모든 상품화된 노동을 포괄하도록 확장하자는 것(?)이다.2) 하지만 절대적 잉여가치보다 상대적 잉여가치의 추출이 본질인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고려할 때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중심의 주변적 노동자집단은 상대적 ,잉여가치 추출에 종속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로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밟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경제적 강제가 아니라 비경제적 강제에 종속된 노동자집단 .으로만 구성된 경제가 있다면 이 경제는 자본주의 세계시장 속의 경쟁 과정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상대적 잉여가치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의 주류가 될 것이고 실제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것은 자본주 , .의 초기의 플랜테이션 종신 노예나 채무 노예가 사라졌다는 점만 상기하면 알 수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자유로운 임금노동자 경제적 강제 . ,에만 종속된 노동자집단으로 사용하는 마르크스의 용법은 마르크스 당대는 몰라도 역사적으로 타당성이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적어도 자본주의가 궤 .도에 오른 상태에서는 주변적 노동자집단을 반(semi)-프롤레타리아트 정도로 불러도 무방하다고 하겠다.3)

16장에서 저자 정성진은 공산주의 혁명이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동시 혁명을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독일 이데올로기 의 문구를 인용하며 󰡔 󰡕 ( , 2022: 444) 무스토 외 ,세계시장 세계혁명으로 이어지는 마르크스 논의 구조에서 세계혁명론이 바로 동 ,시 혁명론인 것처럼 보이게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년 공산당 중 . , 1850앙위원회 연설(MECW 10: 281, 287)과 이후의 모든 논의에서 국제적 연속혁명론을채택했다고 볼 수 있다 아일랜드 혁명이 영국과 유럽혁명의 출발점이라거나 러시 .아혁명이 사회주의혁명으로 가능하고 유럽혁명을 통해 완성될 것이라는 주장 등이바로 이런 국제적 연속혁명론을 표현하고 있다(Draper, 1978: 8~9 ; , 2020) 장 앤더슨 .저자 자신도 기존 논의( , 2006: 14 ) 정성진 장 에서 트로츠키의 국제적 연속혁명론을통해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이런 주장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의 견 . ,해가 바뀌어서 세계혁명을 위한 동시 혁명론이 마르크스의 최종 견해라고 보는 것인지 아니면 ( ) 지면 관계상 추가 논의를 생략한 국제적 연속혁명론을 구체적 계기로 내포한 추상적 원칙으로서의 세계 동시 혁명론인지가 궁금하다.

  1. 번역 용어 선택의 문제

이 절을 시작하기 전에 월러스틴의 마르크스를 명석하고 주의 깊게 비판적으 “ ,로 읽는 것”( , 2022: 578) 무스토 외 이 중요하다는 언급을 상기하고 싶다 마르크스를 .명료히 읽기 위해서도 이하에서 제기하는 정확한 번역은 필수적일 것이다.

먼저 공황이라는 번역어를 보자 이것은 를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이 단 . crisis . ,어는 공황이 아니라 위기임이 명백하다 공황으로 번역될 단어는 오히려 이 . panic다 은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 상체와 염소의 다리와 뿔을 가진 들판의 신 . panic (the god of the wild)인 을 춤과 음악을 좋아하지만 욕정이 가득하고 공포를 자아내 Pan ,는 것으로 묘사했던 전통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이렇게 명백한 오역이 학계 .일부의 번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일본의 번역을 중역한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 관련 있을 것이다 이런 오역은 위기라는 단어의 뜻을 공황으로 오해하게 하 .는 문제 외에도 이 단어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 마르크스의 의도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문제도 낳는다고 할 수 있다. panic 마르크스는 자본론 등에서 을 자본 󰡔 󰡕주의 경기 순환 과정의 한 국면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반면 는 활황국면 다음 . , crisis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국면으로 그 앞에 아무런 형용사 없이 사용하였다 그래 .서 이 단어는 자본주의 경기 순환의 한 국면일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양식 붕괴의 위험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적어도 요강 을 집필할 때까지만 해 . 󰡔 󰡕도 마르크스는 위기와 혁명을 직결시켜 사고하였다( , 2013: 77~86) 무스토 . 여기에담긴 사고 논리는 자본 축적 운동의 필연적 결과로 자본주의 체제 붕괴의 위기가발생하였으므로 ( ) 정상적 국면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던 사회주의혁명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이후 연구 과정에서 위기를 자본주의 붕괴의 계 .기가 아니라 새로운 순환을 위한 모순의 폭발과 정리국면으로 자리매김하였어도,위기국면이 내포한 정치 경제 사회 위기가 행위 주체의 혁명적 실천을 매개로 혁 , ,명을 낳을 기회라는 의미는 사라지지 않았다.

반면 공황은 이런 자본주의 생산양식 혹은 체제의 위기라는 의미를 전혀 내포 ,하고 있지 않다 공황이란 단어는 자본론 등에서 마르크스 . , 󰡔 󰡕 가 몇 번 사용할 때도언론 등의 단순 인용문이거나 특별히 화폐공황을 서술할 때 사용했다.4) 여기서 화폐공황은 자본주의 위기국면의 특별한 현상으로서 무가치한 신용화폐를 가치 화폐인 금으로 교환하려는 요구의 쇄도나 이와 연관된 증권 시세 폭락 이것들과 연 ,동하여 벌어지는 세계화폐로서 금의 대규모 유출입 등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있다 즉 당대 언론 등은 자본주의 경기 순환의 본질보다 현상 묘사에 관심이 더 있 .었기에 공황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했고 마르크스도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위기 자체가 아니라 그 국면의 주요한 현상의 묘사를 위해 공황을 사용했을 뿐이다 이상에서 볼 때 여전히 위기를 공황으로 바꿔 번역하는 관행은 이제 사라져야 .할 것이다.5) 다음으로 을 형태로 번역하는 관행을 보자 이것은 form . form(Form)의 정당한

번역이라고 볼 수 있는 형식을 대체하고 있고, shape(Gestalt)의 번역이어야 할 형태를 (form , ) 과 중복적이라서 꺼려지지만 대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형태 혹은 (단어는 다르지만 같은 의미인) 모습 등으로 일관성 없이 번역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서 쟁점은 .형태와 형식이라는 단어의 구별이다 형태는 사물의 겉모습을 뜻하며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적 사물이나 사태를 전제한다 형식은 사물이나 .사태에 적용되지만 겉모습을 뜻하지 않고 겉모습과 나아가 내용까지 규정하는 사 , ,물의 형성 원리 혹은 사물의 운동 법칙을 뜻하며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형식을 갖춘 사물과 사태는 형태를 지니므로 보고 만질 수 있 .지만( )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만 , . 그 만지고 보는 대상이 형식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형식은 형태를 내포하지만 분명히 지칭하는 대상이 다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 과 , . 󰡔 󰡕기타 저술에서 이란 단어를 통해 상품형식 가치형식 화폐형식 자본형식 사 form , , , ,회형식 경제형식 정치형식 국가형식 사고형식 등을 지칭할 때 이것들은 모두 , , , , ,보고 만질 수 있는 사물이나 사태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물이나 사태의 형성 원리 혹은 운동 법칙을 뜻하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단어를 관행적 .으로 상품형태 가치형태 화폐형태 자본형태 국가형태 사고형태 등등으로 번역 , , , , ,하는 방식은 마르크스가 의도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고 작지 않은 뉘앙스차이를 나게 만든다 이것도 물론 일본어 번역을 중역하며 벌어진 일이지만 여기 . ,에 놓인 근본적인 문제는 마르크스가 상품형식 가치형식 화폐형식 자본형식 국 , , , ,가형식 사고형식 등의 언급을 통해 분석하려고 했던 대상이 상품 가치 화폐 자 , , , ,본 국가 등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것을 형성하는 사회적 관계들의 규정 결과가 집 ,약된 사물의 형성 원리 혹은 운동의 법칙이라는 점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 .마르크스가 자본론 첫 장에서 서술한 물신주의 비판 즉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 󰡔 󰡕 ,의 산물을 사물 자체의 성격에서 초래된 것으로 간주하는 자본주의에 내장된 사고방식에 대한 근본적 비판( , 1867: 93) 마르크스 이 수용되지 않은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물신화된 사고에 포착되는 대상들의 겉모습 즉 상품형태 가치형 . , ,태 화폐형태 자본형태 국가형태 등이 아니라 그것들의 본질적 형성 원리와 운동 , , ,법칙 즉 상품형식 가치형식 화폐형식 자본형식 국가형식 등을 분석한 것이다 , , , , , .6)형식과 밀접히 연관된 단어가 인데 이 단어는 관행적으로 결정으로 번역되고 있다 하지만 . , determination(Bestimmung)은 decision making (Entscheidung)과 다르다 전자는 사회적 관계들의 영향에 의해 사물의 형식이 정해 . 지는 객관적 과정을 의미하는 데 반해 후자는 의식적 주체가 사물과 사태에 관한 ,다양한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주관적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형식규정 관 . ,계규정으로 번역해야 할 단어가 형식결정 관계결정으로 번역된다면 의미 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사물의 형식은 사회적 관계들이라는 객관적 요 .인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지 주체가 선택지 중에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 ,문이다 마찬가지로 가치규정 가격규정이지 가치결정 가격결정이 아니다 마르크 . , , .스 논의에서 가치나 가격은 주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들의영향에 의해 객관적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가치규정 가격규정보다 가치결정 가 . , ,격결정이 익숙한 사람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주관적 한계효용 가치론이나 주체가비용가격에다 마진폭을 덧붙여 정한다고 보는 가격론 같은 피상적 사고나 적어도그런 용어 사용법에 무의식적으로 물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관행적인 번역에 대해 문제 제기하고 싶은 단어는 소외 외화 피상화 , , ,양도이다( , 2022: 220, 11) 무스토 외 각주 . 여기서는 저자의 독어에서 영어로의 번역오류와 이와 관련한 한국어 번역의 오류가 혼재되어 있다 우선 저자는 한편으로 .는 estrangement(Entfremdung)와 alienation(Ent usserung) ä 을 유사하지만 서로 구분되는 단어로 마르크스가 사용했다는 점을 잘 밝히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 exteriorization alienation Ent usserung 과 을 에 대한 같은 번역어로 취급하고 있 ä다 하지만 독어 은 영어로 을 의미하는 에서 파생하여 외부 . , Ent usserung out aus ä화의 의미를 지닌 이란 단어에 분리 혹은 이탈의 뜻을 지닌 접두사 äusserung Ent를 붙여서 강제된 혹은 강압된 양도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이 단어는 . ä ä usserung usserlichung ver 에서 동작의 의미가 부가된 에 단순한 강조의 접두사가 붙어서 피상화를 뜻하는 과는 다르다 그래서 저자가 독어를 Ver usserlichung . ä영어로 번역할 때 을 로 을 으 Entfremdung estrangement , Ent usserung alienation ä로 번역한 것은 맞지만 이 아닌 을 , Ver usserlichung Ent usserung exteriorization ä ä으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한국어 번역에서 를 소외로 번역한 것은 좋은 번역이지 , estrangement만( , ) 다만 책의 나머지 부분과 다른 번역자의 번역들이 일관된 것은 아니지만 , alienation을외화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다 여기서 소외라는 번역이 . Entfremdung, estrangment Entfremdung 에 대한 좋은 번역이라는 점은 이란 독어를 분석하면 알 수 있다 이 단어는 낯설다는 뜻의 형용사 . fremd(foreign)에 분리 혹은 이탈의 접두사Ent ung , 를 붙이고 명사화 어미 을 붙여서 형성된 단어로서 어떤 강제된 강압된 양도 같은 상황에 의해 결과적으로 낯설게 된 상태를 뜻하며 소외라는 번역어로서잘 표현되고 있다 반면 외화라는 단어는 그 자체에서 부정적 뉘앙스는 없고 오히 . ,려 내적 상태나 본질을 외부로 표현한다는 긍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 Ent usserung, alienation , ä 은 필자도 예전에 비슷한 잘못을 범했지만( , 2013) 무스토 ,외화가 아니라 강제된 양도 혹은 강압된 양도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물론 영어 . alienation , 에 강제나 강압의 의미가 없지만 이것은 독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한계에서 기인한 것이며 독어를 직접 참조할 때 은 강제나 강압에 의한 양 , , alienation도로 번역해야 마르크스의 의미를 잘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상업적 계약에 .의한 매매 과정으로서의 양도를 독어 이 표현하지만 영어는 같은 Ver usserung , ä alienation . 으로 보통 번역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유사하면서도 단어 형성 과정과 그 함축된 의미가 서로 다른Entfremdung, estrangement, Ent usserung, alienation, 소외와 강압적 양도를 구 ä분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고 후자를 잘못 지칭한 외화는 오히려 표현을 뜻하는 , Äusserung . , 에 사용해야 할 것이다 또한 소외나 강압적 양도와 종종 혼동되는Ver usserlichung, exteriorization . ä 은 피상화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영어로같은 으로 번역되곤 하는 alienation ( ) 소외를 낳는 강압적 양도와 ( ) 매매 과정의 자발적 양도를 서로 다른 독어 과 에 따라 구분하여야 할 것 Ent usserung Ver usserung ä ä이다 결론적으로 반복하자면 과 는 유사한 의미를 지니지 . , alienation estrangement만 전자가 과정적 측면으로서의 강압된 양도라는 뉘앙스가 있다면 후자는 그 결 , ,과로서의 소외된 상태라는 뉘앙스가 있다는 점을 구별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관행적 번역 문제가 아니라 이 책에 주로 해당하는 번역 문제를 살펴볼 차례다 먼저 혹은 를 영구 . permanent revolution revolution in permanence혁명 혹은 영속혁명으로 번역하고 있는데(같은 책에서 같은 단어를 일관성 없이 번역한점은 번역자가 다르다고 해도 아쉬운 지점인데), 이것은 연속혁명으로 보통 번역되는 것과는 뉘앙스 차이를 지닌 번역이다 은 마르크스가 프랑스대 . permanent revolution혁명 연구를 통해 영감을 받고 도입한 단어로서 끝없이 이어지는 혁명이 아니라몇 세기에 걸쳐 자연적으로 발생할 혁명들이 수년 혹은 수십 년 안에 이어지며 연속적으로 발생한다는 의미를 지닌다(Draper, 1978: 8, 9 ) 장 . 프랑스어와 라틴어에서단어 는 실제로도 영원함이나 중단 없음의 의미보다는 연속 계속을 permanence ,뜻하는 뉘앙스 차이를 지닌다(Draper, 1978: 201).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연속혁명은공산주의로의 혁명 이후에도 끝없이 이어지는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연속 .혁명은 초기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나 반봉건 혁명이 수 세기의 시간을 두고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혁명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수년 혹은 수십 년 내에 성격과 단계가 서로 다른 두 가지 혁명이 연속해서 발생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끝없이 이어지는 혁명을 의미하는 영구혁 .명 혹은 영속혁명은 마르크스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materialist conception of history는 역사에 관한 유물론적 개념이 아니라 역사에 관한 유물론적 이해 혹은 파악이다 은 개념인 들을 바탕으 . conception concept로 사물을 파악함 혹은 그 결과로서의 사물에 대한 구상을 뜻한다 이것이 오역인 .것은 의 독어가 이라는 점을 알면 명확해진다 conception Auffassung . Auffassung은 잡다 혹은 이해하다는 의미의 에서 종결 완료 의미의 라는 접두사를 fassen , auf붙여 형성된 동사에다 명사화 어미 을 붙여 형성된 단어다 그래서 ung . Auffassung, conception , , . 은 파악 이해 혹은 구상이라는 의미이지 개념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국제노동자연합에서 마르크스가 오랫동안 활동한 을 총평의회 General Council혹은 전체 평의회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역시 번역자가 달라도 일관성을 유지하 ,지 못한 점은 아쉬운 지점이다 기업이나 정당 같은 조직에서 총무 부서 사무 총괄 . ,부서가 나머지 전문화된 기능별 지역별 조직들을 보좌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주요임무로 하듯이 국제노동자연합에서도 은 General Council (실제 운영 결과와 상관없이 조직 형성 논리상) 실제 운동 주체인 각 나라 지역 업종 조직들을 보좌하고 지원 , ,하는 조직이란 의미이지 전체의 문제를 총괄 결정하고 지도하는 조직이란 의미가 ,아니다 그러므로 전체 평의회보다 총평의회가 더 나은 번역일 것이다 . .

association , , 을 번역자에 따라 연합 결사체 어소시에이션으로 다르게 번역하고있는데 역시 일관성의 문제가 있다 은 불어 아쏘시아시옹 , . association (association)의 영어 표현으로 마르크스가 프랑스 생활 경험 및 프랑스 혁명과 파리코뮌 연구에서 영향받아 즐겨 사용했고 중요하게도 공산주의 사회를 뜻하는 마르크스의 조어 an association of free men(einen Verein freier Menchen)(자유로운 인간들의 연합)(Marx, 1867: 171, MEGA2 II.10: 77, 1867: 102) 마르크스 에서 핵심 개념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정확한 번역이 필요하다 , .7) association은 노동자 관점에서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를 포함한 생활 전반을 포괄적으로 조직하는 방식의 ,의미가 있는 개념으로서 자발적 일상생활 전반의 포괄적이라는 뉘앙스가 있는 연 , ,합이 집단 결의 일상과의 분리 부분적이라는 뉘앙스가 있는 결사체라는 번역보다 , ,낫다고 볼 수 있다 이 단어를 영어 발음 그대로 어소시에이션으로 번역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미묘한 뉘앙스를 그대로 보전할 수는 있겠지만 대중적으로 전달할 수 ,없는 한계가 분명하므로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인간적8) 실수들은 다음과 같다 같은 장에서 마르크스의 같은 논설 제목 .을 영국의 인도 통치 와 영국의 인도 지배 로 달리 표기한 것 “ ” “ ” ( , 2022: 무스토 외370, 377), “ ” “ ” 정치경제학 비판 초안 을 정치경제학 비평 초안 으로 쓴 것( , 무스토 외2022: 389), “1842 7 ” “1842 7 ” 년 월 라인 신문 을 년 월 신라인 신문 으로 표 ≪ ≫ ≪ ≫기한 것( , 2022: 476) 무스토 외 , “ 󰡔 󰡕 자본론 인용문에서 기계가 인간의 도움 없이 원료의 가공에 필요한 모든 운동을 수행하고 오직 그의 보좌(attendance)(Nachhilfe) (MECW 35: 384; MEGA2 II.10: 342)만을 필요로 하게 되면 을 기계가 인간의 도 ” “움 없이 원료의 가공에 필요한 운동을 수행하고 오직 노동자의 존재만을 필요로하게 되면 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게 번역한 점 ” ( , 2022: 548) 무스토 외 이다

  1. 5. 나가

이 글이 논평한 마르크스의 부활 은 개의 개념 주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 󰡔 󰡕 22해를 탐구한 근래에 보기 드문 대작이다 이렇게 마르크스의 사상을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구성하여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책이 있다는 것은 모든 독자에게 큰 복일 것이다 마르크스에 근거하여 세상을 바라보려는 사람들은 물론 마르크스에 관 . ,심 있는 사람들도 이 책을 필독서로 삼아야 할 것이다 논쟁점에 대한 필자의 의견 .은 하나의 의견일 뿐이고 번역 용어에 대한 비판도 참고사항 정도로 보면 좋을 것 ,이다 모든 독자는 페이지에 달하는 명의 대가가 각각 공헌한 전문적 대작을 . 600 22가지고 행복한 사고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직도 운동과 이론의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 중심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이론들 코민테른 정 – , ,치들 사민주의 정치들을 마르크스의 그것들과 구분하지 못하는 실천가 이론가 , , ,대중에게 이 저작보다 더 확실한 각성제는 없을 것이다.

 

 

1) 이회진 에 따르면 년 최종 출판된 독일 이데올로기 (2020) , 2017 󰡔 󰡕 MEGA2 I-5에 근거하여그 문헌의 성격과 저자를 규명하는 작업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결론은 이 문헌이 제목 .이 정해진 단행본의 원고가 아니라 마르크스 엥겔스 외 제 의 저자도 포함된 계간지의 , ( / 3 )원고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기에 편집자들이 개입하여 단행본인 것처럼 재구성해 출 . 20판한 판본들은 왜곡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 MEGA2 I-5 24 에 따르면 개 원고의 저자들은구분되지만 서문의 저자가 마르크스인 점을 제외하면 일부 제 의 저자 원고 외의 나머 , , ( 3 )지 대부분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동 저술로 되어있고 만 엥겔스 마르크스 공동 저술 / (H6 /이고 엥겔스의 단독 저술은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에 관한 초고 하나뿐이다 따라서 ), H15( ) .“ ”( 포이어바흐 장 MECW 5: 47) “ ” 에 있는 아침에 사냥 문구가 엥겔스의 단독 저술이라 …는 주장은 별도의 문헌 연구 근거를 필요로 한다.

 

2) 모든 상품화된 노동을 포괄하도록 확장하자는 표현은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이 모 .든 상품화된 노동력을 의미한다면 자본에 고용되어 잉여가치 생산에 직간접으로 공헌하 ,는 임금노동자뿐만 아니라 형식상 임금수령자인 고용된 경영자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이것이 저자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고용되지만 잉여가치 생산이 아니라 개인적 소비 , .품 생산에 사용되는 노동자를 포괄하지는 의미라면 그런 노동자는 자본주의의 초기에는 ,몰라도 발전할수록 수가 줄어들면서 의미 없어질 것이다 상품화된 노동이 노예나 자영업 , .자를 포괄한다는 의미라면 이미 논의한 것이므로 중복일 뿐이다 , .

 

3)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 심사자는 판 데르 린덴의 논의를 긍정하면서 오늘날 현실에서도 ,여전히 비경제적 강제와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중심의 주변적 노동자집단이 병존하기 때문에 이런 요소를 시스템의 불순물이라기보다 하나의 구성요소에 가깝다 라고 평가하며 , “ ”달리 볼 것을 주문하였다 이에 대한 재반론은 그런 주변적 노동자집단이 자본주의 역사 . ,에서 항상 존속해 왔지만 그들을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 .그 논거는 첫째 이런 주변적 노동자집단이 자본주의 초기부터 현재까지 같은 기원을 계승 ,한 집단이 아니라 자본주의 초기 동유럽의 재생 농노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 종신 노예 , ,채무 노예 세기와 세기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반농 반노동자 세기 말과 세기 초 , 19 20 – , 20 21중국의 이농 이주노동자 등과 같이 다양한 지역과 시점에서 서로 다른 형식으로 존속하다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즉 이들 집단은 일시적 비 임금노동자로서 세계적 수준에서 자본 . -의 축적 논리에 종속되고 착취되었지만 자신들의 투쟁과 자본 축적 논리의 변화에 따라 ,사라지면서 결국 임금노동자로 형식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현재 세계적으로 공식적 , . ,임금노동자보다 더 많은 불안정노동자 비 임금노동자 집단이 현존하는데 , – (Foster et al.,2011: 20; Foster and Jonna, 2016: 16; Srnicek and Williams, 2016: 5 ), 장 이들은 임금노동에 불안정하게 참여하고 있거나 참여할 의지를 지닌 실업자이거나 그런 능력과 의지를 상실한 집단이거나 아니면 자영업 노점 지하경제 범죄조직 등 비 임금노동에 전적 , 으로 참여하는 집단이다 일부를 룸펜프롤레타리아트로 규정할 수 있는 후자를 뺀 전자 . ( )는 마르크스적 의미의 상대적 과잉인구 산업예비군 즉 프롤레타리아트로 규정할 수 있 , ,다 결론적으로 다양한 형식의 불안정 비 임금노동자집단이 역사적으로 존속해 왔지만 . , – ,이들은 상대적 잉여가치 중심으로의 자본 축적 논리의 변화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로 변형 포섭된 일시적 집단이거나 아니면 자본 축적 논리에서 배제되었다가 필요시에 활용될프롤레타리아트로 존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으로도 .역사적으로 존속했거나 현존하는 다양한 불안정 비 임금노동 집단을 규정할 수 있으므로 , -굳이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을 확장할 필요가 없게 된다4) 은 자본론 권에서 번 권에서 번 나오는데 대부분이 언론 의회청문회 기 panic 1 2 , 3 30 ,타 저자에 대한 인용문이고 나머지 대여섯 번을 화폐공황을 직접 화폐라는 표현은 없 , (지만, 그런 맥락에서 간접 지칭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특히 년 위기의 화폐공 ) . “1847-48황”(MECW 37: 418; , 1894: 542) 마르크스 이라는 표현을 보면 위기와 공황의 구분이 분명해진다.

 

5) 한 심사자는 이 문제에 대해 공황이라는 번역이 일상에 정착된 용어라는 점 위기보다 공 ,황이라는 번역어가 더 파괴력을 지닌다는 점을 들어 필자의 번역 비판을 하나의 의견으로 ,만 보아야 한다고 논평했다 물론 필자의 주장은 하나의 의견으로서 수용 여부는 독자들의 .판단 영역에 놓여 있다 다만 재반론하자면 일상에 정착된 용어에 대해 학술적으로 반론 . , ,한다는 점 자체가 의의가 있다는 점 그리고 위기보다 공황이라는 용어가 더 파괴력이 있 ,지만 그 파괴력의 방향이 위기 용어가 내포한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 가능성과 대안체제 ,가능성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붕괴의 두려움을 조장하고 기존체제를 살려야 한다는 심리를 낳는 파괴력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위기 때 대중의 금 모으기 운동 . IMF ,2008년 자본주의 위기에서 노동의 공세가 아닌 수세적 입장 등이 그런 심리의 반영일 것이다.

6) 이 문제와 관련하여 두 분의 심사자가 반론을 제기했다 한 분은 을 형태로 번역하는 . form경우가 철학 미학 언어학 기호학 건축학 등에서 다양하게 있다는 점과 자본론 에서도 , 가치 실체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가치형태로 번역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다른 분도 마찬가 .지로 가치 실체와 대조되는 개념으로서 가치형태로 번역이 타당하다고 보고 있다 성서에 .서 사람의 아들 예수가 신의 강생 이듯이 감각될 수 없는 추상적인 사회적 관 (incarnation) ,계인 가치 실체와 대조되는 감각적이고 인식 가능한 것이 가치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물신성 개념도 형식과 사회적 관계를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체로서 사회적 관계와 구분되는 형식 형태에 대한 집착이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재 / .반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과 는 일상용어에서도 실제로 구분된다는 점이다 예 . , form shape .를 들어 손홍민 같은 축구선수의 이 좋다고 할 때 이것은 구체적 운동 자세나 동작이 form ,아니라 그것들에서 표현되는 전반적 추상적 운동 수행 원리를 칭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 , .의 몸매가 좋다고 할 때는 보다 가 더 잘 어울린다 즉 형식은 일련의 형태들을 form shape .통해 가시화되는 추상적 법칙 원리를 뜻한다 반면 다양한 학술 분야에서 이 형태로 , . form번역된다는 원저자가 그렇게 사용한다는 것은 이런 뉘앙스 차이를 넘어선 학술적 변용 ( ) ,비유 혹은 오용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적어도 마르크스에서 과 는 다음 인용 . , form shape문들처럼 분명히 구분된다는 점이다 화폐형식을 그 완성된 형태로 지닌 가치형식은 전혀 . “내용 없고 단순하다 여기서 이런 화폐형식의 기원을 입증하는 것 따라서 상품들의 .” “ , …가치관계에 내포된 가치표현의 발전을 그 가장 단순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부터 ,눈부신 화폐형식으로 따라가는 것이 타당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상품의 화폐형식은 오 .” “직 가치형식의 더 발전된 형태라는 점을 분명히 말한다 상품 의 가치관계에 내포된 상 .” “ B품 의 가치표현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그 관계 속에서 상품 의 자연적 형식이 오직 사용 A A가치 형태로 상품 의 자연적 형식이 오직 가치형식 혹은 가치형태로 통용된다는 점을 보 , B여준다”(MEGA2 II.10: 7, 49, 59, 61~62; , 1867: 3, 60, 75, 78). 마르크스 필자가 해석하는 마르크스 방법 하태규 에서 사회적 관계들의 집약이 사회적 형식이다 가치 ( , 2019) .form은 가치 실체인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맞게 다양한 교환가치로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같은 상품이 금화로 일 때 은화로 이라는 식으로 이것은 ( 1g 15g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의 사회적 관계의 반영이고 집약이다 화폐형식은 보편적 등가형식 .의 고정인데 이것은 하나의 상품보유자와 나머지 모든 상품보유자 사이의 교환관계라는 ,사회적 관계 집약의 고정이다 셋째 이런 사회적 관계의 집약으로서의 사회적 형식은 추 . ,상적이라서 물질적 감각적 형태를 통해 표현된다 그래서 추상 노동으로서 감각적일 수 없 · .는 가치 실체는 자기 형식을 자신이 아니라 물적 형태를 지닌 제 자를 통해 현상시켜야 한 3다 반면에 화폐부터 각종 자본 그리고 정치 국가 등등은 사회적 관계들의 집약인 사회적 . ,형식을 자신의 물적 형태를 통해 표현한다 마르크스는 이런 가치형식 화폐형식 자본형 . , ,식 사회형식을 사회적 관계들의 집약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것이 표현된 물적 형태의 물리 ,적 속성으로 간주하는 물신성을 비판했다.

7) 현재열 에 따르면 불어 아쏘시아시옹 은 사전적 정의로는 연합하려는 (2014) , ‘ ’ (d’associer)행위와 그 결과를 포괄적으로 의미하면서 영어 으로 옮겨도 무방하지만 역사 ‘association’ ,적으로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 이런 역사적 의미는 프랑스대혁명 및 세기 프랑스 역사와 . 19연관이 있다 구체제에서는 금지되었던 결사 의 자유를 대혁명 이후 세기에 . (association) 19는 좌 우파를 막론하고 정치적 실천의 개념으로 채택하였고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 서는 노동해방과 노동 생산물의 자율적 처리를 위한 조직방식 즉 협동조합이나 상호부 “ ”조협회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부 노동운동은 아쏘시아시옹을 경제를 넘어 사회 . 정치를 포괄하는 생활 전반의 개념으로 채택했다 결국 노동자 아쏘시아시옹은 파리코뮌 . ,에서 사회해방의 도구로서 생활 전반의 조직화 방식이라는 복합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8) 한 심사자가 인간적 이란 표현이 학술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했지만 여기서 인간적이란 말 ‘ ’ ,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끔 말이 헛 나오듯이 번역에서도 의도와 상관없이 잘못된 번역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실수가 기계적 컴퓨터적 작업이 아니라 실수를 할 수 있는 , · ( )인간의 작업에서 비롯된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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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좌파

1. 전쟁의 경제적 원인
정치학은 전쟁을 추동하는 이데올로기적·경제적·심지어 심리적 동기를 연구하 는 반면, 사회주의 이론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전쟁의 확산 사이의 연계를 강조함 으로써 가장 강력한 이론적 기여 가운데 하나를 이룩했다.

국제노동자협회(1864~1872, 제1인터내셔널)의 논쟁에서 주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세사르 드 페페(César de Paepe)는 전쟁 문제에 관한 노동자 운동의 고전적 입 장, 즉 자본주의적 생산 아래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정식화했다. 현대사회 에서 전쟁은 군주나 다른 개인의 야심이 아니라 지배적인 사회경제적 모델에 의해 야기된다(De Paepe, 2014a: 229~231). 사회주의운동 역시 주민의 어느 부문이 전쟁 의 참혹한 결과에 의해 가장 큰 타격을 받는지 보여줬다. 1868년 열린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참석 대의원들은 노동자들이 승자가 되든 패자가 되든 그들의 지배계급 과 그들을 대표하는 정부들의 결정에 대해 경제적으로 또는 자신의 피로 대가를 치를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모든 전쟁의 최종적 폐지”를 추구할 것을 호소하 는 동의안을 채택했다(Freymond, 1962: 402; Marx, 2014: 92).1 노동자 운동에게 문 명적 교훈은 어떤 전쟁이라도 모두 ‘내전’(Freymond, 1962: 403; Musto, 2014: 49), 즉 노동자들의 생존에 필요한 수단을 박탈하는 것은 노동자들 사이의 격렬한 충돌 로 간주해야 한다는 신념으로부터 나왔다. 노동자들은 징집에 저항하고 파업투쟁 을 벌여 어떤 전쟁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투쟁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국제주의 는 미래 사회의 핵심적 사항이 되었고, 미래 사회는 세계시장에서 부르주아 국가 들 사이의 경쟁과 자본주의의 종식과 함께 전쟁의 주요한 근본적 원인을 제거하게 된다.

사회주의의 선구자 가운데 클로드 앙리 드 생시몽(Claude Henri de Saint-Simon) 은 전쟁과 사회적 갈등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고, 양자를 산업생산의 근본적 진보에 장애물이 된다고 간주했다. 칼 마르크스는 그의 저술에서 전쟁에 관한 견 해를 발전시키지 않았고, 그의 견해는 단편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이기도 했다. 마르 크스는 또한 전쟁에 대해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의 지침을 제시하지 않았다. 마르 크스가 대립하는 진영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경우, 그의 유일한 상수는 반혁 명의 전초기지이자 노동계급 해방의 주요한 장벽 가운데 하나로 여겼던 차르체제 러시아(Tsarist Russia)에 대한 반대였다. 『자본』(1867)에서 마르크스는 폭력이 경제 적 힘이며, “새로운 사회를 잉태한 모든 낡은 사회의 산파”(Marx, 1996: 739)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전쟁을 사회의 혁명적 변혁을 위한 결정적 지름길이 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마르크스의 정치적 활동에서 주요한 목표는 노동자들이 국 제연대에 헌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도 주장하듯이, 외부의 적 이라는 선전주의적 발명이 어떤 전쟁의 발발을 가져올 위협이 존재하는 개별 나라 들에서 노동자들은 계급투쟁의 위축에 맞서 결연하게 투쟁해야 한다. 노동자 운동 의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여러 편지에서 엥겔스는 애국주의라는 덫과 배외주의의 물결로부터 발생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지연의 이데올로기적 힘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반뒤링론』(1878)에서 엥겔스는 훨씬 더 치명적인 무기의 효과에 대한 분 석에 이어 사회주의의 임무는 “군사주의와 모든 상비군을 분쇄하는 것”이라고 선 언했다(Engels, 1987: 158).

전쟁은 엥겔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여서 그는 마지막 저술 가운데 하나를 전쟁 에 집중했다. 「유럽의 무장해제는 가능한가」(1893)에서 엥겔스는 지난 25년 동안 모든 주요 열강이 군사적으로, 전쟁 준비의 면에서 제압하려고 경쟁국보다 노력했 다고 지적했다. 유례없는 수준의 무기 생산이 이루어졌고, 구대륙은 “세계가 결코 본 적 없는 그런 파괴의 전쟁”(Engels, 1990: 372)에 더 접근하게 되었다. 『공산당 선 언』(1848)의 공저자인 엥겔스에 따르면, “상비군 시스템은 유럽 전역에서 극단적 으로 발전해서 상비군은 군사적 부담 때문에 민족들에게 경제적 파산을 가져오거 나 또는 전면적인 박멸전에 빠지게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분석에서 엥겔스는 상비 군이 외부에 대한 군사적 목적만큼 주로 국내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유지된다고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상비군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자 투쟁을 탄압할 세 력을 강화함으로써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적에 맞서 보호를 제공할” 의도로 구 성되어 있다. 민중들이 국가에 세금을 내고, 병력을 제공함으로써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하기 때문에, 노동자 운동은 “국제협약에 의한 [군사] 서비스 조건의 점진적 감소”와 유일하게 효과적인 “평화의 보장책”으로서 무장해제를 위 해 투쟁해야 한다(Engels ,1990: 371, 괄호는 저자).

2. 시험과 몰락
머지않아 평화 시의 이론적 논쟁은 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전환되었 다. 이 시기 노동자 운동은 그들의 대표들이 처음에 어떤 전쟁에도 반대하는 현실 과 직면해야 했다. 1879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파리 코뮌 직전에 일어난)에서 독 일 사회민주당 의원인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와 아우구스트 베 벨(August Bebel)은 비스마르크의 독일이 추진하는 병합주의적 목적을 규탄했고, 전쟁공채에 반대투표를 했다. “전쟁을 계속하려는 추가적 자금을 위한 법안을 거 부하는”(Pelz, 2016: 50) 결정으로 인해 그들은 2년 징역형을 받았지만, 그들의 행동 은 노동계급에게 위기에 대한 대안적 방식을 보여주는 데 기여했다.

유럽의 주요 열강들이 제국주의적 팽창을 지속하면서, 전쟁에 관한 논쟁은 제2 인터내셔널(1889~1916)에서 훨씬 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창립 대회에 서 채택한 결의안은 평화를 “노동자 해방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Dominick, 1982: 343)으로 정립했다. 부르주아지가 주장하는 평화정책은 비웃음을 샀고, “무 장한 평화”의 정책으로 규정되었다. 1895년 프랑스 사회당(SFIO)의 지도자인 장 조레스(Jean Jaures̀ )는 유명한 의회 연설에서 좌파의 우려를 요약했다. “여러분의 폭력적이고 혼란스러운 사회는 심지어 평화를 원할 때에도, 심지어 명백한 휴지 상태에 있을 때에도, 잠자는 구름이 폭풍우를 품고 있는 것처럼 전쟁을 자체 내부 에 품고 있다”(Jaures̀ , 1982: 32).

독일제국이 국제적 영역에서 권력을 확대하려는 공격적 정책인 ‘세계정책 (Weltpolitik)’을 전개함에 따라 지정학적 상황을 변화시키면서 반제국주의 원칙은 노동자 운동에서 더 깊은 뿌리를 내렸고 무장갈등에 관한 토론에 영향을 주었다. 전쟁은 더 이상 혁명적 기회를 열고 체제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것(1872년 혁명전쟁 이후 좌파의 사상)으로 간주되지 않았다.2 기아, 궁핍, 실업의 형태로 프롤레타리아 트에게 미치는 심각한 영향 때문에 전쟁은 이제 위험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전 쟁은 진보세력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고, 『사회혁명』(1902)에서 칼 카우츠키(Karl Kautsky)가 썼던 것처럼, 진보세력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비핵심적인 임무로 과도 하게 부담”(Kautsky, 1903: 77)하게 되며, 이는 최종적 승리를 더 가까이 가져오기 보다는 더 멀어지게 할 것이다.

1907년 제2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안 「군사주의와 국 제분쟁에 관하여」는 노동자 운동의 공통적 유산이 된 모든 핵심을 되풀이해서 요 약했다. 그 핵심은 군비 지출을 증가시키는 예산에 반대하는 투표, 상비군에 대한 반감, 민중의 민병대 시스템에 대한 선호,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중재법 원을 창출할 계획에 대한 지지 등이다. 여기에는 구스타브 에르베(Gustave Hervé) 가 제시한 바대로 어떤 종류의 전쟁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총파업 호소는 배제되었 다. 왜냐하면 참석자의 다수가 그 방침을 너무 급진적이고 마니교적(이분법적 — 옮 긴이)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의안은 로자 룩셈부르크, 블라디미르 레닌, 율리 마르토프가 작성한 수정안으로 마무리되었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 전쟁 의 신속한 종식을 위해 개입하고, 전쟁이 야기한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활용할 모 든 능력을 발휘해 대중들을 고무하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적 계급지배의 몰락을 가속화하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의무이다”(Vv. Aa, 1972: 80). 그러나 이 결의안이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정치노선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사민당 의원 들은 전쟁에 찬성하는 투표를 했다. 수정된 텍스트는 제2인터내셔널에서 만장일치 의 지지를 확보한 전쟁에 관한 마지막 문서였다.

세계시장에서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더욱 격렬한 경쟁은 수많은 국제분쟁의 발발과 함께 전반적인 상황을 훨씬 더 경악스럽게 만들었다. 조레스의 『새로운 군 대』(1911)의 출판은 이 시기의 또 다른 중심적 주제, 즉 공격적 전쟁과 방어적 전쟁 사이의 구분과, 하나의 독립이 위협받는 경우를 포함해 방어적 전쟁에 대해 취할 태도에 관한 토론을 자극했다. 조레스에게 군대의 유일한 임무는 어떤 공격적 침 략 또는 중재를 통한 분쟁의 해결을 받아들이지 않는 어떤 침략국으로부터 민족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이 범주에 들어가는 모든 군사적 행동은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입장에 대해 룩셈부르크는 “현대전과 같은 역사적 현 상은 ‘정의’라는 잣대로 또는 방어와 공격이라는 문서상의 도식을 통해 측정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Luxemburg, 1911). 그녀의 견해로는 어떤 전쟁이 진정으로 공 격적인지 아니면 방어적인지 또는 전쟁을 시작한 국가가 고의로 공격하기로 결정 했는지 아니면 전쟁에 반대하는 나라가 채택한 전략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 는지를 판단할 때의 어려움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룩셈부르크는 그런 구별을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무장한 국가’가 궁극적으로 사회에서 점증하는 군사화를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다는 근거로 조레스의 개념을 더욱 비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2인터내셔널은 평화를 위한 투쟁의 정책을 더욱더 방기했 다. 재무장과 전쟁 준비에 대한 반대는 활기를 잃었고, SPD의 더욱 온건하고 합법 주의적 영향은 독일에서 정치적 자유를 더 많이 부여받는 대가로 군사공채, 그리 고 그다음엔 심지어 식민지 팽창에 대한 지지와 거래했다. 구스타브 노스케(Gustav Noske), 헨리 하인드먼(Henry Hyndman), 아르투로 라브리올라(Arturo Labriola) 등 과 같은 중요한 지도자와 저명한 이론가들은 이런 입장에 처음으로 도달한 자들이 었다. 이후에 독일 사민당원, 프랑스 사회당원, 영국 노동당 지도자들, 다른 유럽의 개량주의자들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지지하게 된다. 이런 경로는 재앙적 결과를 가져왔다. ‘진보의 혜택’을 자본가들이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으로 노동자 운동은 지배계급의 팽창주의적 목표를 공유하게 되었고 민족주의 이 데올로기의 수렁에 빠졌다. 제2인터내셔널은 전쟁에 직면해 완전히 무력했고, 평 화의 유지라는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에서 실패했다.

치머발트 협의회(1915)에 참석한 레닌과 다른 대의원들은 최종 선언을 작성한 레브 트로츠키를 포함해 “수십 년 동안 전비 지출은 민족들의 최상의 에너지를 흡 수할 것이고, 사회적 개선을 침해하고 어떤 진보도 방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들의 눈에는 전쟁이 “노동 대중의 이해뿐만 아니라 […] 심지어 인류의 공동 생존 의 첫 번째 조건과도 화해할 수 없게 된 적나라한 형태의 현대 자본주의”임을 폭로 했다(Vv. Aa, 1915). 이런 경고에 노동자 운동의 소수만이 귀를 기울였고, 킨탈 협의 회(1916)의 모든 유럽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도 그러했다. “여러분의 정부와 그 들의 신문은 여러분에게 군사주의를 종식시키기 위해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 한다. 그들은 여러분을 기만하고 있다! 전쟁은 결코 전쟁을 종식시킨 적이 없다. 정말로 전쟁은 복수의 감정과 소망을 낳는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에게 희생을 강 요해 여러분을 연옥의 순회 속에 가둔다”(Vv. Aa, 1977: 371). 국제 중재법원을 호소 했던 슈투트가르트 대화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킨탈의 최종 문서는 “부르주아적 평 화주의의 환상”은 전쟁의 소용돌이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경제적 시 스템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래의 군사적 분쟁을 막는 유 일한 방식은 인민대중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해 자본주의적 소유를 타도하는 것이 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블라디미르 레닌은 전쟁에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두 사람이 었다. 룩셈부르크는 좌파의 이론적 이해를 확대했고, 군사주의가 어떻게 국가의 핵 심 중추인지 보여줬다.3)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보다 강력한 확신과 뛰어난 효율 성을 보여준 룩셈부르크는 “전쟁에 대한 전쟁을!”이라는 슬로건이 “노동계급 정치 의 초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임무에 관한 테제』(1915)에 썼던 것처럼 제2인터내셔널은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공 동 전술과 투쟁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자멸했다. 따라서 그 이후로 프롤 레타리아트의 “주요한 목적”은 “전쟁 시처럼 평화 시에 제국주의와 투쟁하고 전쟁 을 막는 것”이어야 한다(Luxemburg, 1915b).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사회주의와 전쟁』(1915)과 다른 많은 저술에서, 레닌의 커다란 장점은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부르주아 지가 이번에 어느 교전국이 가장 많은 외국 민족을 억압하고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증가시킬지 결정할 유일한 목표로 실제로 수행되는 ‘약탈’ 전쟁에 ‘민족해방의 진 보적 의미’(Lenin, 1971: 299~300)를 부여하려고 노력하려고 할 때면 언제나 저지르 는 ‘역사적 위조’와 관련된 것이다. 두 번째는 사회개량주의자들, 또는 ‘사회배외주 의자들’(Lenin, 1971: 306)에 의한 모순의 은폐였다. 이들은 제2인터내셔널이 채택 한 결의안에서 ‘범죄적’ 활동이라고 규정했음에도 궁극적으로 전쟁의 정당화를 승 인했다. ‘조국을 수호한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특정 열강들이 ‘식민지를 강탈하고 외국 민족들을 억압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부여한 권리가 존재한다. 전쟁은 ‘민족 의 존속’을 수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의 ‘특권과 지배, 약탈과 폭력을 방어하기 위해’ 치러진다(Lenin, 1971: 307). 애국주의에 굴복 한 사회주의자들은 계급투쟁을 ‘다른 나라들을 약탈하여 자국 부르주아지가 획득 한 이유의 한 조각’에 대한 권리 주장으로 대체했다. 따라서 레닌은 ‘방어적 전쟁’을 지지했다. 즉 조레스식으로 유럽 나라들의 민족방어가 아니라 ‘노예를 소유한 열강 들’에게 ‘약탈당하고 권리를 박탈당한 피억압 예속 민족들의 정당한 전쟁’을 지지 했다(Lenin, 1971: 314). 레닌의 팸플릿의 가장 유명한 테제, 즉 혁명가들은 ‘제국주 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Lenin, 1971: 315)4 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테제는 ‘지 속적인 민주적 평화’를 원한다면 ‘자신들의 정부와 부르주아지에 대한 내전’(Lenin, 1971: 316)5 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레닌은 역사가 이후에 무엇이 부정 확한지 보여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전쟁의 시기에 수행하는 어떤 계급투쟁도 ‘불가피하게’ 대중들 사이에서 혁명적 정신을 창조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3. 구획선
제1차 세계대전은 제2인터내셔널뿐만 아니라 무정부주의 운동에서도 분열을 낳았다. 전쟁 발발 직후에 발표된 논문에서 크로포트킨(Kropotkin)은 “인간 진보에 관한 사상을 소중히 여기는 모든 사람의 임무는 독일의 서유럽 침공을 분쇄하는 것”이라고 썼다(Kropotkin, 1914: 76~77). 많은 사람이 자기가 평생 투쟁한 원칙을 저버린 것으로 보는 이 진술은 노동대중들에게 주목받지 못한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이라는 슬로건을 넘어서고 독일의 승리가 가져올 유럽 정치의 전반적인 퇴 행을 회피하려는 시도였다.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만약 반군국주의자들이 무력하 면 침략자들의 정복 계획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게 되며, 그에 따른 장래는 사회혁 명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극복하기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크로포트킨에 대한 답변으로 이탈리아 무정부의자 에리코 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는 비록 그가 평화주의자는 아니고 해방전쟁에서 무기를 잡는 것이 정당 하다고 생각함에도 세계 전쟁은 부르주아 선전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주주의의 “공 동의 적에 맞서 보편 선을 위한” 투쟁이 아니며, 노동대중들이 지배계급에 종속되 는 또 다른 사례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말라테스타는 “독일의 승리가 확실히 군사 주의의 승리임을 확인하겠지만, 동맹국의 승리는 유럽과 아시아에서 러시아와 영 국의 지배를 의미할 것”임을 인식했다(Malatesta, 1993: 230).

「16인 선언」(1916년)에서 크로포트킨은 “우리 모두의 해방이란 희망의 파괴를 의미하는 침략자에 저항할” 필요를 주장했다(Kropotkin et al., 1916). 독일에 맞선 삼각동맹(triple entente)의 승리는 더 작은 악이며, 기존의 자유를 덜 침해할 것이다. 다른 편에서 말라테스타와 그의 동료 서명자들은 무정부주의 인터내셔널의 반전 선언(1915)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공격전과 방어전 사이의 구별은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그들은 “어떤 교전국들도 정당한 자기방어를 주장할 자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명을 주장할 어떤 권리도 없다”라고 덧붙였다(Malatesta et al., 1998: 388).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은 노동계급의 희생으로 치러지는 다양한 제국주의 열강의 자본가들 사이의 전쟁에서 추가적 에피소드였다고 주장했다. 말라테스타, 에마 골드먼(Emma Goldman), 페르딘(Ferdin), 뉴엔하위스(Nieuwenhuis)와 대다수의 무정부주의 운동가들은 부르주아 정부를 지지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오류라고 확신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어떤 조건이나 반대도 없이 “군대에는 단 한 명도 단 한 푼도 거부한다(no man and no penny for the army)”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쟁 추진을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어떤 슬로건도 거부했다.

전쟁에 대한 태도는 여성운동에서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오랫동안 남성이 독 점한 직업에서 징집 남성을 대신할 여성의 필요성은 훨씬 낮은 임금과 과잉 착취 라는 조건 속에서도 새로 태어난 여성 투표권 운동의 상당한 부분에서 배외주의 이데올로기의 확산을 자극했다. 일부 지도자들은 여성의 입대를 허용하는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 청원하기도 했다. 내부의 적을 소환해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역전시 키려고 전쟁을 이용한 일구이언 정부들의 폭로는 이 시대 주요한 여성 공산주의자 들의 가장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i), 실비아 팽크허스트(Sylvia Pankhurst), 그리고 당연히 로자 룩셈부르크는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가부장제에 반대하는 투쟁에 핵 심적임을 후세대에게 보여주는 경로에 명료하고 용감하게 나섰다. 후에 전쟁 거부 는 국제여성의 날의 명확한 의제가 되었고, 새로운 분쟁이 발발하는 경우 전쟁예 산 반대는 국제 여성운동의 많은 강령에서 뚜렷한 특징이 되었다.

4.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잘못된 수단은 목적에 피해를 가한다
혁명가와 개량주의자 사이의 깊은 분열은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6 과 1920년대 와 1930년대 이데올로기적 교조주의의 성장 이후 전략적 차이를 확대했고, 공산주 의 인터내셔널(1919~1943)과 유럽의 사회당 및 사민당 사이의 어떤 동맹도 배제했 다.7 전쟁을 지지했던 정당들은 노동·사회주의 인터내셔널(LSI: 1923~1940)을 결 성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눈으로 볼 때 모든 신뢰를 상실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는 레닌주의적 사상은 여전히 모스크바에서 우위를 보였고, 소 련의 지도적 정치인과 이론가들은 ‘새로운 1914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그 런데 양측의 토론은 처음부터 전쟁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보다는 새로운 전쟁이 일 어날 경우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슬로건과 원칙선언은 일어날 것으 로 예상되는 사태나 그 이후의 정치 행동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공산주의 진영의 비판적 목소리는 “평화를 위한 투쟁”이라는 슬로건을 주창한 니콜라이 부 하린(Nikolai Bukharin)을 비롯하여 러시아의 지도자들 사이에서 현대사회의 핵심 적 이슈 가운데 하나라고 확신한 사람들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모든 열강의 전쟁 위협에 동등하게 책임이 있지는 않다고 주장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광범한 인민전 선을 건설하기 위해 개량주의 정당들과의 화해를 지지했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Georgi Dimitrov)도 있다. 이들의 견해는 모두 소비에트 정통의 장황한 논리와 대 조된다. 소비에트는 이론적 분석을 업데이트하기는커녕 전쟁의 위험은 동등하게, 아무런 차이도 없이 모든 제국주의의 열강이 야기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이 문제에 관한 마오쩌둥의 견해는 전혀 달랐다. 일본 침략에 맞선 해방운동의 지도자로서 마오는 『지구전에 관하여』(1938)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참 여해야 하는 “정당한 전쟁(Mao Tse-Tung, 1966: 15)은 엄청난 권력을 부여받으며, 그 권력은 많은 것을 변혁할 수 있고 또는 변혁을 위한 길을 닦는다”라고 썼다 (Mao Tse-Tung, 1966: 26~27). 따라서 마오가 제시한 전략은 “정당한 전쟁으로 부 당한 전쟁에 대항하는 것”이자(Mao Tse-Tung, 1966: 53), 더 나아가 “정치적 목적 을 성취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혁명전쟁의 전능함”에 관한 주장 은 『전쟁과 전략 문제』(1938)에서 반복되는데, 마오는 “오직 총으로만 전 세계를 변혁할 수 있으며(Mao Tse-Tung, 1965: 219), 군대에 의한 권력장악, 전쟁에 의한 문제 해결은 혁명의 중심적 임무이자 최고 형태”라고 주장했다(Mao Tse-Tung, 1965: 225).

유럽에서 국내외적으로 강화되는 나치-파시스트 전선의 폭력과 제2차 세계대 전(1939~1945)의 발발로 1914~1918년 전쟁보다 훨씬 더 극악한 시나리오가 펼쳐 졌다. 1941년 히틀러의 군대가 소련을 공격한 이후 나치즘의 패배로 끝난 대애국 전쟁은 러시아 민족단결의 중심적 요소가 되어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서도 살아남 아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전후 세계가 두 진영으로 분할되자 조셉 스탈린(Joseph Stalin, Iosif Vissarionovich Stalin)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주요한 임무는 소련을 수호하는 것이라고 가르쳤 다. 동유럽 8개 나라(유고슬라비아의 퇴장 이후 7개)의 의 완충지대를 창출하는 것이 이 정책은 중심축이었다. 같은 시기 트루먼 독트린은 새로운 유형의 전쟁인 냉전 의 도래를 상징한다. 그리스에서 반공주의 세력의 지지, 마셜플랜(1948), NATO 설립(1949) 등을 통해 미국은 서유럽 진보세력의 전진을 피하는 데 기여했다. 소련 은 바르샤바 조약(1955)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구도는 거대한 무기경쟁으로 이어 졌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실험의 확산을 자극 했다.

1961년부터 니키라 흐루쇼프(Nikita Khrushchev)의 지도로 소련은 ‘평화공존’으 로 알려진 새로운 정치적 경로를 밟기 시작했다. 이 전환은 불개입과 민족권의 존 중, 자본주의 나라들과의 경제협력에 대한 강조와 함께 제3차 세계대전의 위험을 회피하고(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가능성을 보여준) 전쟁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이런 건설적 협력 시도는 오직 미국 에만 적용되었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주의’ 나라들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1956년 소련은 이미 헝가리의 반란을 분쇄했고, 서유럽의 공산당들은 사회주의 블 록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자행된 군사개입을 비난하지 않고 정당화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공산당의 서기인 팔미로 톨리아티(Palmiro Togliatti)는 “우리는 비록 실수를 하더라도 우리 편에 선다”라고 선언했다(Vittoria, 2015: 219). 이 입장을 공 유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소비에트 작전의 파괴적 영향을 이해한 이후에 이를 뼈저 리게 후회했다.

비슷한 사건들이 평화공존의 정점인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났다. 프 라하의 봄 동안 민주화와 경제적 탈집중화 요구에 직면한 소련공산당의 정치국은 만장일치로 50만 명의 군대와 수천 대의 탱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1968년 폴란 드 통합노동자당 대회에서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는 바르샤바 조약 나라들의 ‘제한주권’을 언급함으로서 이 행동을 설명했다. “사회주의에 적대적인 세력이 어떤 사회주의 나라의 발전을 자본주의로 전환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관 련된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의 공동의 문제이자 관심이 된 다”(1968년 11월 13일 브레즈네프가 폴란드 통합노동자당 5차대회에 참석해 한 연설 — 옮긴 이). 이 반민주적 논리에 따라 무엇이 ‘사회주의’인지 아닌지의 규정은 자연스럽게 소련 지도자들의 자의적 결정에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좌파에서 비판은 더욱 적극적으로 개진되어 심지어 다수를 대표하기도 했다. 소련의 행동에 대한 반대는 신좌파 운동만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을 포함한 다수의 공산당들이 표현했 음에도, 러시아는 후퇴하지 않고 ‘정상화’라고 부르는 과정을 관철시켰다. 소련은 계속 경제자원의 상당 부분을 군비 지출에 책정했고, 이는 사회의 권위주의적 문 화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식으로 소련은 평화운동의 선의를 영원히 상실 했다. 반면 평화운동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강력한 투쟁을 통해 훨씬 더 크게 성장 했다.

그 이후 가장 중요한 전쟁 가운데 하나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시작되 었다. 1917년 붉은 군대는 또다시 소련 외교정책의 주요한 도구가 되었고, 소련은 스스로 ‘안보 지역’이라고 규정한 곳에 개입할 권리를 계속해서 주장했다. 불운한 결정은 10년 이상 늘어지는 소모적 모험으로 전환되었고, 엄청난 사망자와 수백만 명의 난민을 만들어냈다. 이때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소련 침공에 비해 훨씬 더 억제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 새 전쟁은 ‘실제 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와 평화와 군국주의 반대에 기초한 정치적 대안 사이에 갈 라진 국제 여론을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군사적 개입은 전반적 군비축소에 반해 작동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를 불신하게 만들고 약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소련 은 점차 미국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행동하는 제국주의 열강으로 여겨졌다. 미 국은 냉전의 개시 이후 다소 은밀하게 쿠데타를 지원했고, 전 세계 20개국 이상에 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하도록 지원했다. 중소분쟁을 배경으로 1977~1979년 캄보디아와 베트남, 중국과 베트남 사이의 ‘사회주의 전쟁’은 전쟁 을 전적으로 자본주의의 경제적 불균형으로 돌렸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 로기(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제기한 원래의 기초로부터 이미 아주 멀어진)의 모든 권위를 날 려버렸다.

5. 좌파가 된다는 것은 전쟁에 반대하는 것
냉전의 종식은 다른 나라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줄이지도 않았고, 모든 민중이 정치체제를 선택할 자유를 증대시키지도 않았다. 지난 25년 동안 심지어 UN의 위 임도 없이 터무니없이 ‘인도주의적’라고 규정한 수많은 전쟁들과 그밖에 불법 제 재, 정치·경제·언론의 통제 등 새로운 형태의 분쟁은 초강대국을 사이에 둔 세계의 양극 분할로 인해 ‘새로운 세계질서’라는 신자유주의적 주문(mantra)이 약속한 자 유와 진보의 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과거에 좌파의 가치를 내세 웠던 많은 정치세력들이 수많은 전쟁에 참여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NATO 가 수행한 주요한 전쟁만 언급하더라도 코소보에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이 세력은 매번 무장개입을 지지했고, 더욱더 우파와 구별할 수 없도록 행동했다.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한 나라의 주권이 공격받을 때 좌파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의 딜레마에 다시 한번 직면하게 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지 않는 것은 베네수엘라 정부의 정치적 오류이며, 미국이 미래에 자행할 공격 행위에 대한 베네수엘라의 비난이 덜 신뢰성을 갖도록 보이게 한다. 마르크스가 1860년 페르디난트 라살(Ferdinand Lassale)에게 썼듯이, “대외정책에 서 ‘반동적’이나 ‘혁명적’이라는 구호를 사용해 얻을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은 사실 이다. 즉 “주관적으로 반동적인 것이 대외정책에서 객관적으로 혁명적”(Marx, 1860: MECW, Vol.41, pp.154)이다(인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그러나 좌파세력은 20 세기로부터 ‘적의 적과의’(Musto, 2018: 132) 동맹이 비생산적 협정으로 귀결되고, 특히 우리 시대처럼 진보적 전선이 정치적으로 취약하고, 이론적으로 혼란스럽고, 대중투쟁의 지지를 결여하고 있을 때에 더욱 그렇다는 교훈을 배웠어야 했다.

『사회주의 혁명과 민족자결권』에 실린 레닌의 말을 상기해 보자. “한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한 민족해방 투쟁이 특정한 상황 아래에서 동일하게 제국주의적인 이 해를 가진 다른 ‘거대’ 열강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사회민주주의가 민 족자결권의 승인을 비난하도록 하는 데 어떤 비중을 가져서는 안 된다”(Lenin, 1964b: 148). 지정학적 이해와 그 안에서 역시 대부분 작동하는 책략을 넘어 좌파세 력은 역사적으로 민족자결의 원칙을 지지했으며, 인민의 명확한 의지에 기초해 그 들의 국경을 수립할 원칙을 바탕으로 개별 국가의 권리를 수호했다. 좌파는 전쟁 과 ‘병합’이 지배민족과 피억압 민족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극적인 갈등으로 이어 지고, 후자가 전자를 자신의 적으로 간주해 자국의 부르주아지와 단결할 조건을 창출한다는 점을 인식했기 때문에 전쟁과 병합에 반대해 투쟁했다. 『자결에 관한 토론 결과』(1916년)에서 레닌은 이렇게 썼다. “만약 사회주의 혁명이 페트로그라 드, 베를린, 바르샤바에서 승리한다면,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부는 러시아와 독일의 사회주의 정부처럼 폴란드 국가의 국경 내에서 우크라이나인의 ‘강제적 억류’를 비난할 것이다”(Lenin, 1964a: 329~330). 그렇다면 왜 블라디미르 푸틴이 이끄는 민 족주의 정부에 대해 어떤 다른 것을 양보해야 한다고 암시하는가?

다른 한편, 좌파에서 너무나 많은 이들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공동 교전자가 되는 유혹에 굴복해 새로운 신성한 연합(union sacrée: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정부의 전쟁 선택을 승인하기로 결정한 프랑스 좌파세력의 선서를 환영하기 위해 1914년 만들어진 표현)을 부추기고 있다. 오늘날 그런 입장은 더욱 대서양주의와 태평양주의 사이의 구별을 모호하게 한다. 역사는 진보세력이 전쟁에 반대하지 않을 때 존재 이유의 본질적 부분을 상실하여 결국 반대 진영의 이데올로기를 삼키게 된다는 사실을 보 여준다. 이런 일은 좌파 정당이 정부 참여를 정치 행동을 측정하는 근본적 방식으 로 삼을 때마다 일어난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은 코소보와 아프가니 스탄에 대한 NATO의 개입을 지지했고, 오늘날 스페인 좌파(Unidas Podemos)의 다 수는 스페인 의회 전체의 합창에 목소리를 더해 우크라이나 군대에 무기를 보내는 데 찬성했다. 그런 저급한 행위는 상황이 발생하자마자 치러지는 선거를 포함해 과거에 수차례 처벌받은 바 있다.

6. 보나파르트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1850년대 마르크스는 크림전쟁에 관한 훌륭한 일련의 논문을 작성했고, 거기에 는 오늘날과 비교해도 흥미롭고 유익한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19 세기 외교사의 폭로』(1857)에서 러시아를 통일시키고 전제정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여겨지는 15세기 모스크바 군주정에 관해 말하면서 이렇게 진술했다. “단지 일련 의 이름과 날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면 […] 이반 3세의 정책 과 오늘날 러시아의 정책이 단지 비슷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다는 것이 분명해진 다”(Marx, 1986: 86). 그러나 ≪뉴욕 데일리 트리뷴(New York Daily Tribune)≫에 기 고한 논설에서 마르크스는 반러시아 연합을 찬양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들에 반대하면서 이렇게 썼다. “러시아에 대한 전쟁을 자유와 폭정 사이의 전쟁으로 묘 사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한 경우가 사실이라면 자유가 임시로 보나파르트로 대 표될 것이라는 사실과는 별도로, 전쟁의 전체적인 공인된 목표는 […] 비엔나 조약 의 유지이지만, 바로 조약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무효화한다”(Marx, 1980: 228). 보나파르트를 미국으로, 비엔나 조약을 NATO로 바꾸면, 이런 관찰은 오늘의 상 황을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인다.

NATO의 확대만이 아니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에 모두 반대하는 사 람들의 생각은 정치적 우유부단함 또는 이론적 모호성의 증거를 보여주지 않는다. 최근 몇 주 동안 수많은 전문가들이 분쟁의 뿌리에 관한 설명을 제공했고(그것은 결 코 러시아 침공의 야만성을 감소시키지 않는다), 비동맹정책을 제안하는 사람들의 입장 은 가능한 한 조속하게 전쟁을 중지하고 피해자 수의 최소화를 보장하는 가장 효 과적 방식이다. 그것은 추상적 이상주의에 빠진 ‘아름다운 영혼’처럼 행동하는 문 제가 아니며, 헤겔은 그런 사람이 지상의 모순의 실제적 현실에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문제는 전쟁은 무제한적 확대의 유일하고 진정한 해독제에 현실 을 부여하는 것이다. 군비 지출 확대와 추가 징집을 호소하는 목소리 또는 외교 사 안 및 안보정책 고위 대표로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제공 하는 것이 유럽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끝이 없다(Borrell, 2022). 그러나 이 런 입장과 대조적으로, 두 가지 확고한 원칙, 즉 분쟁의 비확대와 독립 우크라이나 의 중립성에 기초해 끊임없는 외교 활동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러시아의 움직임에 따라 NATO에 대한 지지가 늘어났지만, 여론이 세계에서 가장 공격적인 전쟁 기계인 NATO를 전 세계 안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지 않도록 활동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NATO는 위험하고 비효율적인 조직이며, 확 장과 전일적 지배를 추진하면서 전 세계를 전쟁으로 이끌 긴장을 부추기는 조직임 을 보여줘야 한다.

『사회주의와 전쟁』에서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는 “각각의 전쟁을 분리해서 연 구하는 것(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이 역사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 다”는 점에서 평화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계속해서 레닌 은 이렇게 주장했다. “역사에서 수많은 전쟁이 있었고, 모든 전쟁에 불가피하게 수 반하는 모든 공포, 잔혹, 고난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진보적이었다, 즉 인류 의 발전에 혜택을 줬다”(Lenin, 1971: 299). 이 말이 과거에는 진실이었다 해도, 대 량살상무기가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그런 말을 단순히 되풀이 하는 것은 근시안적일 것이다. 혁명과 혼동해서는 안 되지만, 전쟁은 사회주의 이 론가들이 희망하는 민주화 효과를 낸 적이 드물었다. 사실 전쟁은 대부분 인간 생 명의 희생과 그에 수반하는 생산력의 파괴 때문에 혁명을 수행하는 최악의 방법으 로 판명되었다. 사실 전쟁은 폭력 이데올로기를 유포하고 자주 민족주의 감정과 결합되어 노동자 운동을 갈기갈기 분열시켰다. 전쟁이 자주관리와 직접 민주주의 의 실천을 유리하게 했던 적은 드물었고, 그 대신 권위주의적 기관들의 권력을 강 화했다. 이것은 온건한 좌파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된다.

『전쟁에 관한 성찰』(1933)의 가장 풍부한 문구 가운데 하나에서 시몬 베이유는 ‘혁명이 전쟁을 회피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의 견해로는 그것은 우리가 ‘모든 희망을 포기’하길 원하지 않는 경우에 가질 수 있는 ‘박약한 가능성’일 뿐이 다(Weil, 2021[1933], op. cit., p.101). 혁명전쟁은 대부분 ‘혁명의 무덤’으로 바뀐다. 왜냐하면 “무장한 시민에게는 통제 기구 없이, 경찰의 압력 없이, 특별법원 없이, 탈영에 대한 처벌 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단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다른 사회적 현상보다 더 전쟁은 군사, 관료, 경찰 기구를 팽창시킨다. “전쟁은 국가기 구 앞에서 개인의 총체적 소실로 이어진다”. 따라서 “만약 전쟁이 즉각적으로, 그 리고 영구히 종식되지 않으면 […] 그 결과는 마르크스의 말대로 국가의 분쇄 대신 에 국가기구를 완성하는 그런 혁명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또는 더욱 더 명 확하게 “전쟁은 우리가 억압하길 원하는 체제를 다른 형태로 확대하는 것을 의미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쟁이 일어날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톱니바퀴로 전락 시키는 전쟁 기계의 작동을 방해하는 것과 맹목적으로 인간 생명을 말살하는 기계 를 돕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8

좌파에게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문구를 인용하자면,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 한 정치의 계속”이 될 수 없다. 현실에서 전쟁은 정치의 실패를 확인할 뿐이다. 좌 파가 헤게모니를 회복하고 자신이 오늘날의 과제를 위해 자신의 역사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좌파는 부정할 여지없이 자신의 깃발에 ‘반군사 주의’와 ‘전쟁 반대’를 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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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Gangyunju, Hankookilbo

“마르크스, 정치적으로만 소비… 환경ㆍ여성 등 오늘날 문제에 맞닿아”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함께 칼 마르크스(1818~1883)는 ‘한 물 간 사상가’로 인식됐다. 그의 탄생 200주년을 맞은 지난해 한국 학계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마르크스는 그저 과거 인물에 불과한가.

마르크스의 문헌을 연구해온 마“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나서 20년 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숨죽여왔다. 침묵을 깨운 것은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였다. 자본의 위기는 경제를 너머 정치 사회의 모든 분야의 갈등과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이다. 유럽과 중남미, 미국에서 포퓰리즘 정치 세력의 우경화 바람이 불고 있지만, 근본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전 세계 젊은이들이 마르크스를 다시 주목하는 이유다. 보수정권이 집권한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한 마르크스 학술대회에는 정원보다 10배 많은 5,000명의 대학생들이 몰려 행사가 진행되지 못한 일도 있었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구조 관점으로만 사회를 바라봤다.

“명백한 오해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거듭할 수록 생태계를 위협하고, 여성들에 대한 억압과 불평등을 더욱 심화 시킬 것이라 경고했다. 생산량의 증가가 도시화, 공업화로 이어져 환경파괴를 가져올 것이라 우려했다. 특히 가부장제를 역사의 산물이라고 꼬집으며, 한 사회의 진보를 가늠하는 척도는 여성해방이라고 역설했다. 1880년대 쓴 프랑스 사회주의 노동자 강령엔 ‘남녀노동자 모두에게 동일노동 동일임금 지급’을 처음 강조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생태, 환경, 여성 억압에 대한 고민과 맞닿아 있다.”

-마르크스의 말년을 돌아봐야 하는 이유가 있나.

“마르크스 연구자들조차 1867년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을 집필한 이후 죽을 때까지 연구에 손을 놓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말년에 인류학 수학 지리학 등 영역을 확대하며, 자기가 기존에 주장한 이론에 대해 계속 검토하고 의심했다.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로 이어지는 단계적 사회 발전론에 대해서도 말년에 가선 획일적으로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고 부정했다. 모순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지만, 나는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은 ‘자기비판’이라고 본다.”

-마르크스의 새로운 면모는 잘 부각되지 않았다.

“마르크스를 정치적으로만 소비하고 이용하는 탓이다. 한쪽에선 신화로, 한쪽에선 금기로 다뤄지고 있다. 지난해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에 맞춰 중국은 마르크스를 영웅으로 띄웠다. 시진핑 국가 주석의 집권 정당성을 위한 선전도구였다. 반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서 마르크스는 여전히 금기다. 한국도 북한을 의식한 탓인지 연구가 자유롭지 못하다. 마르크스를 교조적 이념 틀에 가두면서 그의 진면목에 대해 알려고 들지 않았다. ”

-한국에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노노 갈등도 심하다. 최저임금도 논란거리다.

“가난한 자들끼리의 전쟁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노동자들끼리의 분열은 자본가들의 세력을 더 강화시킨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연대로 노동자들 간의 실제 차별을 없애는 게 모두에게 이롭다. 최저임금을 올리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경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높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반발에 부딪히면 최저임금이 ‘최대임금’으로 굳어질 수 있고, 자본가들의 착취 또한 더 심화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투쟁은 반드시 필요하다. 마르크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삶의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르셀로 무스토(43) 캐나다 요크대 사회학과 부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양극화와 불평등, 갑질, 금융위기 등 자본주의 병폐가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마르크스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마르크스의 미공개 초고, 발췌 노트 등을 정리하는 국제적 연구 작업인 ‘마르크스와 앵겔스 전집 프로젝트(MEGA TWO•114권 중 현재 70권 발간)’에 참여하고 있는 그는 지난해 마르크스 말년의 삶과 연구 업적을 조명한 ‘마르크스의 마지막 투쟁: 1881~1883년의 지적 여정’이란 책을 냈다. 경상대 SSK 연구팀의 초청으로 최근 한국을 찾은 그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인터뷰 내내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며 마르크스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수명을 다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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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를 읽자!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데올로기는 거의 논란의 여지없이 수용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8년 경제위기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불평등(특히 세계의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 그리고 우리 시대가 겪고 있는 심각한 환경 문제 등은 몇몇 학자들과 경제 분석가들, 정치인들이 다시금 자본주의의 미래와 대안의 필요성에 관한 논쟁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마르크스의 부활”이, 즉 과거에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교조주의와 잘못 연관되어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급속히 묵살되었던 한 저자로의 회귀가 일어나고 있다.

마르크스로의 회귀는 자본주의의 논리와 동학을 이해하는 데에만 필수 불가결한 것이 아니다. 그의 연구는 또한 자본주의를 다른 생산양식으로 대체하기 위한 이전의 사회경제적 실험들이 왜 실패하였는지를 철저하게 검토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도구를 제공한다. 이러한 실패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오늘날 대안을 모색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현재 미국 뉴 헤이븐 예일 대학교의 수석연구원인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 www.iwallerstein.com)은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사회학자 중 하나이며, 마르크스의 현재적 타당성을 논의하기에 가장 적합한 학자다. 월러스틴은 마르크스 저작의 오랜 연구자이며, 그의 연구는 181855일 독일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난 한 혁명가의 이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월러스틴의 저작은 30권이 넘으며, 이 책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1974년부터 2011년까지 4권으로 출간된 『근대세계체제 The Modern World-Syste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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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로 무스토(이하 ‘무스토’) : 월러스틴 교수님. 소위 “현실 사회주의”가 끝난 지 30년이 지난 지금, 카를 마르크스가 지닌 현재를 설명하는 능력에 대한 토론과 학회가 전 세계적으로 열리고 있고, 그에 관한 책들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례적인 일일까요? 아니면 마르크스의 사상은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계속 타당성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이매뉴얼 월러스틴(이하 ‘월러스틴’) : 마르크스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가 있지요. 그를 앞문으로 내다버리면 다시 뒷창문으로 몰래 들어온다. 그런 일이 한 번 더 일어난 겁니다. 마르크스가 여전히 말할 것이 많은 문제들을 우리가 다루어야하기 때문에, 그리고 자본주의에 관한 그의 주장이 대부분의 학자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는 현재에도 의미를 갖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칼럼니스트들과 학자들은 마르크스가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989년에 예견된 것과는 달리 그는 새롭게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죠.

무스토 :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사회에 관한 마르크스의 구상과 거의 무관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에서 그를 해방시켰습니다. 또 소비에트 연방 붕괴에 따른 정치 지형의 변화는 마르크스에게 부여되었던 국가기구의 명목상의 수장 역할로부터 그가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지속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세계에 대한 마르크스의 해석은 무엇입니까?

월러스틴 : 저는 사람들이 세계에 대한 마르크스의 해석하면 떠올리는 한 가지 개념이 바로 “계급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를 현재의 이슈 측면에서 읽으면, 저에게 계급투쟁은 세계 우파(수입면에서 세계 인구의 상위 1%를 대표하는)에 대한 세계 좌파(수입면에서 세계 인구의 하위 80%를 대표하는)의 피할 수 없는 투쟁을 의미합니다. 이 투쟁은 양 진영에 속하지 않은 19%의 인구를 좌지우지합니다. 이는 그들을 어떻게 상대편이 아닌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가에 관한 싸움이지요.

우리는 세계체제의 구조적 위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살아남을 수 없지만, 무엇이 이를 대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저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첫 번째는 제가 “다보스 정신(Spirit of Davos)”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보스 경제포럼의 목표는 사회계급, 착취,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의 양극화라는 자본주의의 극악한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대안이 두 번째 가능성인데 분명히 더 민주적이고, 더 평등한 체제가 그것입니다. 계급투쟁은 무엇이 자본주의를 대체할 것인가 하는 미래에 영향을 주려는 근본적 시도입니다.

무스토 : 중간계급에 관한 선생님의 견해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데 저는 선생님이 세계 인구의 80%라고 말씀하신 그 대중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어떻게 동기화할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집중되어 있고, 지난 수십 년 동안 자본주의에 의해 발생한 불평등이 심각하게 급증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운동이 이전보다 훨씬 약화된 소위 세계 남반구라 불리는 지역에서 특히 시급한 문제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대한 반대가 대개 종교적 근본주의와 외국인 혐오 정당에 대한 지지로 흘러갔습니다. 우리는 이 현상이 유럽에서도 일어나는 것을 점점 더 자주 목도하고 있습니다.
질문은 바로 “마르크스가 이런 새로운 시나리오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가?”입니다. 최근 간행된 연구들은 선생님의 표현을 빌려보자면 다른 “뒷창문”을 여는 데에 기여할 수 있는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갈등을 넘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관한 연구를 다른 영역으로 확장했던 마르크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실 마르크스는 비유럽 사회를 연구하는 데에, 그리고 식민주의가 자본주의 주변부에서 행한 파괴적 역할을 연구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개념을 생산력 발전과 동일시하는 해석과는 달리, 그의 생태학적 관심은 연구 전반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또 마르크스는 학자들이 그에 관해 얘기할 때 대개 무시해온 몇몇 주제들에 관해서도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과학기술이 가진 잠재력,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집단적 소유 형태의 모색,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의 개인적 자유의 필요성 등이 있습니다. 이 모든 주제는 우리 시대를 관통하는 근본적 문제들입니다. 이런 마르크스의 새로운 면모 외에(이에 대한 연구들은 마르크스의 사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선생님이 오늘날 재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마르크스의 가장 뛰어난 견해를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월러스틴 : 우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사회를 조직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설명했습니다. 그가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출판한 『철학의 빈곤 The Poverty of Philosophy』에는 자본주의적 관계가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자연 법칙”이라고 주장한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에 대한 조롱이 담겨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그들이 봉건제에서 부르주아 사회와 확연히 다른 생산관계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옹호하는 생산양식에는 이런 역사적 발견을 적용시키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자연스럽고 영원한 것처럼” 묘사했죠. 저는 『역사적 자본주의 Historical Capitalism』에서 몇몇 주류 정치경제학자들의 모호하고 불명확한 견해를 비판하고,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역사적 자본주의가 아닌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수차례 주장했습니다. 이는 어찌 보면 단순한 것인데, 우리는 이에 대해 마르크스에게 큰 빚을 지고 있지요.
두 번째로는 마르크스의 “시초축적” 개념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토대인 농민으로부터의 토지 수탈을 말합니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부르주아의 지배를 성립시키는 핵심 과정이라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은 자본주의 초기에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가 다룬 “사적 소유와 공산주의”에 관해 숙고해보자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소련에서 형성된 체제에서는, 특히 스탈린 체제 하에서는 국가가 재산을 소유했지만, 이것이 대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했죠. 스탈린이 그랬던 것처럼 일국 내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은, 그 시대 이전에는 마르크스를 포함한 어느 누구에게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한 가지 가능성입니다. 이는 또한 협동조합식으로 소유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누가 생산하고 누가 잉여가치를 가져가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비교해봤을 때 체제가 완전히 재조직되어야 가능합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무스토 : 2018년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라서 새로운 책들과 영화들이 그의 삶을 기리기 위해 나오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생애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기가 있으십니까?

월러스틴 : 마르크스는 매우 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극심한 빈곤과 싸워야 했는데, 이런 가난을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준 프리드리히 엥겔스 같은 동료가 그의 옆에 있었다는 건 행운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정서적으로도 편안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의 삶의 역작, 즉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집필하려고 애쓴 끈기는 가히 경탄할 만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 자신이 하려는 작업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고대에 대해 설명하거나 미래의 사회주의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의하고 싶어 하지 않았죠. 이는 마르크스가 자신에게 부과한 과업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를 이해하기를 원했습니다.

무스토 : 마르크스는 런던 대영박물관의 책들 속에만 파묻혀 있던 학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항상 당대 투쟁에 관여했던 전투적인 혁명가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활동 때문에 그는 젊었을 때 프랑스와 벨기에, 독일에서 추방되었지요. 또 1848년 혁명이 실패했을 때에는 영국으로 망명을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신문과 잡지 등을 발간했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항상 노동운동을 지지했습니다. 이후 1864년부터 1872년까지는 최초의 초국가적 노동계급 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1871년에는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실험인 파리코뮌을 옹호한 바 있습니다.

월러스틴 : 예, 그렇습니다. 마르크스가 보여준 투쟁성은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최근에 무스토 교수가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 Workers Unite!』에서 강조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편리한 의사소통 매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물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노동자 대중의 조직, 즉 국제노동자협회에서 특별한 역할을 했습니다. 마르크스의 정치적 활동에는 저널리즘도 포함됩니다. 그는 더 많은 청중과 소통하기 위해 신문과 잡지에 계속 글을 썼지요. 수입을 얻기 위해 저널리스트로 일하기는 했지만, 그는 이를 정치활동에 기여하는 일로 간주했습니다. 그는 중립적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열성적인 저널리스트였죠.

무스토 :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었던 2017년에 일부 학자들은 마르크스와 20세기에 권력을 잡았던 자칭 마르크스의 추종자들을 대조하는 연구를 다시 진행했습니다. 마르크스와 그들의 주요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월러스틴 : 마르크스의 글들은 명쾌하고, 그의 사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몇몇 해석들보다 훨씬 미묘하고 다채롭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르크스가 분노에 차서 한 말인 “이것이 마르크스주의라면, 확실한 것은 내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거요”를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르크스는 교조적으로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는 많은 이들과는 다르게 세계의 정세 변화에 대처할 준비가 늘 되어 있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주 마음을 바꿨습니다. 그는 세계가 직면하고 있다고 판단한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해결책을 모색했습니다. 그가 여전히 매우 도움이 되고 유용한 안내자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입니다.

무스토 : 마지막으로, 아직 마르크스를 만나보지 못한 젊은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월러스틴 : 제가 청년들에게 무엇보다 하고 싶은 말은 카를 마르크스를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읽지 말고, 그의 글을 직접 읽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마르크스에 대해 많이들 얘기하지만, 실제로 그의 책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는 아담 스미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고전에 대한 2차 문헌만을 읽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고전에 대해 요약해놓은 것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을 절약하고 싶어 하지만, 사실 이는 도리어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흥미로운 사람의 글을 읽어야 하는데, 마르크스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가장 흥미로운 학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지요. 쓴 글의 양이나 분석의 질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고 싶은 제 메시지는, 마르크스를 발견하는 데에 대단한 가치가 있는 만큼 그의 글을 읽고, 읽고, 또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카를 마르크스를 읽으세요!

 

출처: http://sanzinibook.tistory.com/2383?category=173353 [부산에서 책 만드는 이야기 : 산지니출판사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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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Yeob JO, Donga

“불평등 존재하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영원하다”

 

 

해외에서는 마르크스를 기념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따르면 독일 트리어, 영국 맨체스터 등지에서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관련 행사를 연다. 영국 철학자 루퍼트 우드핀 등이 마르크스주의를 그래픽으로 소개한 책을 올해 1월 냈고, 영국의 역사학자 그레고리 클레어스도 지난달 ‘마르크스와 마르크시즘’을 출간했다. 다만 국내 마르크스 연구자들의 학술문화제 ‘맑스 꼬뮤날레’는 격년으로 열리는데, 올해는 열리지 않는 해다.
마르크스주의는 1990년대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한물 간 사상’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기도 했지만 21세기 들어서도 꾸준히 재조명되고 있다. ‘생각하는 마르크스’(북콤마)를 펴낸 백승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동구권이 몰락하고 유럽 좌파 사회운동이 약화되면서 정치적 신념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입지는 좁아졌지만 역으로 사상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되살릴 기회가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자본주의는 그 모습이 시대에 따라 변하면서도 세계를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로 묶어내고 있으며, 그 방식을 본격 연구하기 시작한 인물이 마르크스”라며 “사회를 과학의 분석 대상으로 삼은 마르크스의 업적은 뉴턴이 신학의 세계를 벗어나 물리학으로 우주를 보도록 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자본주의 위기를 분석하는 데 마르크스 경제학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경제무식자, 불온한 경제학을 만나다’(나름북스) 등을 낸 김성구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는 “시장이 최적의 균형을 달성한다는 주류 경제학에는 근본적으로 주기적 경기순환과 공황을 설명하는 이론이 없다”며 “2008년 경제위기가 금융 분야에서 터진 건 과잉자본에 금융화의 길을 터 준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정보기술(IT) 혁명으로 일자리가 사라지는 부작용을 우려하는데, 이는 마르크스가 예견했던 노동의 축출과 이윤율 저하 경향의 연장선에 있다”고 덧붙였다.
최근 국내에 번역 소개된 책 중에는 ‘마르크스 전기’(전 2권·노마드)가 눈길을 끈다. 옛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가 1973년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펴낸 책이다.

마르첼로 무스토 캐나다 요크대 교수가 2016년 쓴 ‘마르크스의 마지막 투쟁’(산지니)도 번역 출간을 앞두고 있다. 17일 개봉하는 영화 ‘청년 마르크스’(감독 라울 펙)는 1844년 아내 예니와 함께 프랑스 망명길에 오른 마르크스가 파리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고 노동운동을 주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백승욱 교수는 “마르크스주의는 프랑스혁명의 이념적인 계승자”라며 “현실의 불평등과 모순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는 페미니즘, 생태주의 등 여러 사상과 대화하며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며 “이 같은 시대의 주요 화두와 결합돼 더욱 활발하게 연구하고 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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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s

Choeng-Lip Chu, Marxism 21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들을 다시 생각한다 에 대한 본 서평에서는 이 책의 저자 무스토가 MEGA2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통해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나 [그룬트리세] 등 마르크스의 주요 저술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과 자본론 제2권 및 제3권에 대한 엥겔스의 편집 작업이 지닌 문제점 등에 대해 전개하는 비판적 논의 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거 치며 교조적 경전으로 왜곡된 마르크스의 이론이 철두철미하게 비판적이고 끊임없 이 논거를 모색하는 열린 텍스트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강조된다. 또한 본 서평은 무스토가 마르크스의 저술에 대한 해박한 문헌학적 지식과 마르크스의 학문적 원칙 에 충실한 비판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을 통해 기존의 교조적이고 독단적인 입장을 예리하게 비판할 뿐만 아니라, MEGA2의 발간이 제기하는 거대한 해석적 과제와 새로운 고민들을 던져준다는 점도 부각한다. 다른 한편 무스토가 마르크스의 정치 경제학 비판을 서술하는 방법에서 그 시작을 이루는 구체물로서의 ‘상품’이 지닌 추상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빠지는 혼란의 문제점이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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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Political Theory to International Relations: New Critical Interpretations of Mar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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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s

지젝 철학이 마르크스적 대안 ? 노동자운동으로부터 너무 동떨어졌다

마르크스학자 마르셀로 무스토, 한국서 강연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란 인간을 위한 사회적 관계 회복 폭주하는 자본주의의 대안 박우진기자 입  마르셀로 무스토는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진짜 마르크스주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흥수기자”마르크스 없는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주의를 모르는 마르크스주의자가 너무 많다.”

이탈리아 출신의 마르크스학자 마르셀로 무스토(37)는 안토니오 네그리, 슬라보예 지젝 등으로 이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마르크스주의 조류가 “진짜 마르크스로부터 너무 멀리 갔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면 지젝 철학이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과 더 관련이 있고 정작 마르크스와 노동자운동의 역사와는 동떨어져 있는데도 마르크스적 대안으로 간주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무스토의 2011년 저서 <마르스크와 마르크스주의들을 다시 생각한다>가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 됐다. 이에 맞춰 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 초청으로 방한한 무스토는 3일 서울 광화문에서 한 인터뷰에서 “마르크스만큼 정치적으로 과도하게 해석된 학자는 없다”며 “역사 속에서 생긴 오해와 실수를 걸러내고 진짜 마르크스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왜 지금 마르크스일까. 무스토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제기된 자본주의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도구로서 마르크스주의는 대단히 유효하다”고 지적했다. 세계는 90년대 초반 소련 붕괴 후 사멸한 듯 보였던 마르크스주의의 대대적 부활을 목도하고 있다. 학계 내부에서만 진행되는 일이 아니다.독일에서는 <자본론>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그리스에 서 급진 좌파 성향인 시리자당이 최대 야당으로 부상했다. 무스토는 “소련만 붕괴하면 세계는 끝없이 발전할 것이라는 정치적 주술, 자본주의가 완벽한 체제라는 믿음이 깨진 자리에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마르크스주의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이것이 공산주의를 지탱했던 소련식 마르크스ㆍ레닌주의의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스토는 “정작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변증법에 중점을 두지도, 평등을 자유와 대립하는 것으로 상정하지도 않았다”고 강조했다.

대 신 그가 제안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에 의한 소외와 상품 물신성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가능성이다. 마르크스가 1864년 창설한 국제노동자협회 ‘제1인터내셔널’에서 시도했던 것이다. 무스토는 “마르크스는 이 조직을 통해 노동자들이 사적 소유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고, 자본의 착취를 피해 노동을 줄이고 남는 시간을 사랑하는 데 쓸 수 있는 체제를 꿈꿨다”며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사회적 관계 회복이 폭주하는 자본주의의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무스토가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를 ‘발굴’해낸 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모든 유고를 망라해 출간 중인 마르크스·엥겔스 전집 (MEGA)이다. 무스토는 이 자료를 검토해, 방대한 원본이 소련 등의 정치적 이해에 의해 축약된 채 정전화된 것이 왜곡된 마르크스주의의 기원임을 밝히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무스토는 자신의 저서가 한국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논의의 불씨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7일까지 국내 대학과 시민사회단체 등을 순회 강연한다. 내년에는 본격적으로 마르크스를 현대에 적용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젠더 등 현대의 첨예한 정치·사회적 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점을 성찰하는 논문 모음집 <마르크스 부활: 현대사회 비판에 관하여>를 출간하는 것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고 에릭 홉스봄 등 당대 최고의 마르크스학자들이 참여한 대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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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rnal Articles

『그룬트리세』의 비판적 해석

서론
1857년, 마르크스는 국제적 차원으로 전개된 금융위기가 유럽 전역에 새로운 혁명 시기를 위한 조건들을 창출했다고 확신했다. 마르크스는 1848년 대중 봉기 이후 줄곧 이 순간을 기다려왔고, 마침내 그때가 온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사건들을 준비 없이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경제학 연구를 재개하고 그 완성 형태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하나? 저 야심차고 어려운, 이전에 여러 차례 시작했다가 중단했던 정치경제학 비판을 어떻게 착수할까? 이것이 마르크스가 다시 작업을 시작하면서 자문했던 첫 번째 물음이었다. 두 가지 상황이 답을 결정할 때 핵심 역할을 했다. 마르크스는 특정 이론들의 유효성에도 불구하고, 경제 과학은 여전히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설명하는 인식 과정이 부족하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작성 작업을 개시하기 전에 논거들을 정하고 설명의 순서를 확립할 필요를 느꼈다. 이런 고려들이 마르크스가 방법 문제들에 더 깊이 파고들고 그의 연구를 위한 길잡이 원리들을 구성하도록 했다. 그 결과물이 마르크스의 전체 저작들(oeuvre) 중에서 가장 널리 논쟁 된 수고들 중 하나인 소위 1857년 ‘서설’이었다.

‘서설’에서 마르크스의 의도는 복잡한 방법론적 논문을 쓰는 것은 분명 아니었고, 독자들 이전에 자신을 위해 앞에 놓여 있는 길고 사건들이 많은 중요한 여정에서 그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1840년대 중반 이후 그가 축적해온 거대한 양의 경제학 연구들을 재검토하는 과제에도 필요했다. 그래서 이 논문에는 이론적 범주들의 전개와 표현에 대한 검토와 함께, 특히 새롭게 역사를 요약하는 데 꼭 필요한 역사개념과 연관된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에 대한 몇몇 정식화들, 그리고 여전히 그 해답이 불완전한 비체계적 질문목록이 담겨 있다.

필요들과 의도들이 혼재돼 있고, 거의 일주일도 안 되는 짧은 시기에 작성한데다 무엇보다도 글의 잠정적 성격 때문에 ‘서설’은 극히 복잡하고 커다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서설’은 마르크스가 인식론적 문제들을 거론한 것 중에 가장 광범위하고 세밀한 의견을 담고 있어서, 그의 사상 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참고 문헌이자 『그룬트리세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다.

역사와 사회적 개인
그의 스타일대로, 마르크스는 ‘서설’에서 그 자신의 사상에 대한 설명과 이론적 반대자들에 대한 비판을 번갈아가며 진행했다. 텍스트는 네 절로 나뉜다.
(1) 생산 일반
(2) 생산, 분배, 교환, 소비 사이의 일반적 관계
(3) 정치경제학의 방법
(4) 생산수단(력)과 생산관계, 생산관계와 유통관계 등(Marx, 1973: 69).

첫째 절은 의도 진술, 곧이어 연구 분야 구체화, 역사적 기준에 대한 지적으로 시작한다. 그 역사적 기준이란 ‘우리가 다룰 대상은 우선 물질적 생산이다. 개인들은 사회속에서 생산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결정된 개인생산이 당연한 출발점이다’. 마르크스의 논쟁 대상은 ‘18세기 로빈슨주의자들’(Marx, 1973: 83), 경제적 인간(homo oeconomicus)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신화(Watt, 1951: 112), 또는 부르주아 시대에 전형적인 현상을 태초부터 존재해 온 모든 다른 사회들에게 투사하는 것이었다. 이런 개념들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어떤 노동과정에서도 고정불변인 것으로, 자본주의 관계만의 특성이 아닌 것으로 표현했다. 마찬가지로, 18세기에 출현하여 ‘이전 역사적 시기들에서는 개인을 고정되고 제한된 인간 집합체의 부속물로 만들었던 자연적 속박으로부터 개인들이 벗어나 보이는’ 조건들을 창출한 시민사회(bürgerliche Gesellschaft)가 항상 존재했던 것으로 그려졌다(Marx, 1973: 83).

실제로는, 고립된 개인은 자본주의 시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 그룬트리세』의 다른 문장에서 적었던 대로, ‘인간은 원래 유적 존재, 씨족적인 존재, 군집 동물로 나타난다’(Marx, 1973: 496). 이 집단성이 ‘거대한 작업장, 노동수단과 노동대상 모두를 공급하는 창고, 보금자리, 공동체의 토대(Basis des Gemeinwesens)'(Marx, 1973: 472)가 되는 지구로부터의 전유를 위한 조건이다. 이런 원시적 관계가 존재할 때, 인간의 활동은 직접적으로 지구와 연관된다. ‘노동이 그 물질적 전제조건들과 자연적 통일’을 이루고, 개인은 타인들과 공생한다(Marx, 1973: 471). 유사하게, 경제의 목적이 아직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를 창조하는 것이었던 농업을 바탕으로 한 이후의 모든 경제 형태들에서 도 개인들이 ‘그들 노동의 객관적 조건들’과 맺는 관계는 ‘코뮨의 구성원이라는 존재를 통해 매개된다’. 그는 항상 사슬의 한 고리일 뿐이다(Marx, 1973: 486). 이런 연관에 대해, 마르크스는 ‘서설’에서 이렇게 쓴다.

더 깊이 역사를 거슬러 가면 갈수록 개인 즉 생산하는 개인은 더 큰 전체에 속하며 매우 당연하게도 가족에, 그리고 가족이 확대된 씨족(Stamm)에, 나중에는 씨족들의 대립과 융합으로 나타난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사회에 의존적인(unselbstständig) 것으로 나타난다(Marx, 1973: 84).

비슷한 의견들이 『 자본론』1권에 나타난다. ‘암흑에 쌓인 유럽의 중세시대’에 대해 말하며,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독립적 인간 대신, 우리는 농노와 영주, 가신과 주군, 평신도와 성직자들, 모두가 의존적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 개인적 의존은 생산의 사회적 관계뿐 아니라 이 생산의
토대에서 조직된 생활의 다른 영역들도 특징짓는다(Marx, 1996: 88).

그리고 마르크스가 생산물 교환의 발생을 검토했을 때, 그는 교환이 다른 가족들, 씨족이나 공동체들 사이의 접촉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왜냐하면, 문명의 맨 처음에, 독립적 입장으로 만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가족, 씨족 등이다’(Marx, 1996: 357). 그래서 기준이 혈족의 원시적 유대든 중세의 주군과 가신의 결합이든, 개인들은 상호 유대에 의해 결합된 ‘제한된 생산관계(bornirterProductionsverhältnisse)’속에 살았다(Marx, 1973: 162).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마르크스가 자연법칙으로부터 도출된 환상이라고 간주한 것에 바탕을 두고 이런 현실을 전도시켰다. 특히 애덤 스미스는 개인들이 사회 밖에서 존재할 뿐 아니라 사회 바깥에서 생산도 할 수 있는 어떤 원시적 조건을 묘사했다. 수렵씨족과 목축씨족들 간의 노동분업이 직업의 전문화를 성취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활과 화살을 만드는데 더 능숙하면 일종의 전사가 되고 나무집을 짓는데 더 능숙하면 일종의 목수가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노동 생산물 중 소비하지 않은 부분을 다른 사람의 잉여와 교환할 수 있게 보장되면서 ‘모든 사람들이 특정 직업을 가지도록 고무했다’(Smith, 1961: 19). 데이비드 리카도는 사회의 원시 단계에서 사냥꾼들과 어부들의 관계를 노동시간으로 대상화된 상품 소유자들 사이의 교환관계로 보는 비슷한 시대착오적 과오를 범했다(Ricardo, 1973: 15; Marx, 1987a: 300).

이런 식으로, 스미스와 리카도는 그들이 살았던 고도로 발전된 사회의 고립된 부르주아 개인의 생산물을 마치 자연의 자생적 표현인 것처럼 묘사했다. 그들의 저작들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연적이라고 규정된’ 신화적이고 영원한 개인으로 그의 사회적 관계는 항상 동일하고, 그의 경제적 행위는 몰역사적 인류학적 성격을 가졌다(Marx, 1973: 83). 마르크스에 따르면, 각각의 새로운 역사적 시대에 대한 해석자들은 항상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이 태고적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착각했다.

마르크스는 ‘사회 바깥의 고립된 한 개인에 의한 생산은 마치 함께 살고 서로 대화하는 개인들 없이도 언어가 발전했다는 주장만큼 어리석은 것이다’라고 주장했다(Marx, 1973: 84). 그리고, 18세기의 고립된 개인을 인간성의 원형으로 ‘역사의 결과가 아니라 역사의 출발점으로’ 묘사했던 사람들에 반대해 마르크스는 그런 개인은 오직 매우 발달한 사회관계와 함께 출현했다고 주장했다(Marx, 1973: 83). 마르크스는 인간이 a ζω´ον πολιτικο´ν (zoon politikon), 즉 사회적 동물인 것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으나, 인간이 ‘오직 사회 내에서만 자신을 개인화할 수 있는 동물’이라고 강조했다(Marx, 1973: 84). 그래서 시민사회는 오직 근대 세계와 함께 출현했고 자본주의 시대의 자유 임금노동자는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친 후에야 나타났다. 사실, 자유 임금노동자는 한편으로는 사회의 봉건적 형태들의 해체, 다른 한편으로 16세기 이후 발전한 새로운 생산력들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Marx, 1973: 83). 마르크스가 너무도 명백하다고 생각한 문제에 대해 반복할 필요를 느꼈던 것은 이전 20년 동안 캐리(Henry Charles Carey), 바스티아(Frédéric Bastiat),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의 저작들이 이와 관련된 토론을 불러왔기 때문이었다. 자본주의적 개인의 발생을 묘사하고 근대 생산은 오직 ‘사회적 발전의 일정한 단계, 즉 사회적 개인들에 의한 생산’에 합치한다는 것을 증명한 후에 마르크스는 두 번째 이론적 요건을 지적한다. 그것은 ‘생산 일반’(Production im Allgemeinem)의 개념에 관하여 고전파경제학자들에 의해 실행된 신비화를 폭로하는 것이다. 생산 일반의 개념은 하나의 추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구체적 단계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범주다. 그렇지만, ‘모든 생산 시대들은 모종의 공통 특질들과, 공통 특성들(gemeinsame Bestimmungen)을 가지므로’, 마르크스는 ‘생산 일반은 그것이 실제로 공통요소를 낳고 고정시키는 한, 하나의 합리적 추상이며’ 그래서 진정으로 그 공통요소들을 불러내고 확정시켜 사고를 통해 현실을 재생산하여 학자에게 쓸데없는 반복을 절약해준다는 것을 인식한다(Marx, 1973: 85).

그래서 추상은 마르크스에게 긍정적 기능을 얻었다. 추상은 더 이상, 그의 초기 헤겔 비판에서처럼 관념주의 철학과 동의어가 아니었고, 그 자체로 현실의 대체물도 아니었으며(Marx, 1975a: 180ff.), 1847년 』철학의 빈곤『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것을 논리적 범주들로 변형시키는 형이상학도 아니었다(Marx, 1976: 163). 이제 그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나중에 명명되는 것처럼)은 확실히 정교해 졌고, 그의 비판적 사고들은 1840년대 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에서 작동하였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추상에 대해 젊은 시절의 편견을 버리고 다시 사고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동시대에 보편적 가치를 지닌 추상적 법칙들의 불가능성을 이론화했던 ‘역사학파’의 대변자들과 달리 마르크스는 『그룬트리세』에서 추상이 인식과정에서 유익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오직 이론적 분석이 모든 역사적 단계들에 유효한 정의들과 특정 시대들에만 유효한 정의들을 구분할 수 있고, 현실을 이해하는데 후자에게 마땅한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때만 가능했다. 비록 추상이 생산의 가장 광범위한 현상들을 표현하는데 유용하였지만, 그 자체로 진정 역사적인 것인 특수한 양상들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만약 추상이 어떤 역사적 실재의 결정적 성격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생산은 특정하고 차별화된 현상이었던 것에서 자기를 표현하는 다양한 형태들의 ‘본질적 다양성’(wesentliche Verschiedenheit)을 숨기는 완전히 자기 동일적인 과정으로 변화된다. 이것이 ‘현존 사회관계의 영원성과 조화’를 주장했던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저지른 잘못이었다(Marx, 1973: 85). 그들의 과정과 반대로, 마르크스는 각 사회경제적 구성을 다른 것들과 구별할 수 있게 하고, 그 구성의 발전에 추동력을 제공하고, 학자들에게 실제 역사적 변화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은 각 사회경제적 구성의 특수한 특징들이라고 주장했다(Korsch, 1938: 78f.).

비록 생산의 일반적 요소들에 대한 정의가 ‘여러 차례 분할되었고 다른 결정요소들로 나뉘며’ ‘일부는 모든 시대에 속하고 다른 것들은 오직 몇몇 시대에만 해당되지만’ 그 보편적 구성요소들 중에 인간노동과 자연에 의해 제공되는 물질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Marx, 1973: 85). 왜냐하면, 생산하는 주체와 노동 대상이 되는 객체 없이 생산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세 번째 생산의 일반적 전제조건을 도입했다. ‘이전에 축적된, 과거 노동의 생산물, 다시 말하면, 자본이다(Mill, 1965: 55). 이 마지막 요소에 대한 비판은 마르크스가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근본적 한계라고 생각하는 것을 드러낼 때 핵심적이었다. 만약 인간이 손만 있고 노동 도구가 없다면 또는 원시적 인간의 반복적 활동만 있고 축적된 과거 노동이 없다면, 노동 도구가 없는 생산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은 마르크스에게 명백해 보였다. 자본은 과거 노동이고 생산의 도구라는 것을 동의했지만, 마르크스는 스미스,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이 그것이 항상 존재했었다고 결론 내리지는 않았다.

이 점은 『그룬트리세』의 또 다른 절에서 매우 자세히 제시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영원한’ 것으로서의 자본 개념은 자본의 본질적인 ‘형식적 규정’(Formbestim-mung)을 고려하지 않고 자본을 오직 물질로 취급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에 따르면,

자본은 모든 형태의 사회에 존재했어야 했고, 전적으로 초역사적인 어떤 것이다. … 그러면 팔, 특히 손이 자본이다. 자본은 인류만큼 오래된 어떤 것에 대한 새로운 이름일 뿐이다. 왜냐하면 가장 미발전된 수렵, 어로 등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노동이 이전 노동의 생산물이 직접적 살아있는 노동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 만약 그렇게 자본의 특정 형태는 추상되어 버리고 오직 내용만 강조된다면 … 당연히 자본이 인간의 모든 생산에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다. 그 입증은 바로 인간 생산의 특수하게 발전된 역사적 단계의 특정 계기(Moment einer besondersentwickelten historischen Stufe der menschlichen Production)를 만드는 구체적인 측면들로부터의 추상(Abstraktion)에 의해 진행된다(Marx, 1973: 257–258).

이 문장에서 마르크스는 추상을 부정적 의미에서 언급한다. 추상하는 것은 실제 사회적 조건들을 제거하는 것이고 자본을 관계라기보다 사물로 생각하는 것이며 그래서 잘못된 해석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서설’에서 마르크스는 추상적 범주들의 사용을 수용하는데 그러나 오직 일반적 측면의 분석이 특수한 측면을 제거하지 않거나 전자와 후자의 구별을 흐리게 하지 않는 한에서 사용한다. 만약 ‘자본을 단지 생산 도구로서 물리적 속성으로만 여기고’ 반면에 생산 도구를 자본으로 만드는 경제적 형태(ökonomischen Form)를 완전히 무시'(Marx, 1973: 591)하는 잘못을 범한다면, ‘진정한 차이를 파악하는데 완전히 무능’하게 될 것이고 ‘단지 다른 이름들을 갖는 하나의 단일한 경제적 관계만 존재한다’는 믿음에 빠지게 된다(Marx, 1973: 249). 사회적 관계에서 표현된 차이들을 무시하는 것은 모든 것의 결절점인 특수한 차이성differentia specifica를 추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서설’에서 마르크스는 ‘다시 말해, 만약 내가 그 자체로 “생산 도구”와 “저장된 노동”을 자본으로 만드는 바로 특수한 질을 버린다면’, ‘자본은 자연의 일반적(allgemeines)이고 영원한 관계다’라고 썼다(Marx, 1973: 86).
사실, 마르크스는 이미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역사적 감각의 결여를 『철학의 빈곤』에서 비판했다.

경제학자들은 어떤 단일한 진행 방법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제도,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만 있다. 봉건제도들은 인공적인 제도이고 부르주아지 제도들은 자연적 제도다. 이런 점은 똑같이 두 가지 종류의 종교를 확립하는 신학자들과 닮았다. 자기들의 것이 아닌 모든 종교는 인간의 발명품이고 반면 자기들의 것은 신이 준 것이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현재의 관계들 – 부르주아 생산관계들 – 을 자연적이라고 할 때 그들은 그 속에서 부가 창조되고 생산력이 발전하는 부르주아 생산관계가 자연법칙과 일치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래서 이 관계들은 그 자체로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연법칙이다. 그것들은 사회를 지배해야 할 영원한 법칙이다. 그래서 역사는 있었지만, 더 이상의 역사는 없다(Marx, 1976: 174).

이런 주장을 그럴듯하게 하기 위해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탄생에 앞섰던 역사적 환경들을 자본주의적 특징들을 가진 ‘존재 자체의 결과’로 묘사했다(Marx, 1973: 460). 마르크스가 『그룬트리세』에 적었던 대로,

자본을 영원하고 자연적인(역사적이 아닌) 생산의 형태로 간주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은 이제 자본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본이 되기 위한 조건을 자본이 현재 실현되는 조건으로 정식화함으로써 즉, 자본가들이 아직 자본가가 되는 중이기 때문에 비자본가를 전유하는 순간을 자본가가 자본가로서 전유하는 바로 그 조건이라고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Marx, 1973: 460).

역사적 관점에서 본 마르크스와 고전 경제학자들 사이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마르크스 입장은 ‘자본이 세계를 태초부터 움직인 것이 아니라 자본이 생산과 생산물들을 그 자신의 과정 아래 종속시키기 이전부터 자본이 이미 존재하는 생산과 생산물들을 대면했다는 것이다'(Marx, 1973: 675). 왜냐하면,

새로운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무에서 발전하지 않고, 하늘에서 떨어지지도 않고, 자기 정립적인 관념의 자궁에서부터가 아니라 현존하는 생산의 발전과 그리고 전해져 내려온 전통적인 소유관계 내부로부터 그리고 그 대립물에서 발전해 나온다(Marx, 1973: 278).

유사하게, 생산하는 주체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는 환경은 추상노동(자본과 살아 있는 노동 사이의 교환을 위한 필수 요건)을 수행할 수 있는 무산 노동자를 자본가들이 발견할 수 있게 허용하는데, 이것은 ‘자본과 임금 노동의 원천이 되는 역사를 형성’(Marx, 1973: 489)하는 과정의 결과로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에 대해 침묵한다.

『그룬트리세』의 여러 문장들은 경제학자들이 역사적 현실을 자연적 실재로 묘사하는 방법을 비판한다. 예를 들면, 마르크스에게 화폐가 역사의 생산물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금이나 은의 자연적 속성 그 자체가 화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사회적 발전의 정확한 계기에 처음으로 획득한 단지 하나의 결정인 것이다(Marx, 1973: 239). 신용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대부와 차입은, 고리대금처럼, 여러 문명들에 공통적인 현상이었지만 일이 산업 노동, 자유 임금노동이 아니듯이, 이러한 대부와 차입 그 자체가 신용은 아니다. 발전된 생산관계에서 핵심적인 신용은 역사적으로 오직 자본에 근거한 유통에서만 나타난다’(Marx, 1973: 535). 가격과 교환 또한 고대사회에 존재했지만, ‘모든 생산관계에 대한 교환의 점증하는 지배와 생산비용이 점점 더 가격을 결정하게 되는 것은 오직 부르주아 사회, 자유경쟁 사회에서만. … 완전히 발전한다’. ‘아담 스미스가, 진정한 18세기 방식으로 말했던, 전(前)사의 시기, 역사 이전 시기는 오히려 역사의 산물이다’(Marx, 1973: 156). 게다가 그가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역사 감각 결여를 비판했던 것과 꼭 같이 마르크스는 프루동과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임금 노동으로 발전하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고, 교환가치가 자본으로 변화되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으며, 자본가 없는 자본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사회주의자들을 조롱했다(Marx, 1973: 248). ‘서설’ 첫 부분에서 마르크스의 주요한 목적은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적 특수성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가 『자본론』3권에서 다시 주장했던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절대적 생산양식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 일시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Marx, 1998: 240).

이 관점은, 노동과정과 그것의 다양한 특성들을 포함한 많은 질문들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룬트리세』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사회발전의 특수한 역사적 단계에 속하는 사상에 사로잡혀서 그들에게는 사회적 노동력 객체화의 필연성이 그 노동력 소외의 필연성과 분리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난다(Marx, 1973: 832).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이 특수한 형태들이 마치 그 자체로 불변하는 생산과정인 것처럼 제시되는 것을 반복해서 문제 삼았다. 임금노동을 생산의 특수한 역사적 형태의 명확한 관계로가 아니라 인간 경제적 존재의 보편적 실재로 묘사하는 것은 착취와 소외가 항상 존재했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의 특수성을 회피하는 것은 인식론적, 정치적 영향들 모두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그것은 생산의 구체적 역사적 수준들을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조건들을 변하지 않고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함으로써, 자본주의 생산을 생산 일반으로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 관계들을 자연적인 인간관계들로 표현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이런 이론들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 가치를 지녔다. 현실을 이해하는 데서 역사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뿐 아니라 다른 한편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불변성이라는 도그마를 논박한다는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졌다. 자본주의 질서의 역사성을 증명하는 것은 또한 그것의 일시적 성격과 제거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서설’의 첫 번째 부분에 담겨 있는 사상들의 메아리는 『자본론』3권의 마지막 페이지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데, 여기서 마르크스는 ‘사회적 생산과정을 단순 노동과정과 동일시하는 것’은 ‘혼동’이라고 썼다(Marx, 1998: 870). 왜냐하면,

노동과정이 오로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일 때는, 그것의 단순한 요소들은 발전의 모든 사회적 형태들에 공통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과정 각각의 특수한 역사적 형태는 자신의 물질적 기반과 사회적 형태들을 더욱 발전시킨다. 특정 성숙 단계에 도달했을 때마다 이 특수한 역사적 형태는 버려지고 더 고도의 형태를 향해 나아간다(Marx, 1998: 870).

자본주의는 인간 역사의 유일한 단계도 아니고, 마지막 단계도 아니다. 마르크스는 그것이 ‘공동의 생산’(gemeinschaftliche Production)에 근거한 사회 조직으로 계승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안에서는 노동 생산물은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일반적’이다(Marx, 1973: 172).

총체성으로서 생산
‘서설’의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마르크스는 생산에 대한 더 깊은 사고를 전개하며 다음과 같은 정의로 시작한다. ‘모든 생산은 한 개인으로서는 어떤 특수한 사회 형태(bestimmten Gesellschaftsform) 내에서의 그리고 그 사회 형태를 통한 자연의 전유(Aneignung)다’(Marx, 1973: 87). ‘생산 일반’은 없다. 왜냐하면 생산은 농업, 목축업, 제조업 그리고 다른 분야들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산을 ‘단지 특수한 생산’으로 고려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생산은 ‘생산 부문들의 보다 크고 넓은 총체성 속에서 활동하는 하나의 사회적 본체(Gesellschaftskörper), 사회적 주체(gesellschaftliches Subject)’였다(Marx, 1973: 86).

여기서 다시 마르크스는 경제이론의 주요 권위자들과의 비판적 만남을 통해 그의 주장들을 발전시켰다. 마르크스와 동시대의 경제학자들은 그들의 저작들에서 생산의 일반적 조건들과 다양한 사회들에서 생산성을 향상시킨 환경들에 대해 언급하며 서문을 시작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마르크스에게 이런 예비 작업들은 ‘따분한 동어반복’일 뿐이었다(Marx, 1973: 86). 존 스튜어트 밀의 경우 ‘생산은 역사와 독립된 영원한 자연법칙에 둘러싸인 것으로’ 그리고 부르주아 관계들을 ‘그 위에 추상에서 사회가 건설되는 불가침의 자연법칙’으로 표현했다(Marx, 1973: 87). 밀에 따르면, ‘부의 생산 법칙들과 조건들은 물리학적 진리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 부의 분배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오로지 인간 제도의 문제다’(Mill, 1965: 199). 마르크스는 이것을 ‘생산과 분배 그리고 그들 사이 진정한 관계에 대한 저열한 분리’라고 보았는데(Marx, 1973: 87), 왜냐하면,『그룬트리세』의 다른 부분에서 적었던 것처럼, ‘부를 생산하는 “법칙과 조건들”과 “부를 분배”하는 법칙들은 형태만 다른 똑같은 법칙이고 둘 모두 똑같은 역사적 과정을 밟으며 변하며 그 자체들로 단지 역사적 과정의 계기들일 뿐이다’(Marx, 1973: 832). 이 점들을 지적한 후, ‘서설’의 둘째 절은 생산과 분배, 교환, 소비의 일반적 관계를 검토하는 데로 나아간다. 정치경제학의 이런 분할은 제임스 밀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그는 이 네 가지 범주들을 1821년의 그의 책,『정치경제학 요강』의 네 개 장의 제목으로 사용했다. 그전에는 장 바티스트 세이가 1803년에 자신의 책『정치경제학 개론』을 부의 생산, 분배, 소비에 관한 세 권으로 나눈 바 있다.

마르크스는 네 항목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헤겔의 보편-특수-개별의 도식에 일치시켜 논리적 방식으로 재구성했는데 ‘생산, 분배, 교환, 소비가 규칙적 삼단논법(syllogism)을 형성한다. 생산은 보편이고, 분배와 교환은 특수이며, 소비는 개별로서 그 안에서 전체가 결합된다’. 다른 말로 하면 생산은 인간 활동의 출발점이고 분배와 교환은 이중의 매개점인데 전자는 사회에 의해 작동되는 매개 후자는 개인에 의해 작동되는 매개가 되며 소비는 종착점이 된다. 그렇지만 이는 단지 ‘피상적 일관성’이었으므로 마르크스는 네 영역들이 각각 어떻게 상호 연관되어 있는 지 보다 깊게 분석하고자 했다(Marx, 1973: 89).

그의 첫 번째 탐구 대상은 생산과 소비 사이의 관계였는데 마르크스는 이를 즉각적 동일성의 하나로 설명했다. ‘생산은 소비’이고 ‘소비는 생산이다’. 규정은 부정(determinatio est negatio)이라는 스피노자의 원리의 도움으로 마르크스는 생산적 행동이 원료뿐 아니라 개인의 능력을 소모하는 한 생산은 또한 소비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Spinoza, 1955: 370). 실제로 경제학자들은 이미 이런 측면을 ‘생산적 소비’라는 용어로 강조했고 이를 ‘소비적 생산’과 구별했다. 후자는 오직 생산물이 분배되고 재생산의 영역에 재투입되면서 ‘진정한 소비’를 이루면서 발생했다. 생산적 소비에서는 ‘생산자가 자신을 객체화하고’, 반면 소비적 생산에서는 ‘그가 창조한 물건이 자신을 인간화 한다’(Marx, 1973: 90–91). 생산과 소비의 동일성의 또 다른 특성은 그들 사이에서 발전된 상호간 ‘매개적 운동’에서 인식될 수 있다. 소비는 생산물에게 그 ‘최종 완성’을 주고, 생산 성향을 자극함으로써 ‘새로운 생산에 대한 필요’를 창출한다(Marx, 1973: 91). 같은 방법으로 생산은 소비를 위한 대상뿐 아니라, ‘물질에 대한 어떤 욕구’를 제공한다. 자연적 직접성의 단계를 넘어서면 욕구는 대상 자체에 의해서 발생 된다. ‘생산은 주체를 위한 대상뿐 아니라 그 대상을 위한 주체’ 즉, 소비자를 ‘창조한다’(Marx, 1973: 92). 그래서,

(1) 소비를 위한 물질을 창조함으로써, (2) 소비 방법을 규정함으로써, (3) 원래는 대상이었던 생산물을 소비자가 필요의 형태로 느끼게 하는 생산물로 창조함으로써 생산은 소비를 생산한다. 따라서 생산은 소비의 대상, 소비의 방법, 소비의 동기를 만들어 낸다(Marx, 1973: 92).

요약하면 생산과 소비 사이에 매개 되지 않은 동일성 과정이 존재한다. 생산과 소비는 또한 교대로 서로를 매개하고 서로가 실현됨에 따라 서로를 창출한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예를 들어 세이와 프루동처럼 두 가지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최종 분석에서 ‘긴급으로서, 필요로서 소비는 그 자체로 생산적 활동의 고유한 계기이기 때문이다’.그다음 마르크스는 생산과 분배의 관계에 대한 분석으로 전환한다. 마르크스는 분배는 생산과 소비의 고리이고, ‘사회적 법칙에 따라’ 생산물들의 얼마나 많은 몫이 생산자들에게 돌아가는지를 규정한다고 썼다(Marx, 1973: 94). 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분배를 생산으로부터 자율적인 영역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논문들에서 경제적 범주들은 항상 두 가지 방식으로 제기된다. 생산에서는 토지, 노동, 자본이 분배의 대리인들로 나타나고, 반면 분배에서는 지대, 임금, 이윤의 형태로, 소득의 원천들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이런 분리에 대해 환상이고 잘못이라고 평가하며 반대한다. 왜냐하면 분배의 형태는 다를 수도 있는 ‘임의적 배열이 아니라 그것은 생산 형태 그 자체에 의해 정해진 것이다’(Marx, 1973: 594). ‘서설’에서 그는 이렇게 그의 생각을 표현한다.

임금 노동의 형태로 생산에 참가하는 개인은 생산의 결과, 생산물들의 몫을 임금의 형 태로 받는다. 분배 구조는 완전히 생산 구조에 의해 규정된다. 오직 생산의 결과들만 분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생산의 대상 측면뿐 아니라 생산에 대한 특정한 형태의 참여가 분배의 특정 형태 즉 분배의 참가 양상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 형태 측면에서도 분배는 생산의 산물이다. 생산에서 토지를, 분배에서 지대를 상정하는 것 등은 전적으로 환상이다(Marx, 1973: 95).

분배를 생산에서 자율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들은 분배를 단지 생산물들의 분배로 생각했다. 현실에서는 분배는 생산에 선행하는 두 가지 중요한 현상들을 포함했다. 생산 도구들의 분배와 다양한 종류의 생산들에 사회 구성원들을 분배하는 것 즉 마르크스가 ‘특수한 생산관계 아래 개인들의 종속’이라고 정의한 것(Marx, 1973: 96)이다. 이 두 가지 현상들은 어떤 역사적 사례들에서는 예를 들면 정복한 인민들이 정복당한 인민들을 노예 노동에 종속시킬 때나 혹은 소유 토지의 재분할이 생산의 새로운 형태를 발생시킬 때(Marx, 1973: 96)는 ‘분배가 생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분배에 의해 생산이 구조화되고 규정된다’(Marx, 1973: 96)는 것을 의미했다. 두 가지는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왜냐하면 마르크스가『그룬트리세󰡕의 다른 곳에서 지적했듯이 ‘이 분배양식들은 생산관계 자체이지만 그러나 분배의 외양을 띤 것(sub specie distributionis)이다’(Marx, 1973: 832). 그래서 ‘서설’의 문구에 따르자면 ‘생산을 검토하면서 한편 생산 내부의 내재적인 분배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명백히 공허한 추상이다’.

마르크스가 생산과 분배의 연결을 이해한 것은 마르크스가 왜 존 스튜어트 밀이 이 둘을 엄격히 분리시킨 것을 혐오했는지 뿐 아니라 ‘근대 생산의 특수한 사회적 구조를 파악할’ 필요를 제기했던 리카도에 대한 그의 인정도 해명해준다(Marx, 1973: 96). 이 영국 경제학자는 실제 ‘분배를 규제하는 법칙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경제학의 근본적 문제’라고 주장했고(Ricardo, 1973: 3), 그래서 그는 분배를 주요 연구 대상들 중 하나로 정했다. 왜냐하면 ‘리카도는 분배 형태들을 어떤 주어진 사회의 생산 행위자들이 처하는 가장 분명한 표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Marx, 1973: 96). 마르크스에게도 역시 분배는 총 생산물의 몫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분배되는 행위로만 제한되지 않는 것이었다. 분배는 전체 생산 순환에서 하나의 결정적 요소였다. 하지만 이런 확신이 생산이 전체 생산과정 내에서 항상 가장 중요하다는 그의 테제를 뒤집지는 않았다.

분배와 생산 사이의 관계 문제에서 결정적인 것은 명백히 생산 자체 내에 속한다. … 생산은 실제 생산의 계기들을 형성하는 결정요인들과 전제조건들을 가진다. 처음에는 이것들은 자생적이고 자연적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산과정 자체에 의해 결정요인들과 전제조건들은 자연적인 결정요인에서 역사적인 결정요인들 전환되고 만약 그것들이 어떤 시대에는 생산의 자연적 전제조건들처럼 보일지라도 다른 시대를 위한 역사적 산물이었다(Marx, 1973: 97). 따라서 마르크스에게는 생산 도구들과 다양한 생산 부문들에 사회 구성원들을 분배하는 것이 ‘새로운 생산 시대의 전제조건들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분배는 … 그 자체로 생산의 산물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적 생산의 산물일 뿐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생산양식의 산물이다’(Marx, 1973: 98).

마르크스는 마지막으로 생산과 교환 사이의 관계를 검토했는데 그는 교환 또한 생산의 부분으로 여겼다. 노동력 사이의 ‘활동과 능력들의 교환’ 그리고 최종 생산물을 위해 필요한 원료들의 교환과 생산의 내부적 부문들 사이의 교환뿐만 아니라 상인들 사이의 교환 역시 완전히 생산에 의해 결정되고 ‘생산 활동’을 구성했다. 교환은 오직 ‘생산물이 직접 소비를 위해 교환되는’ 국면에서만 생산으로부터 자율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교환의 강도, 규모, 특징적 성격들은 생산의 발전과 구조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모든 계기들에서 … 교환은 직접적으로 생산에 포함되거나 혹은 생산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생산이 분배, 교환, 소비와 맺는 관계에 대한 분석 마지막에, 마르크스는 두 가지 결론들을 내린다.

1. 생산은 하나의 총체성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2. 그 총체성 내의 하나의 특정 부문으로서의 생산이 다른 요소들을 지배한다.

첫 번째 결론에 관해서 마르크스는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생산, 분배, 교환, 소비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모두 총체성의 구성원이고 통일성 내에 차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Marx, 1973: 99). 헤겔주의 총체성 개념 을 사용하여 마르크스는, 이론적 도구를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사용한 제한된 추상과정보다 더 효율적인 것으로 강화하여 총체성 내의 부분들 사이의 상호 행동에 의하여 구체는 여러 결정요인과 관계들의 차별화된 통일성(Hall, 2003: 127)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고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분리된 네 영역이 자의적이고 실제 경제 관계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개념에서, 유기적 총체성으로서 생산의 정의는 그 내에서 그 다양한 분야들 사이에서 일치성을 항상 보장하는 어떤 구조화된, 자기 규제적인 전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정반대로, 마르크스가 같은 주장을 다루면서『그룬트리세』의 한 부분에서 적었던 대로 생산의 개별적 계기들은 ‘서로를 발견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서로 균형을 맞출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서로에게 조응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서로에게 속하는 내적 계기들의 필연성, 그리고 그것들의 서로 간을 향한 무관심하고 독립적인 실재는 이미 모순들의 근거다’. 마르크스는 그 모순들을 생산 일반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에 관련하여 분석하는 것이 항상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는데 자본주의 생산은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결코 ‘생산력 발전의 절대적 형태’가 아니었고 과잉생산이라는 ‘근본적 모순’을 지니고 있었다(Marx, 1973: 415).

마르크스의 두 번째 결론은 생산을 ‘생산의 총체성(otalität der Production)에서 다른 부분들’에 대한 ‘지배적 계기’(übergreifende Moment )로 만들었다(Marx, 1973: 86). 생산은 ‘과정이 항상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되돌아오는’ ‘진정한 출발점’(Ausgangspunkt )이고 그래서 ‘특정 생산은 이 다른 계기들 사이의 관계들을 규정할 뿐 아니라 특정 소비, 분배, 교환을 규정한다’(Marx, 1973: 99). 그러나 그런 우위는 다른 계기들의 중요성이나, 다른 계기들이 생산에 미치는 영향력을 없애지 않았다. 소비의 규모, 분배의 변형들, 교환 영역 혹은 시장의 크기 모두가 결합하여 생산을 규정하고 생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었다.

여기에 다시 마르크스의 통찰은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가치를 모두 지녔다. 유통의 도구를 변형시킴에 의해 지배적 생산관계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던 그 시대의 다른 사회주의자들에 반대하여 마르크스는 이런 주장은 ‘생산관계, 분배관계, 유통관계 사이의 내적 연관’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이해’를 명확히 보여준다고 주장했다(Marx, 1973: 122). 왜냐하면 화폐 형태에서의 어떤 변화는 생산관계와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다른 사회관계들을 변경하지 않은 채 남겨둘 뿐 아니라 유통은 오직 생산관계의 변화와 함께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난센스임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사회의 악은 은행들의 ‘변형’, ‘합리적 화폐체계’ 건설, 무료 신용을 보장하는 맹목적 임시처방, 노동자들을 자본가들로 전환시키는 망상(chimera)으로 교정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Marx, 1973: 134). 핵심 문제는 임금 노동을 극복하는 것이고 최우선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과 관련된 것이었다.

방법을 찾아서
마르크스는 이 지점에서 중요한 방법론적 문제를 다루었다: 어떻게 현실을 사고에서 재생산할 것인가? 어떻게 사회를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 모델을 구성할 것인가? 그의 ‘서설’에서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은 ‘과학적 표현과 실제 운동 사이의 관계’에 할애됐다(Marx, 1973: 86). 그렇지만, 그것은 확정된 사고가 아니었고 이 문제를 이론화하는 아직 불충하게 발전된 방식을 제공할 뿐이고 단지 몇몇 의견들을 스케치하는 것이다. 어떤 문장들은 때때로 서로 모순되는 불명료한 주장들을 담고 있는데, 한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헤겔주의 용어법에 영향받은 언어를 사용하여 글의 애매모호함을 더한다. 마르크스는 이 대목을 쓸 때 그의 방법을 정교화하려고 했었고, 따라서 이 대목은 그 탐색의 자취와 궤적들을 보여준다.

이전의 위대한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는 어디서 출발할 것인지의 문제, 또는 그의 경우, 정치경제학에서 분석의 출발점은 무엇이 되어야 하나에서 시작했다. 그가 검토한 첫 번째 가정은 ‘실제 전제조건을 가진 현실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전 사회적 생산 행위의 토대이자 주체’인 인구에서 시작한다는 가정이었다(Marx, 1973: 100).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의 창설자들인 페티(William Petty)와 보아규베르(Pierre de Boisguillebert)가 취했던 이 경로는 불충분하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구와 같이 비규정적 실체로 시작하는 것은 전체에 대해 지나치게 포괄적 이미지를 포함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면 계급으로 분할(부르주아지, 지주, 프롤레타리아트)을 보여주지 못하게 될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이 계급들은 오직 그들 각각의 토대들인 자본, 토지 소유, 임금 노동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만 구별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본, 토지 소유, 임금 노동과 같은 것에 대한 경험적 접근은, 국가 같은 구체적 요소들을 노동 분업, 화폐 또는 가치 같은 추상적 규정들로 분해시킬 것이었다. 비록 이 방법이 현실 해석을 위해서는 불충분하다고 판단했음에도 불구하고,『그룬트리세』의 다른 부분에서 마르크스는 ‘이 방법은 정치경제학의 시초의 잠정적 단계들에서 역사적 가치를 가졌다’고 인정했는데, ‘그때는 경제 형식들이 내용들에서 여전히 힘들여 벗겨져 나와야 했고, 많은 노력을 들인 대가로 적절한 연구 대상이 정해졌다’(Marx, 1973: 853).

18세기 경제학자들이 그들의 추상적 범주들을 정의하자마자 ‘경제학적 체계들이 시작되었는데, 그 체계들은 노동, 노동 분업, 필요, 교환가치 같은 단순한 관계들로부터 국가, 국가들과 세계시장에서의 교환이라는 수준으로 상승했다’. 경제학에서 스미스와 리카도에 의해 전개된 이 절차는, 철학에서 헤겔에 의해서도 적용되었는데 이 주장은 ‘사고를 통해 추상적 규정들이 구체적인 것의 재생산으로 나가게 된다’는 테제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wissenschaftlich richtige Methode)이라고 묘사한 것이다. 올바른 범주들이 있다면, ‘여정을 되밟아서 결국 인구에 다시 도달하게 되는 것’이 가능한데, ‘이제는 전체에 대한 혼란스런 개념이 아니라 여러 결정요인들과 관계들의 풍부한 총체성으로서’다(Marx, 1973: 100–101). 사실, 헤겔은『논리학』에서 종합적이고 체계적 과학을 위한 첫째 필수조건은 [다음으로] 시작하는 것이라고 썼었다.

하나의 보편적 형태의 주제로 [시작하는 것이다] … 앞부분(prius)의 것은 반드시 … 단순한 것, 구체로부터 추상된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형태에서는 주제가 그 스스로 동일한 보편성의 형태를 갖기 때문이다. … 추상적 단순 사고 결정을 인식하는 것이 구체적 주제보다 더 쉬운데, 그 구체적 주제는 그런 사고 결정요인들과 그 결정요인들 간 연관들의 다층적 연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그 보편성은 즉자 그리고 대자적으로 개념의 첫 번째 계기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 계기이기 때문이고, 특수자는 오직 보편자에 후속하는데 왜냐하면 특수자는 매개된 계기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단순한 것이 더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것은 이미 보편적인 것으로부터의 변형을 전제한다(Hegel, 1969: 800).

‘서설’에 대하여 일부 논평자들이 주장했던 것과 반대로, 마르크스의 ‘과학적으로 올바른 방법’의 정의대로 마르크스 자신이 모든 이후 작업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다(Marx, 1973: 101). 무엇보다, 마르크스는 관념 수준에서 구체적인 것을 논리적으로 재구축하는 것이 현실의 충실한 복제라는 고전파 경제학자들의 확신을 공유하지 않았다(Dal Pra, 1965: 461). ‘서설’에서 종합적으로 제시된 방법은 헤겔의 방법에서 다양한 요소들을 빌려왔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그 방법은 또한 커다란 차이들을 보여준다. 그 이전 시대의 헤겔 같이, 마르크스는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상승은 사고가 구체적인 것을 전유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사고에서 현실의 재구성은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일반적인 결정요인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더욱이 두 사람 모두 구체적인 것은 ‘많은 결정요인들의 집적이고, 그래서 다양한 것의 통일’이었다. 비록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것은 ‘관찰(Anschauung)과 개념화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 항상 필수적이라고 여겼지만 구체는 사고에서 ‘출발점이 아닌 집적 과정으로, 결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이런 공통 기반을 넘어서면 ‘헤겔이 실재하는 것을 사고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환상에 빠졌던’ 반면, 마르크스는 ‘사고는 결코 구체적인 것 스스로가 존재하게 되는 과정이 아니’라고 본 차이점이 있었다. 마르크스가 주장하길, 헤겔적 관념주의에서, ‘범주들의 운동은 실제 생산 행위로 나타난다. … 범주들의 운동이 세계를 생산했다’. ‘개념적 사고가 실제 인간 존재’ 이고 ‘그래서 개념적 세계 자체가 유일한 현실’로, 관념들로 실제 세계를 표현할 뿐 아니라 관념들이 세계의 구성 과정으로 작동한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경제적 범주들이 ‘이미 주어진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전체 내에서 추상적 관계[들]로서’ 존재한다(Marx, 1973: 101). 이 범주들은 ‘존재의 형태들, 실존의 결정요인들(Daseinsformen, Existenzbestimmungen)을 표현한다’(Marx, 1973: 106). 예를 들어, 교환가치는 인구와 그 인구가 규정된 관계들 속에서 생산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마르크스는 헤겔에 반대하여, ‘사고의 총체성이자 구체적 사고인 구체적 총체성은 사실 사고행위와 이해하기의 산물이지만,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생각하고 생성하는 개념의 산물은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왜냐하면 ‘실제 주체는 이전과 꼭 같이 두뇌 바깥에 자신의 자율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 … 따라서 이론적 방법에서 역시 사회라는 주체는 반드시 항상 전제조건으로 염두에 두어야 한다’(Marx, 1973: 101–102).

하지만 실제로는 마르크스의 해석은 헤겔 철학을 공정히 다루지 않는다. 헤겔 저서의 많은 문장들은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의 초월적 관념주의와 셀링(Friedrich Schelling)의 객관적 관념주의와 달리 헤겔의 사상이 지식의 운동을 자연의 질서와, 주체를 객체와 혼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철학사전』의 두 번째 문단에서, 헤겔은 분명하게 쓰기를,

사물들에 대한 사고 연구는 일반적으로 철학에 대한 하나의 묘사가 될 수도 있다. … 엄밀하게 인간적이며 사고가 유발한 의식의 현상은 원래 사고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느낌, 지각, 정신적 이미지로 나타나는 데 이 모든 양상들은 진정한 사고 형태와 구별되어야 한다(Hegel, 1892: 4).

『법철학』에서도 간스(Eduard Gans)에 의해 1827년의 두 번째 판 에 32번째 문단에 첨가된 일부 문장들은 마르크스의 헤겔 해석의 오류를 확인할 뿐 아니라 마르크스 자신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 방식을 실제로 보여준다(Jánoska et al, 1994: 115–119).

우리는 소유가 가족 이전에 존재했다(dagewesen)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소유를 맨 처음 다뤄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왜 우리가 가장 고도의 지점에서, 즉, 구체적으로 진실인 것에서 시작하지 않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찾는 것은 정확히 결과의 형태를 띤 진실이고,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추상적 개념 자체를 파악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개념이 체현된 실제 모습은 현실 세계에서는 그 자체로 일차적이지만 우리에게는 이차적이고 후속적이다.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그 발전은 추상적 형태들이 그들 자신을 자립적으로가 아니라 거짓 형태들로 드러내는 것이다(Hegel, 1952: 233).

‘서설’에서 마르크스는 곧이어 단순한 범주들이 더 구체적인 범주들 전에 앞서 그 범주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헤겔이『법철학』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점유나 소유 범주의 경우 마르크스는 이 범주가 가족 같은 ‘더 구체적인 관계들’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존재할 수 없었고 ‘개별 야만인’을 하나의 자산 소유자로 분석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질문은 더욱 복잡하다. 왜냐하면, 화폐는 ‘역사적으로 자본이 존재하기 이전에, 은행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임금 노동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Marx, 1973: 102). 화폐는 더 복합적 현실들의 발전보다 먼저 나타났고, 따라서 어떤 경우는 논리적 범주들의 배열이 보다 발전되고 보다 최신의 역사적 배열을 따라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Marx, 1973: 247). 그래서 ‘단순한 것에서 결합된 것으로 상승하는 추상적 사고의 경로는 실제 역사적 과정과 조응할 것이다’(Marx, 1973: 102). 하지만 고대에서 화폐는 오직 교역하는 민족들에게서만 지배적 기능을 수행했다. 그래서 화폐가 ‘완전한 모습으로 역사적으로 출현한 것은 오직 사회의 가장 발달된 조건들에서만 나타난다’. 또는 ‘비록 더 단순한 범주가 더 구체적 범주 이전에 역사적으로 존재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의 완전한 (내포적이고 외연적인) 발전은 정확히 결합된 형태의 사회에서 성취할 수 있다’.

이 결론은 노동 범주에 더 잘 적용된다. 왜냐하면 비록 노동은 인간 최초의 문명화와 함께 출현했고 매우 단순한 과정으로 보이지만, 마르크스는 ‘그것을 경제적으로 생각할 때 … ‘노동’은 이 단순한 추상을 창조하는 관계들이 그러하듯 근대적 범주’라고 강조했다(Marx, 1973: 103). 중금주의와 중상주의 옹호론자들은 부의 원천은 화폐에 새겨져 있고, 화폐는 그래서 노동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 후에 중농학파들은 노동은 부의 궁극적 창조자지만, 그러나 오직 농업노동 형태에서 그렇다고 주장했다. 스미스의 저서는 최종적으로 이러한 ‘부를 창조하는 활동을 제한적으로 특정화하는 것’을 종결지었다. 그래서 이제 노동은 더 이상 하나의 특수한 형태로서가 아니라 ‘제조업, 상업, 농업 노동으로서뿐 아니라, 하나가 아니라 나머지도 더한 ‘노동 그 자체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인간들이 어떤 형태의 사회에서도 생산자 역할을 하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오래된 관계에 대한’ ‘추상적 표현’이 발견되었다. 화폐의 경우에서처럼, ‘노동’의 범주는 오직 ‘가능한 가장 풍부한 구체적인 발전’이 있는 곳, ‘하나의 사물이 다수에게, 모두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곳인’ 어떤 사회에서만 추출될 수 있었다. 그래서 ‘특정한 노동의 종류와 무관한 노동은 그 속에서 어떤 하나의 노동이 더 이상 지배적이지 않은, 실제 하는 노동 종류들의 매우 발전된 총체성을 전제한다’.

게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일반’은 하나의 범주일 뿐 아니라 ‘개인들이 한 종류의 노동에서 다른 종류의 노동으로 쉽게 이전할 수 있는 사회, 노동의 종류가 변화 대상이므로 중요하지 않은 사회와 조응한다’. 노동자의 노동은 과거에 그 노동이 가졌던 집단적, 공예적 성격을 잃고 ‘노동 일반’, ‘한마디로(sans phrase) 노동’, ‘범주로서 노동뿐 아니라, 실제 노동’이 된다(Marx, 1973: 104). 임금 노동은 ‘이 노동 혹은 또 다른 어떤 노동이 아니라 개별적 특수성(Bestimmtheit)에 완전히 무관심하고 모든 특수성들을 포괄할 수 있는 순수하고 단순한 노동, 추상 노동이다’(Marx, 1973: 297). 요약하면, 노동은 ‘순전히 역학적 활동에 관한 것이고 그 특수한 형태는 상관없는’ 문제다(Marx, 1973: 297).

가장 단순한 범주들과 가장 구체적인 범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 마지막에서 마르크스는 가장 현대적인 부르주아 사회 형태들에서 – 그는 미국을 염두에 두었다 – ‘노동 일반’이라는 범주의 추상이 ‘현실에서 진실’이 되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근대 경제학이 그 논의들의 꼭대기에 놓고 헤아릴 수 없이 오래된 관계로 모든 사회 형태들에 유효한 것으로 표현된 … 가장 단순한 추상이 실제로는 가장 근대적인 사회의 범주로서의 추상일 때 그 실질적 진리를 성취한다’(Marx, 1973: 104–105). 혹은, 마르크스가『그룬트리세』의 다른 곳에서 재확인하였듯이, 그 범주는 ‘어떤 특수한 물질적 생산양식의 발전과 함께 그리고 산업의 생산력의 발전에서 어떤 특수한 단계의 발전과 함께일 때만 오직 실재가 된다’(Marx, 1973: 297).

하지만 노동의 특수한 종류에 대한 무관심은 많은 역사적 현실들에 공통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이 경우 또한, 차이들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연적으로 뭐든지 노동하는 야만인과 자신의 노동을 모든 것에 적용시킨 문명인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다시 한 번 추상을 실제 역사와 관련시키면서, 마르크스는 그의 테제를 확증시켰다. 이 노동의 사례는 심지어 가장 추상적 범주들조차도 정확히 그 추상성 때문에 모든 시대에 유효함에도 불구하고 그 추상성의 특정 성격에서 역사적 관계의 생산물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 완전한 유효성은 오직 이런 역사적 관계들 내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두드러지게 보여준다(Marx, 1973: 105).

이 요점을 지적하고서, 마르크스는 또 다른 핵심적 문제로 전환했다. 그가 쓰려고 하는 저작에서 어떤 순서로 범주들을 배치시켜야 하나? 복합성이 단순성을 이해시키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는 명확하게 첫 번째 경우를 선택했다. 부르주아 사회는 생산의 가장 복잡한 역사적 조직이다. 그 관계들을 표현하고, 구조를 이해시키는 범주들은 따라서 파괴된 사회 구성의 잔해들과 부르주아 사회가 이를 통해 건설된 요소들로 부르주아 사회와 함께 여전히 정복되지 않고 남아 있는 잔존물에 대한 통찰 역시 가능하게 한다(Marx, 1973: 105).

과거를 재구성하기 위한 지표들을 제공하는 것은 현재다. ‘인간 해부학은 원숭이 해부학의 열쇠를 함유하고 있고 …〔그리고〕그 하위 동물 종들 사이의 보다 높은 발달을 시사하는데 … 이것은 오로지 더욱 고도의 발달이 이미 알려진 이후에만 이해될 수 있다’(Marx, 1973: 105). 하지만 이 유명한 주장은 진화론의 용어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 마르크스는 ‘가장 최근의 형태들이 이전의 형태들을 자신에게 이르게 되는 단계들이라는 진부한’, ‘소위 역사적 진화’의 개념을 명시적으로 비판했다(Marx, 1973: 106). 가장 단순한 유기체들에서 가장 복잡한 유기체들로 점진적으로 나간다는 순진한 궤적을 그렸던 진화론 이론가들과 달리 마르크스는 반대로 훨씬 더 복합적인 논리적 방법을 사용하기를 선택했고, 생산양식들(고대, 아시아적, 봉건적, 자본주의)의 계승에 의해 표현되는 역사에 대한 어떤 개념화를 정교화했는데, 그것은 범주들이 그 다양한 양식들 내에서 지니는 지위와 기능들을 설명하는 것을 의미했다(Hall, 2003: 133). 따라서 비록, 이 사회들의 엄청난 차이들을 고려할 때 그 단서들이 조정될 필요가 있지만, 이전의 역사 시대들의 경제들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들을 제공하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다. 마르크스는 ‘모든 역사적 차이들을 흐리게 하고 모든 사회 형태들에서 부르주아 관계들을 보는 경제학자들의 태도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반복하여 강조했다(Marx, 1973: 105).

비록 이 주장은 이전 저작들에서의 표현된 입장과 동일 선상에 있지만, 마르크스는 여기서 경제적 범주들에 할당되어야 할 순서에 관한 골치 아픈 문제와 이전과는 다르게 씨름한다. 그는『철학의 빈곤』에서 ‘사건들의 순서에 따른 것이 아니라 관념들의 계승에 일치하여 역사’를 구성하려는 푸르동의 희망에 반대하여(Proudhon, 1972: 184), 마르크스는 ‘사고의 운동에 의해 세계를 구성하겠다는’ 사상을 비판했다(Marx, 1976: 175). 그래서 1847년에 마르크스는 프루동과 헤겔에 의해 채택된 논리변증법적 방법에 대한 논쟁에 의거해 엄격하게 역사적인 순서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10년 후 ‘서설’에서 그의 입장은 변화했다. 마르크스는 역사적-실증적 점검이라는 논리적 방법을 선호하여 과학적 범주들에 대한 연대기적 계승이라는 기준을 버렸다. 현재가 과거를, 인간의 구조가 원숭이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에 가장 성숙한 단계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부터, 그리고 더욱 구체적으로 다른 모든 요소를 지배하는 요소인 자본으로부터 분석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했다. ‘자본은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경제적 권력이다. 자본이 반드시 종착점뿐 아니라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Marx, 1973: 107).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결정된 순서와 같은 순서에 따라 경제적 범주들을 배치하는 것은 실행할 수도 없고 잘못된 것이다. 그 배치는 범주들의 자연스러운 순서나 역사적 발전에 조응하는 순서와 정확히 반대되는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상호 관계로부터 결정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사회 형태들의 계승에서 경제적 관계들의 역사적 지위가 아니다. 더욱이 그것의 ‘관념상의’ 순서(프루동식의 역사적 운동의 흐릿한 개념)는 더욱 아니다. 오히려, 근대 부르주아 사회에서 그것들의 배치다(Marx, 1973: 107–108).

본질적으로, 범주들을 정확한 논리적 순서에서 정리하는 것과 실제 역사가 작동하는 것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더욱이, 마르크스가『자본론』 3권을 위한 수고들에서 썼듯이, ‘만약 사물의 외양과 본질이 직접적으로 일치한다면, 모든 과학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Marx, 1998: 804).

마르크스는 구체적 요소들을 추상적 정의들로의 해소시켰던 초기의 경제학자들의 경험주의로부터, 현실에 대한 사고를 현실 자체로 환원시켰던 고전 경제학자들의 방법으로부터, 사고에 구체적인 것을 생산하는 능력을 주었다고 마르크스가 비난했던 그가 보기엔 헤겔의 철학을 포함한 철학적 관념주의로부터, 사고 형식들과 객관적 현실을 엄격히 대치시키는 영지주의(gnoseological) 개념들로부터, 역사주의와 그것의 논리를 역사로 해소시키는 것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역사의 행진’(Marx, 1976: 172)을 따랐던『철학의 빈곤』에서 그 스스로 확신했던 것으로부터 분기하여 그 자신의 종합에 도달했던 것이었다. 구체적인 것과 사고 사이의 일대일 대응을 확립하는 것에 대한 마르크스의 혐오는 그가 사고의 특수성을 인식하고 구체적인 것이 사고와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그 둘을 분리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범주들의 설명 순서는 그 범주가 실제 역사적 과정의 관계들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순서와 달라졌다(Althusser and Balibar, 1979: 47–48, 87). 인식과정이 역사에서 발생했던 단계들의 단순한 반복으로 제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추상의 과정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했고 이를 통해 사회의 모든 복잡함 속에서도 사회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편, 이 목적에 진정으로 유용하려면, 추상은, 일반적인 논리적 결정요인들과 구체적 역사적 관계들이 구별되는 방식으로, 다양한 역사적 현실들과 계속해서 비교되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마르크스의 역사 개념은 효험과 예리함을 획득할 수 있었다. 논리적 순서와 실제 역사적 순서의 대칭을 거부하자 역사는 현실 이해에 결정적인 것이 되었고 한편, 논리는 역사를 평이한 사건들의 연대기가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마르크스에게는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모든 경제적 관계의 역사적 발생을 재구성하고 그에 대해 적절하게 묘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그룬트리세』의 한 문장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의 방법은 역사적 탐구가 반드시 개입해야 할 지점들, 혹은 단지 생산 과정의 한 역사적 형태로서의 부르주아 경제가 이전의 역사적 생산양식을 넘어선 지점이 어디 인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부르주아 경제 법칙들을 발전시키기 위해 생산관계의 실제 역사를 쓰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그 자체로 역사가 된 이 경제 법칙들의 올바른 관찰과 추론은 항상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 즉, 체제 배후에 과거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점은 현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더불어 과거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 이 올바른 관점은 마찬가지로 생산관계의 현재 형태를 극복하는 미래의 전조들과 생성의 운동들에 대한 지점들로 이끈다. 한편, 전(前) 부르주아 국면들이 단순히 역사적으로, 즉, 대체할 수 있는 전제들로 나타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생산의 현대적 조건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대체하는 데 연루되고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위한 역사적 전제조건들로 상정된다(Marx, 1973: 460–461).

마르크스에 의해 발전된 방법은 생산이 역사속에서 표출했던 모든 생산양식들 사이의 차이들을 이해할 뿐 아니라, 새로운 생산양식을 제시하는 현재의 경향을 포착하여 자본주의의 불변성을 선언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을 마르크스에게 제공했다. 마르크스의 연구는, 인식론을 포함하여, 결코 배타적으로 이론적 동기에 의해 수행되지 않았다. 그의 연구는 항상 정치 투쟁에 더 잘 개입하기 위해 세계를 해석할 필요에 의해 추동됐다. 사실, 마르크스는 방법에 관한 부분을 그의 ‘경제학’을 쓸 때 의도한 하나의 순서를 나열하는 것으로 끝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생애 동안 그가 작성했던 그의 작업에 대한 수많은 계획 중에 최초의 것인데, ‘서설’에서 전술한 부분들에 대한 숙고들을 재반영한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그룬트리세』를 작성하기 전에, 그는 아래와 같은 것을 다루려 했다.

(1) 거의 모든 사회 형태들에 존재하는 일반적, 추상적 결정요인들 그리고 나서 (2) 부르주아 사회 내부 구조를 구성하고 기본 계급들의 바탕이 되는 범주들인 자본, 임금 노동, 토지 재산 (3) 그 내부 관계로 보았을 때 국가 형태로의 부르주아 사회의 집중 (4) 국제적 생산관계 … 국제적 교환 그리고 (5) 세계시장과 위기들(Marx, 1973: 108).

이것이 적어도 1857년 8월의 마르크스의 계획이었는데, 나중에 매우 많은 변화를 겪었다.

물질적 생산과 지적 생산 사이의 불균등 관계
‘서설’의 마지막 절은 마르크스가 그의 저작에서 취급하려고 의도했던 짧고 단편적인 여덟 개 주장들의 목록에 덧붙여 그리스 예술과 근대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찰들로 구성된다. 여덟 가지 요점들에 대하여 마르크스가 주되게 고려해 썼던 것은 임금 노동의 특징들은 부르주아 사회에서보다 더 일찍이 군대에서 표현되었다는 확신,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에 관한 생각, 생산관계와 법적 관계 사이에 그가 ‘불균등발전’(ungleiche Entwicklung)이라고 불렀던 것, 특히 로마 민법으로부터 발생기의 부르주아 사회의 법의 도출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어떠한 구조도 없는 메모일 뿐이어서 단지 이 문제들에 대한 마르크스 사고의 희미한 아이디어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의 예술에 대한 평가들은 좀 더 발전되어, ‘물질적 생산과 예술적 발전 사이의 불균등 관계(ungleiche Verhältniß)’에 초점을 맞추었다(Marx, 1973: 109). 마르크스는 이미 두 초기 자작들에서 생산과 의식 형태들 사이의 관계를 다뤘다.『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종교, 가족, 국가, 법률, 과학, 예술 등은 단지 특수한 생산양식들이고, 생산양식의 일반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으며’(Marx, 1975b: 297),『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관념의, 개념의, 의식의 생산은 인간의 물질적 활동 및 물질적 교류와 가장 우선 직접적으로 결합된다. … 인간의 인지, 사고, 정신적 교류는 이 단계에서 물질적 행위의 직접적 발산(direkter Ausfluß)으로 나타난다(Marx and Engels, 1976: 36). 『 』

그렇지만, ‘서설’에서는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나중에 주창했던 엄격한 종류의 병행성에 대한 단언과는 매우 다르게, 마르크스는 사회·경제적 발전과 예술적 생산 사이에 직접적 관계가 없다고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그가 읽고 1852년 수고들에 발췌했던 시스몽디(Leonard Simonde de Sismondi)의『남부유럽 문학에 관한 역사적 관점』의 특정 견해들에 대해 재해석하면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예술의 경우, 그것이 꽃피는 시기가 사회의 일반적 발전, 따라서 그 물질적 토대(materiellen Grundlage), 그 사회 조직의 … 골격 구조와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어떤 예술 형식을 예를 들며, 서사시는 ‘오직 예술적 발전의 미발전의 단계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예술의 영역 내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예술들 사이의 관계에 적용된다면, 예술의 전체 영역과 일반적 사회 발전 사이의 관계에서도 그렇다는 것은 이미 덜 당혹스러운 것'(Marx, 1973: 110)이라고 지적했다. 그리스 예술은 그리스 신화, 말하자면, 사회적 형태들이 ‘무의식적으로 예술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근대 같은 진보된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자연을 합리적으로 인식하고 자연이 사람들을 억누르고 공격하는 외적인 힘으로 생각하지 않으므로, 신화는 그 존재이유(raison d’’être)를 잃고, 서사시는 더 이상 반복될 수 없다. ‘탄약(powder and lead)이 있는 데서 아킬레스가 가능할까? 혹은 인쇄기가 있는 데서 일리아드가 가능할까? 서사시의 노래와 영웅전설(saga)과 뮤즈의 신은 인쇄업자의 공장과 함께 끝나고, 그래서 서사시의 필수 조건들이 사라지지 않았나?’(Marx, 1973: 111)

그렇다면, 마르크스에게 예술과 지적 생산 일반은 반드시 사회의 물질적 조건들과 그들이 맺는 관계 속에서 탐구되어야 하지만 두 영역들 사이의 엄격한 조화를 이끌어 내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우리가 고대인들보다 기술에서 더 앞서 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서사시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사고하는 볼테르의 오류(마르크스에 의해서 그의 1861-3년 수고들에서 상기되었다)에 빠지게 될 것이다(Marx, 1989a: 182–183).

예술가를 하나의 창조하는 주체로 생각하면서, 마르크스는 예술적 생산과 그로부터 즐거움을 얻어내는 대중을 다룬다. 이 문제는 해석상에 엄청난 어려움들을 주었다. ‘그리스 예술과 서사시가 사회적 발전의 특정 형태들과 결합되어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예술적 즐거움을 제공하고 어떤 점에서 그것들이 규범으로 그리고 도달 불가능한 모델로서 간주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고대 예술 창조물들이 왜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 대답은 그리스 세계는 ‘인류의 역사적 유아기’, ‘결코 돌아갈 수 없는 단계로서’ ‘영원한 매력’을 발휘하는 시기를 대표한다는 것이다(Marx, 1973: 111). 그래서 결론은,

우리에게 있어서 그들의 예술 매력은 그 예술이 성장한 사회의 미발전된 단계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매력은 사회의 미발전단계의 결과로 그 예술이 발생했고 그 조건에서만 발생할 수 있었으며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미성숙된 사회조건과 … 불가분하게 결합돼 있다(Marx, 1973: 111).

‘서설’에서 미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언급들이 가지는 가치는 그렇지만, 그 대략적인 언급이나 그 언급들에 제공하는 종종 설득력 없는 해결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물질적 생산 형태들이 지적 창조나 행동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마르크스의 반 독단적 접근에 있다. 둘 사이의 ‘불균등발전’에 대한 그의 의식은 사회적 총체성의 다양한 영역들 사이의 단일한 관계를 상정하는 어떠한 도식적 절차도 거부하는 것을 의미했다(Marx, 1973: 109). 마르크스가 ‘서설’을 쓰고 나서 이 년 뒤에 출판된『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서문’의 더욱 잘 알려진 테제인 ‘물질적 생활의 생산양식이 사회, 정치, 지적 생활의 일반적 과정을 조건 짓는다’(Marx, 1987a: 263)는 말은 결코 결정론적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 사회 상부구조에서의 현상들은 단지 인류의 물질적 조건의 반영일 뿐이라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편협하고 너무 뻔한 독해로부터 이 테제는 확실히 구분되어야 한다.

결론
마르크스가『그룬트리세』를 착수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경제학’ 연구방법론에 관한 부분을 서문에 쓰려고 했다. ‘서설’은 단지 자기 명료화를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것만은 아니었다. ‘서설’은 다른 경제학자들의 저작들에서처럼, 저자의 일반적 주제에 관한 예비적 논평들을 포함할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1859년 6월에 마르크스가 그의 연구들의 첫 부분을『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로 출판하기 위하여 보냈을 때, 그는 자신의 동기를 다룬 부분을 제외하기로 결심했다.

내가 초안으로 작성하였던, 일반적 서설을 생략했다. 왜냐하면 더 깊이 고려하였을 때 여전히 입증되어야 하는 결과들을 앞질러 내는 것이 내게 혼란스러워 보였기 때문이고, 진정으로 나를 따르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특수한 것에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전진(von dem Einzelnenzum Allgemeinen aufzusteigen)하기를 결심해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Marx, 1987a: 261).

그래서 1857년의 분석의 길잡이였던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상승’은 1859년 텍스트에서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전진’으로 바꿨다(Marx, 1987a: 261). ‘서설’의 출발점이었던 가장 추상적이고 보편적 결정요인들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으로 결정된 실재인 상품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1857년 텍스트가 출판되지 않은 채로 남았기 때문에, 그런 변화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제시되지 않았다. 사실『그룬트리세』의 마지막 문장에서 이미 그가 꼼꼼하게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정치경제의 개념들을 수백 페이지에 걸쳐 분석한 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부가 자신을 표현하는 첫 번째 범주는 상품 범주’라고 주장했다(Marx, 1973: 881). 그는 상품에 대한 탐구에『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와『자본론』둘 모두의 첫 장을 할애했는데 여기서 상품을 특별히 이에 대한 분석으로 연구가 시작되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 형태’(Marx, 1996: 45)라고 정의했다.

계획된 서설 대신, 마르크스는 그의 지적 일대기와 소위 역사의 유물론적 개념을 간명하게 요약한 짧은 ‘서론’으로 1859년의 저작을 시작했다. 그 후에 그는 매우 드문 경우들을 제외하고 약간의 짧은 논평들 이외에 더 이상 방법에 관한 논의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들 중 확실히 가장 중요한 것은『자본론』초판의 1873년의 ‘후기’였는데, 그곳에서 자본론의 출판에 따른 논평들에 자극받아, 그는 자신의 탐구 방법에 관하여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서설’에 있는 주제들의 일부를 다시 논의했다. 이렇게 한 또 다른 이유는 마르크스가 설명 방법과 탐구 방법 사이의 차이들을 주장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설명 방법은 일반적인 것으로 시작할 수 있으며 보편적 형태에서 역사적으로 결정된 형태들로 이동하고 그래서 1857년의 정식화인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을 적용할 수 있지만, 탐구 방법은 직접적인 현실에서 시작해야 하고 그래서 1859년에 말했듯이 ‘특수에서 일반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설명 방법(Darstellungsweise)은 반드시 조사 방법(Forschungsweise)과 형식에서 달라야 한다. 조사 방법은 반드시 소재의 세부사항들까지 알아내야 하고 발전의 서로 다른 형태들을 분석하고 그 형태들의 내적 연관성을 찾아내야 한다. 이런 작업을 수행한 이후에야 실제적 운동이 제대로 묘사될 수 있다(Marx, 1996: 19).

1857년 ’서설‘ 이후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더 이상 방법에 대한 문제들에 대해 이에 대한 저작이 가지는 특징인 공개적이고 문제제기 방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고 그의 생각들이 도출된 복잡한 발생적 기원에 대해 무시하지 않으면서 그의 최종 생각만을 표현했다(Carver, 1975: 135). 바로 이런 이유로 ‘서설’의 내용은 극히 중요하다. 몇몇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사상과의 밀접한 만남 속에서 마르크스는 분명한 확신을 다시 확인했고 중요한 이론적 성취를 이뤘다. 다른 무엇보다 첫째로, 그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그 사회적 관계의 역사적 특수성을 다시 강조했다. 둘째, 그는 생산, 분배, 교환, 소비를 하나의 총체성으로 고려했는데 그 총체성 안에서 생산이 전체의 다른 부분들을 지배하는 요소를 구성한다. 게다가, 사고에서 현실을 재생하는 것과 관련하여 마르크스는 순전히 역사적 방법에만 의존하지 않고 추상을 활용하여 지식의 경로의 건설하는 데서 추상이 가지는 가치를 인식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생산관계와 지적관계의 발전 사이에 존재하는 불균등한 관계를 강조했다.

처음으로 출판된 지 100년 후에, 이러한 깊이 있는 사고 때문에 ‘서설’은 마르크스의 해석자들과 독자들에게 문학적 관점에서도 매력적인 원고일 뿐만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이론적 원고가 되었다. 이 점은 미래 세대에 마르크스의 저서를 새롭게 접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 경우가 될 것이다.

번역 하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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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소외 개념에 대한 재논의

1. 들어가는 말
소외는 20세기에 가장 중요하게 또 널리 논쟁 되었던 주제 중의 하나다. 그 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화가 이 논쟁들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일반 적인 생각과는 달리 소외 개념 자체는 직선적으로 발전하지 않았고,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마르크스의 소외에 대한 사고를 담은 원고들이 출판되면서 이 이론상의 변화와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외라는 용어의 의미는 20세기를 거치며 여러 차례 변했다. 신학 담론에서 소외는 인간과 신과의 거리를 일컬었다. 사회계약론에서는 개인의 원초적 자유 가 상실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영국 정치경제학에서는 재산소유권의 이전 을뜻했다. 소외에대한체계적인철학적입장은G.W.F. 헤겔에서처음나타 났다. 『정신현상학』(1807)에서 헤겔은 ‘entäusserung(말 그대로 자기외부화 혹은 자기포기)’와 ‘entfremdung(疎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정신이 객관성 영역에 서자신이아닌것으로되는것을표현했다. 소외문제전체는계속주로좌파 헤겔주의자들의 저술들에서 다뤄졌다. 그리고 루트비히 포이어바흐가 『기독교 의 본질』(1841)에서 종교적 소외 이론을 다뤘는데, 인간이 자신의 실재를 상상 속의신에게투영한다고주장하여소외이론발전에크게기여했다. 그후소외 는 철학적 사고에서 사라졌다. 19세기 후반기 동안 어떤 주요 사상가들도 소외 에큰관심을보이지않았다. 심지어마르크스도살아있는동안출판한저작들 에서 소외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제2인터내셔널(1889-1914) 마르크 스주의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 몇몇 사상가들이 나중에 소외와 연결되는 개념들을 발 전시켰다. 에밀 뒤르켕은 『사회분업론』과 『자살론』에서 노동분업이 거대하게 확대되면서 사회적 결속을 보장하던 규범들이 위기에 이르는 일련의 현상들을 나타내는 ‘아노미(anomie)’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또한, 생산과정에 거대한 변화 를 수반하는 사회적 동향이 독일 사회학자들의 사고에 근간을 이뤘다. 게오르 크 지멜은 『화폐의 철학』(1900)에서 개인들을 압도하는 사회 제도들과 인간관 계에서의 점증하는 비인간화(impersonality)에 큰 주의를 기울였다. 한편, 막스 베 버는 『경제와 사회: 공동체들』(1922)에서 사회 내 ‘관료화’ 현상과 인간관계에 서의 ‘합리적 계산(rational calculation)’ 현상에 대해 썼는데, 그는 이 두 가지를 자본주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저자들은 소외를 멈출 수 없는 흐 름으로 보았다. 그들은 현존 사회 정치 질서를 개선하고자 하는 희망에 의해 이끌린 것이지, 존재하는 질서를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었 던 것이다.

2. 소외의 재발견
소외이론은 죄르지 루카치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그의 책 『역사와 계급의식 』(1923)은 마르크스의 『자본론』(1867)의 특정 구절들, 특히 ‘물신숭배’에 대한 장을 언급했다. 그리고 ‘물화(Reific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해 노동 행위가 인간 을 대상화하고 외부의 자율적 법칙을 통해 인간으로부터 독립해 인간을 지배 하는 현상을 묘사했다. 하지만, 그 핵심에서 루카치의 이론은 물화를 구조적으 로 주어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여전히 헤겔 이론과 비슷했다. 훨씬 나중에 프랑스 번역판(Lukács, 1960)이 출간된 이후 그의 이론이 학생들과 좌파 활동가 들 사이에 광범위한 반향을 얻게 되자 루카치는 장문의 자기비판이 담긴 서문 (1967)을 달아 재출판하기로 결정한다. 그 서문에서 그는 “『역사와 계급의식』은 헤겔처럼 소외와 대상화(objectification)를 지나치게 동일시했다”(Lukács, 1971)고 설명했다.

1920년대 이 주제에 집중했던 또 다른 저자는 이삭 루빈이었다. 그는 『마르 크스의 가치론에 대한 논설』(1928)에서 물신숭배이론이 “마르크스의 경제체계 전체와 특히 가치론의 근간”(Rubin, 1972)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이 러시아 저자 의 입장에 따르면 사회적 관계의 ‘물화(Reification)’가 “상품, 즉 자본주의 경제의 실제(real fact)”이며(Rubin, 1972: 28) 이는 “단지 생산관계의 ‘신비화’ 혹은 ‘환상’ 뿐 아니라 ‘물질화’와 연관돼 있다. 이것은 현대 사회경제 구조의 특징 중 하나 다. …물신숭배는단지사회적의식을나타내는현상일뿐아니라사회적존재 를 나타내는 현상이기도 하다”(Rubin, 1972: 59). 이 글들을 썼던 시대를 고려했을 때 탁월한 선견지명과 통찰력에도 불구하 고 루빈의 저작은 마르크스 소외이론과 유사점이 크다는 이유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루빈의 입장은 서방에서 그의 책이 1972년 영어로 (그리고 영어에서 다 른 언어들로) 번역된 이후 주목받기 시작했다.

마침내 소외 개념이 혁명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이전에 출판되지 않았던 마르크스 청년기 저작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가 1932년 출판된 것이었다. 이 책은 순식간에 20세기 동안 가장 널리 번역되고 배포되고 토론된철학저서중하나가되었다. 이책은마르크스의경제학사상이구축되 던중요한시기동안, 즉정치경제학이성립될때소외이론이중심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1) 마르크스는 소외된 노동(entfremdete Arbeit)2)이라는 범주를 통해 소외 문제를 철학, 종교, 정치 영역에서 물질생산의 경제 영역으로 까지 확대했을 뿐 아니라 경제 영역이 다른 영역에서의 소외를 이해하고 극복 하는 데 핵심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소외는 “생산자로부터 독립된 하나의 독립적인 힘, 하나의 낯선 존재”로 노동생산물이 노동자들과 대립하는 현상으로 제시되었다. 그의 생산물 속에서 노동자 소외가 지니는 의미는 그의 노동이 하나의 대상, 하나의 외적 실존으로 된다는 것뿐 아니라, 그의 노동이 그의 외부에, 그로부터 독립되어, 그에게 낯설게 실존하며, 그에게 대립하는 자립적인 힘이 된다는 것, 즉 그가 대상에게 부여했던 생명이 그에게 적대적이고 낯설게 대립한다는 것이 기도 하다(Marx, 1992b: 324).

이 일반적인 정의와 더불어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부르주아 사회에서 겪는 소외의 네 가지 형태를 나열했다. (1) “자신을 압도하는 힘을 지닌 낯선 물건”인 자신의 노동이 창출한 생산물로부터 소외, (2) “직접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적대 적”이며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Marx, 1992b: 77) 자신의 노동 행위로부터 소 외, (3) “자신에게 낯선 존재”로 변한 “인간이라는 유(類)적 존재”로부터 소외, (4) 다른 인간들, 그들 노동에 대한 관계, 그리고 그들 노동의 대상으로부터 소 외(Marx, 1992b: 80)3)가 그것이다.

헤겔과 달리 마르크스에게 소외는 대상화 그 자체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임 금노동과 노동생산물이 생산자들과 적대하는 대상으로 변하는 특정 경제 형태 내의특정한현상이었다. 이두입장이가지는정치적차이는매우크다. 헤겔 이 소외를 노동의 존재론적 표현이라고 본다면, 마르크스는 소외를 자본주의라 는 특정한 생산 시대의 특징이라고 여겼고 이 소외는 “사유재산으로부터 사회 를 해방시키는 것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Marx, 1992b: 83). 마르크 스는 제임스 밀의 『정치경제학 요소』에 대한 발췌를 담은 수고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노동은 자유로운 표현이고 따라서 삶의 즐거움이 될 수 있다. 사유재산제도 아래서는 생존을 위해, 생존의 수단을 구하기 위해 일하기 때문에 노동은 삶의 소외다. 나의노동은삶이아니다. 더욱이나의노동은나의삶이될수있기에, 노동을통해내개성의특수한성격이확인될수있다. 노동은참되고활동적인 자산이될수있다. 사유재산제도아래서는내개성은내가노동을혐오하는수 준까지내개성이소외되고노동은나에게고문이다. 노동은사실더이상활동 의 외양에 지나지 않고 바로 이런 이유로 노동은 내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부의 강제적 요구에 의해 부과된 강제노동일 뿐이다(Marx, 1992c: 278). 이렇듯 심지어 단편적이고 때때로 주저하는 듯한 초기 저작들에서조차 마르 크스는 항상 소외를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논했다.

3. 비(非)마르크스주의자들의 소외 개념들
그러나 역사적, 비존재론적인 소외개념이 다시 부상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20세기 초, 소외 현상을 다룬 저자들 대부분은 소외를 인간 존재의 일 반적 양상이라고 여겼다. 예를 들어, 마틴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1927)에서 소외를 순수하게 철학적 개념으로 접근했다. 그의 소외 현상학에서 하이데거가 사용한 범주는 ‘전락(fallenness)’인데, 인간 존재를 존재론적으로 구성하는 현존 재(Being-There, Dasein)가 참되지 않은 주변세계에 순응하여 그 자체를 잃어버리 는 것을 뜻한다. 하이데거에게 “세계로 전락한다는 것은 서로 함께 존재(Being- with-one-another)하는 것을 의미하며 서로 함께 존재하는 것은 잡담, 호기심 그 리고 애매함에 의해 이끌린다”. 이는 마르크스의 이론적 전제의 핵심이었던 공 장 노동자들의 조건과는 매우 다르다. 특히 하이데거는 이 ‘전락’을 “나쁘고 개탄스러운 존재론적 상황으로, 아마도 인간문명의 더욱 발전한 단계에서는 없 앨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세계내존재(Being-in-the- world)의 실존주의적 모습으로, 존재론적 특징”(Heidegger, 1962: 220-221)4)으로 보았다. 하 이데거를 좋아하지 않았던 허버트 마르쿠제는 마르크스의 저서들을 잘 알고 있었는데, 소외를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표현이 아니라 대상화 그 자체와 동일 시했다. 1933년 출판한 한 논문에서 그는 “노동의 고됨이라는 특성은”(Marcuse, 1973: 25) 단지 “특정한 사회기술적 노동구조 속에서 수행되는 노동의 특정 조 건”(Marcuse, 1973: 16-17)에 기인한다고 볼 수 없으며 노동의 근본적인 특징 중 의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계 옆에 서 있건, 기술적 계획을 세우건 조직적 수단들을 고려하며, 과학적 문제들을 조사하고,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등 노동에서 노동자는 항상 ‘사물 (the thing)과 함께’다. 인간의 행위에서 심지어 자신이 자신의 대상을 통제할 때 조차 인간은 사물의 지시를 지키고 자신을 복속시키고 사물의 법칙을 따른다. … 각각의 경우에 인간은 ‘자신과 함께’가 아니다. … 심지어 이런 행동이 자신의 자유롭다는 삶에서 진행된다고 해도 인간은 ‘자신이 아닌 것’과 함께이다. 이런 인간 존재의 외재성과 소외는 …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Marcuse, 1973: 25).

마르쿠제는 “인간 존재의 중요한 핵심”에 속하는 “근원적으로 부정적인 노 동행위”(Marcuse, 1973)가 있다고 했다. 따라서 소외에 대한 비판은 테크놀로지 와 노동 일반에 대한 비판이 되었고 소외의 극복은 인간들이 생산활동에서는 부정되는 자유를 획득하는 유희의 순간에만 가능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공을 한번쳐올렸을때, 노는사람은기술적노동의가장강력한성취와는비교할 수 없이 높게, 대상화(objectification)를 뛰어넘는 인간 자유의 승리를 성취한 다”(Marcuse, 1973: 14-15).『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마르쿠제는 인간해방은 오직 노동의 종말과 리 비도(libido)의 실현, 그리고 사회관계속에서의 유희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고 주장하여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과는 확연히 다른 입장을 취했다. 마르쿠제 는 생산수단의 공동소유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소외를 해결할 수도 있다는 가 능성을 폐기했다. 임금노동뿐 아니라 노동 일반이

인구 대다수가 통제하지 못하고 개인들이 생존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따라 야 하는 개인들과는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어떤 기관을 위한 일이다. 그리고 노동은 노동분업이 전문화될수록 더욱 소외된다. 희열 없이 그리고 즐거움의 원 칙과 반대인 … 소외 속에서 인간들은 일한다(Marcuse, 1966: 45).

인간들이 저항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상식은 사회에 의해 부과된 ‘수행원칙’ 이다. 마르쿠제의 눈에는

성(sexuality)과 문명 사이의 갈등이 지배의 발전과 함께 나타났다. 수행원칙의 지배아래몸과마음은소외된노동의도구가되었다. 몸과마음은인간유기체 의 본 모습인 리비도적인 주체-객체의 자유를 욕망하는 것을 포기할 때 이런 도 구로 기능한다. … 인간은 소외된 수행을 위한 도구로 존재한다(Marcuse, 1966: 46-47).5)

따라서 물질생산이 평등하고 합리적으로 조직되더라도 “노동은 결코 자유와 희열의 영역이 아니다. 자유와 성취를 규정하는 것은 노동 밖의 영역이 다”(Marcuse, 1966: 156). 마르쿠제의 대안은 마르크스에게는 중요한 프로메테우 스 신화를 폐지하고 디오니소스의 관점에 다가가는 것이다. 즉, “에로스의 해 방”(Marcuse, 1966: 155)이다. 『문명과 그 불만』(1929)에서 비억압적인 사회조직 은 인간관계에서 확보된 문명 수준을 위험하게 퇴보시킬 것이라고 한 프로이 드와는 달리, 마르쿠제는 본능의 해방이 기술적으로 선진적인 “자유사 회”(Marcuse, 1966: 198)에서 인류에 봉사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면 이는 진보의 행진을 위해서 유리할 뿐 아니라 “새롭고 지속가능한 노동관계”(Marcuse, 1966: 155)6)를 창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어떻게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것 인지에 대한 그의 주장은 분명하지 않았고 유토피아적이었다. 마르쿠제는 기술 지배 일반에 반대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다. 따라서 그의 소외에 대한 비판은 더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직접 겨냥하지 않았고, 사회변화에 대한 그의 생각 은 매우 비관적이어서 노동계급을 자본주의체제를 수호하는 주체로 보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두 주요 인물,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 역시 극심한 사회통제와 대중매체에 의한 필요의 조작을 통하여 일반화된 소 원(estrangement)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계몽의 변증법』(1944)에서 그들은 “기술적 원리는 지배의 원리 그 자체다. 기술적 원리는 사회 자체로부터 소외 된 사회의 폭력적 성격이다”(Horkheimer and Theodor: 121)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현대자본주의에서 심지어 자유롭고 일하지 않는 여가시간의 영 역도 재생산 메커니즘에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외 개념은 정신분석학에서 길을 찾았다. 정신분석학 으로소외개념을다룬이들은, 인간이자연과문화중하나를선택해야하며 문명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인간은 반드시 필수적으로 자신의 충동을 버려 야 한다는 프로이드의 이론에서 출발했다(Freud, 1962: 62). 일부 심리학자들은 이 갈등이 유발하는 선택의 결과로 특정 개인들에게 나타나는 정신병을 소외 와 연결시켰다. 그래서 모든 광범한 소외 문제는 단지 주관적인 현상으로 축소 되었다.

정신분석학으로 소외를 가장 본격적으로 다룬 저자는 에리히 프롬이었다. 다른 정신분석학자들과 달리 그는 소외의 발생을 자본주의 역사적 맥락과 결 코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의 책 『건전한 사회』(1955)와 『에리히 프롬, 마르크스 를 말하다』(1961)에서 그는 소외개념을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가 교를 놓기 위해 사용했다. 그러나 프롬도 마찬가지로 언제나 주관성에 강조의 중심을 두었고, “개인들이 자신을 이방인으로 체험하는 경험의 양상”(Fromm, 1965a: 111)이라고 자신이 요약한 그의 소외 개념은, 초점이 개인들로 너무 협 소하게 맞춰져 있었다. 더욱이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에 대한 그의 이해는 오직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만 기반을 두고 있어서 마르크스의 사고에서 소 외된 노동이 가지는 특별함과 중심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이 빈틈 때문에 프롬은 (노동자들이 노동과정에서 또 노동생산물과 관련하여 체험하는) 객 관적 소외에 마땅한 무게를 실지 못했고, 그로 하여금 솔직하지 못하게도 근본 적인 구조적 관계들에 대해 무시하는 입장으로 나아가게 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가장 소외받는 계급이라고 믿었다. … [마르크스]는 소외가 대다수 인민들의 운명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 오늘날 점원, 세일즈맨, 경영자가 숙련 육체노동자보다 더 소외되어 있다. 숙련 육체노동자의 기능은 계속해서 숙련도, 신뢰성 등과 같은 특정한 개인적인 특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개성’, 미소, 거래상의 판단을 팔도록 강요당하고 있지 않다(Fromm, 1961: 56-57).7)

비(非)마르크스주의 소외 이론 중의 중요한 흐름 하나는 장 폴 사르트르와 프랑스 실존주의자들과 연결돼 있다. 사실 1940년대는 전쟁의 공포가 아로새 겨져 있었고 양심의 위기(crise de conscience)로 인해 소외 개념이 부분적으로는 알렉산드르 코제브의 신헤겔주의(Kojève, 1980: 86)의 영향 아래 철학과 서사문 학 모두에서 재부상했다. 그러나 다시금 소외 개념은 마르크스의 사고에 비해 훨씬보편적인것, 사회속인간의광범한불만과동일한것, 개별인간과경험 세계에서 분리된 것이 되었고, 그리하여 극복할 수 없는 인간 조건(condition hu- maine)이 되었다. 실존 철학자들은 소외의 사회적 기원을 제시하지 않고 소외를 필연적으로 모든 ‘사실성(facticity)’(당연히 소련의 실패 경험이 이런 관점을 강화 시켰다)과 인간 타자성(humna otherness)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1955년 장 이폴리트는 실존주의 경향의 가장 중요한 저작 중의 하나에서 이 입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소외]는 마르크스가 이해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아래 인간 소외 개념으로 환 원할 수 없어 보인다. 이는 고립된 존재(cogito)로 여겨질 수 없는 더 보편적인 인간의자기의식성의한특정사례에불과하다. 그자기의식성은스스로를그 것을 구성하는 언어 속에서만 그리고 자기가 인식하고 또 때때로 의절하기도 하 는다른존재속에서만인식할수있다. 하지만, 타자를통해자신을발견하는 이런 방식, 즉 대상화는 항상 자신을 잃어버리고 동시에 자신을 발견하는 소외이기 도하다. 따라서대상화와소외는분리할수없고둘의결합은단순히역사의 모든 순간에서 발견되는 변증법적 긴장의 표현이다(Hyppolite, 1969: 88).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반대하는 것에 기반해 인간의 예속화에 대 한 비판을 발전시켰다. 실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접근에 유용할 것으로 생각한 마르크스 입장 일부를 구체적인 역사적 비판이라곤 없는 단순히 철학적 논쟁 속으로 흡수하려고 함으로써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Mészáros, 1970: 241).

4. 마르크스의 소외에 대한 초기 저작 논쟁
프랑스에서 발전한 소외논쟁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은 큰 주목을 받았다. 하 지만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만 주로 언급되었고 심지어 루카치가 그의 물 화(reification) 이론을 구축할 때 참고했던 『자본론』의 내용도 거론되지 않았다. 더욱이 논자들은 『1844년 수고』의 몇몇 문장들을 전체 맥락에서 떼어내 선정적 으로 인용하였다. 그리고 (대개 『자본론』은 읽지도 않은 채) 『자본론』의 경제결정 론을 비판하며, 그것과는 매우 다른 자유롭고 철학적인 ‘새로운 마르크스’가 존 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다. 『1844년 수고』에 기반해 프랑스 실존주의자들 은 노동자들의 인간 유(類)로부터 그리고 다른 노동자들로부터의 자기소외 (Selbstentfremdung) 개념을 대단히 강조했다. 그런데 이 현상들에 대해 마르크스는 초기 저작에서 논의할 때마다 항상 객관적 소외와의 연관 속에서 논의했다.

똑같은 분명한 실수가 전후 주도적인 정치이론가 중의 하나인 한나 아렌트 에게서도 나타났다. 심지어 『인간의 조건』(1958)에서 그녀는, 마르크스가 『1844 년 수고』에서 언급한 소외 형태 중 주관적인 소외 하나만 분리해 자신의 입장 을 도출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주장했다. 수탈(expropriation)과 세계소외는 동시에 발생한다. 무대의 모든 배우들의 의도 를 철저히 무시하는 현대(the modern age)는 세계로부터 인구의 특정 계층들을 소외시키는 것으로 시작됐다. … 그리고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자기소외가 아닌 세계소외가 현대의 특징이 되었다(Arendt, 1958: 253-254).

그녀가 마르크스의 원숙기 저작들에 대해 친숙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마르 크스가 “자본주의 경제 내 세계소외의 함의를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고 인정하 며 그녀가 언급한 것이 단지 마르크스의 아주 초기 저널 기사인 “목재 절도 단속법에 대한 논쟁”(1842)일 뿐, 『자본론』의 훨씬 더 중요한 수많은 해당 페이 지들이나 그 이전의 예비적 수고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데서 드러 난다. 그래서 그녀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을 내린다. “가끔 보이는 이런 인식은 마르크스 저작에서 작은 역할만 하고 있으며 마르크스의 저서의 내용 은 현대의 극단적인 주관론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Arendt, 1958: 254). 어디 서 또 어떻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분석에서 ‘자기소외’를 우선시 했는지는 아렌트가 그녀의 저서들에서 전혀 해명한 바가 없으므로 여전히 미 스터리로 남아 있다.

『1844년 수고』의 소외이론은 1960년대 벌어진 마르크스 저작들의 폭넓은 해 석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이때 초기 마르크스와 후기 마르크스 사이 를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초기와 후기 마르크스를 임의적이 고 인위적으로 대립시키는 이 주장을, 초기의 철학 저서들을 선호하는 사람들 과 『자본론』의 마르크스만이 유일한 마르크스라는 사람들(루이 알튀세르와 러 시아 학자들) 모두 옹호했다. 전자의 경우 『1844년 수고』의 소외이론을 마르크 스 사회이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 반면, 후자의 사람들은 종종 진 정한 ‘소외 혐오증’을 표출하며 처음에는 그 의의를 축소하려 하다가8) 이 전략 이더이상가능해지지않자, 소외라는주제전체가“젊은시절의무분별한헤 겔주의의 잔재”(Schaff, 1980: 21)로, 마르크스가 나중에 폐기했다고 깎아내렸다. 전자에 속한 학자들은 『1844년 수고』는 마르크스가 그의 주요 연구를 시작했 던 26살에 쓴 것이라고 반박했다. 반면 후자 쪽에서는 새로 출판된 마르크스의 저서들을 통해 마르크스가 소외이론에 대한 관심을 잃은 바가 없고 평생 연구 의 주요 단계들에서 [소외 이론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이 분명해졌어 도, 여전히 마르크스 소외이론의 중요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1844년 수고』의 소외 이론을 마르크스 사상의 핵심 주제로 여기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으로, 이는 단지 마르크스 저작들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9) 반면 새로 출판된 소외에 대한 내용으로 마르크스가 세계적으로 철학 저술들에서 가장 자주 토론되고 인용되는 저자가 되었을때, 이모든논의에대한소련의침묵과이침묵의의미에대한논란은, 소련에서 마르크스의 저작들이 어떻게 도구적 필요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확 실한 사례를 보여준다.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에서 소외가 존재한다는 것은 즉 각 부정되었고 소외 문제와 관련된 모든 글은 의혹을 샀다. 앙리 르페브르(H. Lefebvre)는 이렇게 말했다. “소련 사회에서 소외는 더 이상 이슈가 되어서도 안 되고될수도없다. 국가적이유로위로부터의명령에의해이개념은사라질 수밖에 없었다”(Lefebvre, 1991: 53). 따라서 1970년대까지 ‘사회주의 진영’의 아 주 소수의 저자만이 소외논의에 관심을 가졌다.

잘 알려진 서방의 몇몇 저자들도 이 현상의 복잡성을 경시했다. 예를 들어 루시앙 골드만(L. Goldmann)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조건들에 의해 소외가 극복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변증법 연구』(1959)에서 그는 소외가 단순히 계획의 영향으로 사라지거나 퇴색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물화는 사실 계획의 부 재와 시장을 위한 생산에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동구에서는 소비에트 사회 주의, 서구에서는 케인스주의 정책의 결과로 “첫 번째 경우에는 물화가 사라지 고 두 번째의 경우에는 아주 약화”(Goldmann, 1959: 101)될 것이라고 썼다. 역사 는 루시앙 골드만의 예언이 잘못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5. 소외이론의 저항할 수 없는 매력
1960년대에는 소외 이론의 진정한 유행이 시작됐고 소외 이론에 대한 수백 의 책과 기사들이 전 세계에서 출판되었다. 요컨대 소외의 시대였다.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학문 영역의 저자들이 소외의 원인을 상품화, 과잉전문화(over- specialization), 아노미(anomie), 관료화, 순응, 소비주의, 신기술에 의한 자아(sense of self) 상실, 심지어 개인적 고립, 무관심, 사회 혹은 민족적 주변화, 그리고 환 경오염에서 찾았다.소외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소외개념은 반(反)소련 철학적 마르크스주의와 가장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가톨릭 내 경향들이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소외개 념의 인기와 이 개념의 무차별적인 적용은 심각한 개념상의 애매모호함을 낳았 다.10) 따라서소외는몇년지나지않아인간불행의모든영역을포괄하고그 래서 소외를 결코 바꿀 수 없다는 믿음을 포함하는11) 공허한 공식이 되었다.

기 드보르(G. Debord)의 책 『스펙터클의 사회』는 소외이론과 비물질생산에 대한 비판을 연결하여 1967년 출판된 이래, 체제에 맞선 저항에 나섰던 학생세 대들을 진정으로 대변하는 것이 되었다. 소외이론은 비물질생산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었다. 사회질서에 대한 동의의 생산(manufacturing of consent)이 여가 산업 으로까지 퍼졌다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이론에 기반하여 드보르는 비 노동의 영역을 더는 생산활동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자본주의 축적이 시초 단계에 있을 동안에 정치경제학은 노동력 유지에 불가결한 최소한만을 받는 프롤레타리아만을 노동자로 상정하며 ‘여가와 인간성 속에’ 있는 노동자를 결코 상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지배계급의 생각은 상품 풍 요의 수준이 노동자들의 추가적 협력이 필요한 수준에 도달하자마자 역전된다. 업무시간이 끝나면, 노동자는 갑자기 생산의 조직과 감시의 모든 측면에서 그토 록 노골적으로 가해지던 총체적 멸시로부터 벗어나 소비자라는 이름으로 지극히 공손하게 어른 취급을 받게 된다. 바로 이 순간 상품의 휴머니즘은 노동자의 ‘여 가와 인간성’을 책임지는데 그 이유는 단지 정치경제가 이제 이러한 영역들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지배해야 하기 때문이다(Debord, 2002: 13).

드보르에게 한편으로 경제의 사회생활에 대한 지배는 기본적으로 “존재(being) 가 소유(having)로 전락”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현 단계”에서는 “소유(having)에 서 표현(appearing)으로의 일반적인 변화”가 있었다(Debord, 2002: 9). 이 생각에 따라 그는 스펙터클의 세계를 분석의 핵심으로 삼는데 “스펙터클의 사회적 기 능은 구체적인 소외생산”(Debord, 2002: 11)으로 스펙터클을 통해 “상품의 물신 숭배는 … 궁극적으로 실현된다”(Debord, 2002: 12). 이 상황에서 소외는 개인들 에게 소비하도록, “지배적인 이미지들과 동일시”(Debord, 2002: 11)하도록 하여 개인들을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실제 존재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사실상 흥미진진한 경험, 새로운 마약이 되는 수준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스펙터클은 상품이 사회적 삶을 총체적으로 점령하기에 이른다. … 현대의 경 제적 생산은 상품의 독재권을 외연적으로나 내포적으로나 확장시킨다. … ‘제2 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바로 이 순간에 소외된 소비는 소외된 생산처럼 대중들에 게 의무가 된다(Debord, 2002: 13). 드보르의 부상과 더불어 장 보드리야르(J. Baudrillard) 또한 성숙한 자본주의 에 발생한 사회적 변화를 비판적으로 해석하는데 소외개념을 사용했다. 『소비 의 사회』(1970)에서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주의의 생산 중심성에 대한 강조에 거리를 두며 소비를 현대사회의 근본요소로 보았다. “소비의 시대”에서 광고와 여론조사는 거짓 필요와 대중적 합의를 창조했고 “소비의 시대”는 또한 “급진 적 소외의 시대”라는 것이다.

일반화된 상품논리는 오늘날 노동과정과 물질생산뿐 아니라 전체 문화, 성 (sexuality), 인간관계, 심지어 판타지와 개인적 동기까지를 통치(govern)하게 되었 다. … 모든 것이 스펙터클화되었다. 즉, 다른 말로 모든 것이 이미지와 상징과 소비할 수 있는 모델들로 환기되고 도발되고 지휘된다(Baudrillard, 1998: 191).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정치적 결론은 상당히 혼란스럽고 비관적이다. 대규모 사회적 소요에 직면하자 그가 생각하기에는 “1968년 5월의 저항은 대상(objects) 과 소비에 너무 큰 악마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대상과 소비를 구체화시키는” 함정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비판에 따르면 “소외에 관한 모든 논문들, 그리고 팝과 반예술을 조롱하는 세력들”은 단지 “게임의 일부를 이루는 고소장 에 불과하며 비판적 신기루, 우화를 완성시키는 반(反)우화”(Baudrillard, 1998: 195-196)일 뿐이다. 이제 그는 노동자계급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사회세력이라 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멀리 벗어나서 너무 평범하여 단명하게 될 메시아적 호소로 이 책을 끝맺는다. “우리는 1968년 5월처럼 결코 예측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발생할 폭력적인 분출과 갑작스러운 붕괴가 이 백인 대중문화(this white Mass)를 파괴하는 것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Baudrillard, 1998: 196).

6. 북미사회학에서의 소외이론
1950년대 소외개념은 북미사회학계에도 진입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소외라 는 주제에 대한 접근방식은 당시 유럽에서 만연했던 방식과는 매우 달랐다. 주 류사회학에서 소외는 사회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 인간의 문제(Clark, 1959: 849-852)로 취급됐고 그 해결책은 사회를 바꾸기 위한 집단적 실천이 아니라 현존하는 질서를 받아들이는 개인들의 능력이 핵심이었다(Schweitzer, 1982: 36-37).

이곳에서도 또한 소외 개념은 분명하고 공유된 개념정의가 내려지기까지 오 랫동안 모호하게 남아 있었다. 일부 저자들은 소외를 창조성을 표현하는 수단 으로 인간의 조건에 전반적으로 내재하는 긍정적 현상으로 보았다.12) 다른 일 반적인 관점은 소외가 개인과 사회 사이의 균열에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었 다(Schacht, 1970: 155). 예를 들어 세이무어 멜먼(S. Melman)은 소외를 결정의 정 식화와 집행 사이의 분리에서 찾았고 소외가 노동자들과 경영자 모두에게 영 향을 미친다고 보았다(Melman, 1958: 18, 165-166). ≪미국 사회학 리뷰(American Sociological Review)≫에서 소외 개념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소외의 척도』(1957) 에서 그윈 네틀러(G. Nettler)는 개념을 정식화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사용했다. 그러나 노동조건을 조사할 때의 엄격한 노동운동의 전통과는 아주 다르게 그 의 질문내용들은 과학적 조사의 원리보다는 당시 매카시주의에 더 큰 영감을 받아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13) 사실상 그는 미국 사회의 보수적 원칙, “가족주 의, 대중매체 및 대중적 기호, 현 상황, 대중교육, 전통적 종교와 목적론적 세계 관, 국가주의 그리고 선거제도에 대하여 비대중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하 는 것”(Nettler, 1957: 674)에 대한 거부를 소외와 동일시했다.

미국 사회학 연구에서 소외개념의 협소함은 멜빈 시먼(M. Seeman)의 「소외의 의미에 대하여」(1959)라는 짧은 글이 발표되면서 바뀌었는데, 이 글은 미국 사 회학분야의모든학자가반드시인용해야할문헌이되었다. 그가정의한소외 의 다섯 가지 주요 형태―무력감, 무의미감(처한 상황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음을 의미), 무규범감, 고립감, 자기소원14)(Seeman, 1959: 783-791) ― 를 보면 그 또한 소외현상을 기본적으로 주관적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로버 트 블라우너(R. Blauner)는 그의 책 『소외와 자유』(1964)에서 소외를 “특정한 종 류의 사회배열에서부터 나온 개인적 경험의 질(質)”(Blauner, 1964: 15)이라고 비 슷하게정의내린다. 비록그가행한방대한조사덕분에소외의원인을“대규 모 조직으로의 고용, 모든 산업 사회에서 만연한 비인간적인 관료화”(Blauner, 1964: 3)에서 찾음에도 말이다.

그 후 미국 사회학에서는 소외를 일반적으로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간에 산업생산 시스템과 연결된 문제, 인간 의식에 미치는 영향의 문제로 보았다 (Heinz, 1992: 217). 이러한 접근법의 큰 변화는 궁극적으로 소외를 결정하는 역 사적·사회적 요인들에 대한 분석을 약화시키거나 심지어 제외해, 소외를 사회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병리학적 증상으로 개인수준에서 치유될 수 있다는 과 잉심리학을 만들어 냈다(Geyer and Schweitzer, 1976: xxi-xxii; Geyer, 1982: 141). 마 르크스주의 전통의 소외 개념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비 판에 기여한 반면, 사회학 영역으로 제도화되면서 소외는 사회규범들에 적응하 지 못하는 개인적 현상으로 축소되었다. 같은 방식으로, 철학영역에서 가지고 있던 소외개념의 비판적 영역[심지어 소외개념은 결코 초월할 수 없는 한계 (horizon)를 지닌다고 생각했던 저자들에게도]은 이제 환상에 불과한 중립성에 길 을 내주게 되었다(Geyer and Schweitzer, 1976: xx-xxi).

이런 변형의 또 다른 결과는 소외개념의 이론적 빈곤화였다. 인간의 노동행 위와 사회적 지적 존재에 관련된 복잡한 현상으로서의 소외는 학문적 연구의 전문화에 따라 쪼개진 부분적 범주가 되었다(Schweitzer, 1996: 23). 미국 사회학 자들은 방법론적 선택으로 소외에 대한 연구를 어떤 정치적 함축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과학적 객관성을 확립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비정치 적인 ‘변화’는 실제로는 탈이데올로기와 가치중립성이라는 펼침막 뒤에 숨어 서 지배 가치들과 사회 질서를 지지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인 함축성을 띠 고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와 미국 사회학에서의 소외 개념의 차이점은, 마르크스 주의가 정치적이고 미국 사회학이 과학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이 론가들은 미국 사회의 헤게모니적 가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인 반면 미국 사회 학자들은 현존하는 사회질서의 가치를 세련되게 인간 종족의 영원한 가치라고 치장하며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Horton, 1964: 283-300; Schweitzer, 1996: 23). 미국 학계에서 소외 개념은 정말로 왜곡되었고 소외 개념이 그토록 오랫동안 극복하기 위해 겨냥하고 있던 바로 그 계급의 옹호자로 사용되는 것으로 끝나 버렸다(Horton, 1964).15)

7. 『자본론』과 그 예비적 수고들에서의 소외
마르크스 자신의 저작이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역할 을 했다.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 나타난 초기 강조점들은 새로운 저작들 이 출판되면서 방향이 이동했고 마르크스 사상의 발전과정을 보다 정확하게 재구축할 수 있게 했다. 1880년대 후반기 동안 마르크스는 더는 ‘소외’라는 개념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 주된 예외는 그의 첫 번째 책으로 엥겔스와 함께 저술한 『신성가족』 (1985)인데, 부르노와 에드가 바우어에 대한 논쟁들로 이뤄져 있다. 또 역시 엥 겔스와 함께 저술한 『독일 이데올로기』(1845-1846)의 한 문장 정도다. 한때 마 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를 출판하겠다는 생각을 버렸기 때문에 그는 1847 년 브뤼셀의 독일노동자동맹에서 행한 강의에 기반을 둔 논문들을 묶은 『임금 노동과자본』에소외이론을소개했다. 그렇지만소외개념그자체는이책에 서 나타나지 않는다. 소외 개념은 그가 겨냥하고 있던 청중들에게는 너무 추상 적인 소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이 노동자 “자 신의 삶의 행위” 속에 포함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것으로 표현된다고 썼다. 노동력은 “살아가기 위해” 팔 수밖에 없도록 강요된 상품이 다. 그리고 “노동자의 활동에서 나온 생산물은 노동자 활동의 목적이 아니 다”(Marx, 1977: 202).

12시간 동안 천을 짜고 실을 뽑고 구멍을 뚫고 선반을 돌리고 집을 짓고 땅을 파고 돌을 깨고 짐을 나르는 등의 일을 하는 노동자 ― 이 노동자에게 이 12시간 동안의옷감짜기, 실뽑기, 구멍뚫기, 선반작업, 집짓기, 삽질, 돌깨기등이 자기 삶의 발현이자 삶으로 여겨지겠는가? 그와 정반대이다. 그에게 있어서 삶이 란 이러한 활동이 멈출 때, 즉 식탁에서 선술집 의자에서 침대에서 시작된다. 이 와는 반대로 그에게 있어서 12시간의 노동은 옷감 짜기, 실 뽑기, 구멍 뚫기 등으 로서의 의미는 전혀 없고 그를 식탁으로 선술집 의자로 침대로 데려다 주는 벌이 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을 뿐이다. 만일 누에가 애벌레로서의 자신의 목숨을 이어 가기 위하여 실을 뽑는다면 그 누에는 영락없는 임금 노동자일 것이다(Marx, 1977: 203).

1850년대 후반까지 마르크스의 저작에는 소외 이론에 대한 언급이 없다. 1848년 혁명의 패배로 마르크스는 런던으로 망명가야 했다. 런던에서 그는 몇 몇 역사적 주제에 관한 짧은 저작16)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힘을 정치경제학 연 구에 집중했고 다른 책을 출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경제학에 대해 다시 저술을 시작했을 때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그룬트리세』로 더 잘 알려진)에서 그는‘소외’ 개념을한번이상사용한다. 이글은많은측면에서『1844년경제 학 철학 수고』의 분석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거의 10년간 영국 도서관에서의 연구는 그 분석이 훨씬 더 통찰력 있는 것이 되도록 했다.

여기에서 생산물의 사회적 형태, 생산에서 개인들의 역할 및 활동의 사회적 성격은 개인들에게 낯설고 객관적인 것으로 개인들 상호 간의 관계가 아니라 그 들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무차별적인 개인들 간의 상호 충돌에서 발생하는 관계로 개인들과 대면한다. 각각의 개인들에게 핵심 조건이 된 활동들과 생산물 들의 일반적 교환―그들의 상호연관성―은 그들에게는 낯설고 자율적인 하나 의 사물로 나타난다. 교환가치에서, 인간들의 사회적 연계는 사물들의 사회적 관 계로 전환된다. 인간의 능력이 객관적 부(wealth)로 전환된다(Marx, 1993: 157).『그룬트리세』의 소외 개념은 경제적 범주들에 대한 발전된 이해와 더욱 엄 격한 사회적 분석으로 더욱 풍부해졌다. 소외와 교환가치 사이에 형성된 연관 이이중요한측면을보여준다. 그리고현대사회의소외현상에대한가장뛰어 난 구절 중의 하나에서 마르크스는 소외를 자본과 “산 노동력” 사이의 적대에 연결한다.

살아 있는 노동의 객관적 조건들이 주체적 존재로서의 살아 있는 노동 능력에 대하여 분리되고 독립된 가치들로 나타난다. … 살아 있는 노동 능력의 객체적 조건들은 살아 있는 노동 능력에 대하여 자립적인 실존으로 전제되었고, 살아 있 는 노동 능력과는 구별되고 이에 대하여 자립적으로 마주 서는 주체의 객체성으 로 전제되었다. 따라서 재생산과 실현, 즉 이 객관적 조건들의 확대는 동시에 이 들을 노동 능력에게 무차별적이고 자립적으로 마주 서는 낯선 주체의 부(wealth) 로서 재생산하고 신규로 생산하는 것이다. 재생산되고 신규로 생산되는 것은 살 아있는노동능력에대하여자립적인, 즉낯선주체에게속하는것들로서의현 존이다. 노동의 객관적 조건들이 살아 있는 노동 능력에 대하여 주체적 실존을 획득하는 것이다. 즉 자본이 자본가로 된다(Marx, 1993: 461-462).

『그룬트리세』가 마르크스의 소외에 대한 원숙한 이해를 표현하는 유일한 저 술은 아니다. 5년 후 『직접적 생산 과정의 결과들』 ― 또한 ‘『자본론』 제1권: 제1편 제4장, 미출판’(1863-1864)로 알려짐 ― 은 소외에 대한 경제적 분석과 정 치적 분석을 더욱 밀접하게 결합시켰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지배는사물의인간에대한지배, 죽은노동의산노동에대한지배, 생산품의 생산자에 대한 지배”(Marx, 1976: 990)라고 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사 회적 생산성이 자본의 물질적 속성으로 전환”(Marx, 1976: 1058)됨으로써 “노동 의 물질적 조건이 노동자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그것들에 의해 지배받는”(Marx, 1976: 1054) 형태로 나타나는 사실상 “사물의 인격화와 인간의 사물화”가 존재한다.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현실에서는

돈이 사물이 아니듯 자본도 사물이 아니다. 돈이 그러하듯이, 자본에서는 사람 들 사이의 특정한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사물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로 보이게 한다. 혹은 특정 사회적 관계가 사회에서 사물의 자연적 특성으로 보이게 한다. 임금에 의존하는 계급이 없다면, 개인들은 서로를 자유로운 인간들로 대면한다. 잉여가치의 생산도 없다. 잉여가치의 생산이 없다면 자본주의 생산도 없고 따라 서 자본도 자본가도 없다! 자본과 임금노동(이것은 우리에게는 노동력을 판매한 노동자들의 노동을 가리킨다)은 단지 동일한 관계의 두 측면을 표현할 뿐이다. 돈은 노동자 자신들이 판매하는 상품인 노동력을 얻기 위해 교환되지 않는다면 자본이될수없다. 반대로노동은노동이직면하는그자체의물질적조건이 자율적인 힘, 소외된 물건, 스스로 존재하고 유지하는 가치, 즉 간단히 말해 자본 일때만임금노동일수있다. 만약자본이, 그자체의물질적측면에서예를들면 그 자신의 존재를 가지고 있는 사용가치라는 측면에서, 자신의 존재가 노동의 물질적 조건들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이런 물질적 조건들은 동등하게 그리고 공 식적으로 노동을 소외되고 자율적인 힘이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산 노동을 단지 어떻게든 자신을 유지하고 증가시킬 수 있는 하나의 도구로 취급하는 가치 ― 대상화된 노동―로서 직면한다(Marx, 1976: 1005-1006. 강조는 마르크스).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인간 노동은 자본의 가치증식 과정의 한 도구가 되 었는데 이것은 “산 노동력이 자본의 물질적 구성으로 포함됨으로써 자본은 살 아 있는 괴물이 되고 …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Marx, 1976: 1007)했다. 이 구조는 생산과정에서의 협력, 과학적 발전과 기계의 도입―그 런데 이 모든 것은 집단 전체에게 속한 사회적 과정임 ― 이 자본주의 질서 아 래 놓인 노동자들에게는 마치 자본의 힘이 자연적인 특성인 것으로 여기게 될 때까지 그 규모를 확대했다.

생산적인 힘들은 … 사회적 노동에 의해 전개되는 … 자본주의의 생산력들로 나타난다. […] 협동과 노동분업의 결합, 자연과 과학의 이용, 기계 같은 노동 생 산물의 이용 등 집단적 단위들 모두가 무언가 소외되고 대상화되며 이미 주어진 것으로 노동자의 개입 없이도 존재하고 자주 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인 것으로 개 별 노동자들과 대면한다. 자본주의의 생산적 힘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노동자 들에게 독립적인 대상으로서 노동도구들의 지배적인 형태로 모두 매우 단순하게 나타난다. 작업장은 일정 정도 노동자들의 결합체임에도 불구하고 작업장 내에 서의 모든 지능과 의지는 자본가들이나 그 대리인들에게 속한 것으로 보이고 노 동자들은 자본주의에 존재하는 자본의 기능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Marx, 1976: 1054. 강조는 마르크스).

그런데 이 자본의 과정이 무언가 ‘매우 신비한’ 것이 되어 “이러한 노동 조 건들이 노동자들 앞에 사회적 강제로 산적해 있고 이들 노동조건은 자본화된 형태를 띤다”(Marx, 1976: 1056). 1960년대 초반, 『자본론 제1권, 제1편, 제4장, 미출판』(1863-1864)의 보급과 무엇보다도 『그룬트리세』의 보급(Musto, 2008: 177-280)은 사회학과 심리학에서 우세했던 개념과는 다른 소외 개념을 위한 길을 열었다. 이것은 현실에서의 소 외를 극복하기에, 즉 사회운동들과 정당 그리고 노동조합이 노동계급의 노동 및 생활조건 개선하기에 적합한 개념이었다. 이 책들의 출판은 (1930년대 『1844 년 경제학 철학 수고』의 출판 이래) 마르크스의 소외에 대한 저술의 “제2세대”라 고 생각할 만하다. 이는 소외에 대한 새로운 연구에 논리적인 이론적 기반을 제공해주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당시에 세계적으로 폭발했던 엄청난 정치 적·사회적 운동에 반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발판이 되었다. 소외는 철학자의 책들과 대학의 강의실을 떠나 거리와 노동자 투쟁 공간들로 향했고 부르주아 사회 전체에 대한 비판이 되었다.

8.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탈소외
마르크스의 소외에 대한 가장 뛰어난 사고는 『자본론』의 유명한 부분인 ‘상 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에 담겨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 들이 자신들이 창출한 생산품에 의해 지배되는 것을 보여줬다. 여기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사람들 사이의 직접적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 사람들 사이의 물질적 관계이고 물건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Marx, 1981a: 166)이다.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 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사물들의 사회적인 자연적 속성]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 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즉, 사물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와 같은 치환 (substitution)에 의해 노동생산물은 상품으로 되며, 감각적임과 동시에 초감각적 인 것 즉 사회적 사물이 된다. […] 인간의 눈에는 물건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 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실상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 나지않는다. 그러므로그비슷한예를찾아보기위해우리는몽롱한종교세계 로들어가보지않으면안된다. 거기에서는인간두뇌의산물들이스스로의생 명을 가진 자립적인 인물로 등장해 그들 자신의 사이 그리고 인간과의 사이에서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마찬가지로 상품세계에서는 인간 손의 산물들이 그와 같이 등장한다. 이것을 나는 물신숭배(fetishism)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노동생산 물이 상품으로 생산되자마자 거기에 부착되며, 따라서 상품생산과 분리될 수 없 다(Marx, 1981a: 164-165).

이 정의에 내재한 두 요소는 지금까지 토론한 저자들이 가진 소외 개념과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 사이에 분명한 차이점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첫째, 마르 크스는 물신숭배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현상으로, 마음의 문제가 아닌 실제 권력의 문제로, 객체를 주체화하는 변환의 결과로 시장경제에 형성된 특 정형태의 지배로 생각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소외에 대한 분석은 개별 여성 과 남성들의 불안으로 한정되지 않고 그 기반이 되는 사회적 과정들과 생산행 위들로 확대된다. 두 번째, 마르크스의 물신숭배는 생산의 정확한 역사적 실체 인 임금노동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과 사물들 사이의 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형태를 띤 하나의 객관성으로서 상품형태와 사람 사이 의 관계다.부르주아 사회에서 인간성과 인간관계는 물건들 사이의 성격과 관계로 변한 다. 루카치가 물화(reification)라고 부른 이 이론은 인간관계라는 시점에서 소외 를 표현했다. 반면, 물신숭배 개념은 소외를 상품들의 관계로 다뤘다. 마르크스 의 후반기 저서들에서 소외 이론이 나타났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들에게는 안 된일이지만, 상품의물신적성격이소외를대체한것이아니라소외의한측면 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자본론』 및 그와 연관된 저서들에 이르는 이론적 발전은 단지 소외에 대한 그의 사고를 보다 정확하게 한 것만을 의미하 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수 단들도 재정립되었다. 1844년에 그는 인간존재는 사유재산과 노동분업을 폐지 함으로써 소외를 없앨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자본론』과 그 예비적 수고들에서 제시되어 있는, 소외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로 가는 길은 보다 복잡하다. 마르크 스는 자본주의는 자본과 자본이 강요한 조건들에 노동자들이 지배받는 체제라 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는 더욱 발전된 사회를 위한 기반을 창조하고 자본주의의 혜택을 일반화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열어 놓은 사회 발전의 더욱 빠른길을통해인류가진보할수있을것이라보았다. 마르크스에따르면소수 를 위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노동자 다수 대중에 대한 수탈과 착취를 발생시 키는 체제는 반드시 “생산수단이 공동으로 소유되며 많은 다양한 형태의 노동 력이 완전한 자각 하에서 하나의 사회적 노동력으로 확장되는 자유인들의 연 합”(Marx, 1981a: 171)으로 대체해야 한다. 이런 형태의 생산은 임금 노동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노동을 결정하는 요인들을 집단적 지배 아래 둘 것이며 노동 을 진정으로 사회적 행위로 바꾸기 때문이다. 이는 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 한 투쟁”과는 정반대에 있는 사회 개념이며 이런 사회의 건설은 단지 정치적 과정뿐 아니라 생산영역에서의 전환도 결합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노동 과 정의 변화는 그 한계가 있다.

이 영역에서 자유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사회화된 인간, 결합된 생산자들이 자연과의 신진대사를 합리적으로 지배함으로써 그 신진대사 가 맹목적인 힘으로써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신진대사를 집단 적인통제아래두는것, 그리하여최소의노력으로그리고인간성에가장가치 있고 알맞은 조건들 아래 그 신진대사를 수행하는 것이다(Marx, 1981b: 959). 이 자본주의 이후의 생산체계는, 과학기술의 진보와 노동시간 단축의 결과 로 자본과 이에 결합된 자본법칙들에 의해 지워진 강제적이고 소외된 노동이 필요의 멍에를 넘어 점차 의식적이고 창조적인 행위로 대체되는 새로운 사회 형태를 창출할 가능성을 만들어낼 것이고, 그 사회에서는 사회관계들이 상품과 돈의 법칙에 의해 무작위적이고 무차별적으로 교환되는 것이 폐지될 것이다.17) 그 사회는 더는 자유로운 자본의 영역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 자유의 영역이다.

(번역 최용찬)
(2011년 4월 11일 투고, 4월 18일 심사, 5월 2일 게재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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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마르크스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 는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마르크스 저작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수고는 매우 자주 토론되었고, 또 그 저자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이 수고가 나타내는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1932년 첫 판본의 출판으로 시작된 이론적이고 정치적 논쟁과 함께, 많은 논평자들이 마르크스의 젊은 시절에서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 간주하는 것에 대한 오해를 낳는 데 기여하였다. 이 논문은 마르크스가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체류하던 당시의 지적 풍조와 그곳에서 시작한 경제학 연구에 관해 설명한 뒤에 이 주요한 발전의 시기에 그가 성취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거대한 성숙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와 그와 병행했던 정치경제학자들의 저작에서 발췌한 노트들 간의 밀접한 관계도 검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1843년 가을부터 1845년 1월까지 파리에서 작성한 마르크스의 수고들과 발췌노트의 연대기적 순서를 만든 표를 제시하겠다.

1. 파리: 신세계의 수도
파리는 “하나의 괴물 같은 기적, 운동들과 기계 그리고 관념들의 놀라운 조합(assemblage), 수많은 여러 로맨스들의 도시, 이 세계의 생각-상자이다”(Balzac, 1972: 33). 이것은 발자크가 자신의 소설 중 하나에서 파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거대도시의 영향을 묘사한 것이다. 1848년 혁명 이전의 기간 동안, 이 도시에는 끊임없이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는 장인들과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망명자들, 혁명가들, 작가들과 미술가들의 거류지들, 그리고 광범위한 사회적인 소요로부터 파리는 다른 시대에는 얻을 수 없는 강렬함을 얻었다. 매우 다양한 지적 재능을 가진 남녀들이 책, 잡지와 신문을 출간하고, 시를 쓰고, 회합에서 연설하고, 그리고 카페에서, 거리에서, 공원 벤치에서 끝없이 토론하였다. 그들의 밀접한 근접성은 서로 간에 지속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했다(Berlin, 1963: 81f.).

바쿠닌은 라인 강을 건너기로 결심하자마자 갑자기 “정치적 관념들이 사회의 모든 계층들 사이에서 순환하는 분위기에 휩싸였던 독일에서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새로운 요소들 사이에” 자신이 처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Bakunin, 1982: 482). 폰 슈타인은 “대중들의 삶 자체가 새로운 결합을 창조하고 새로운 혁명을 사고하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적었다(von Stein, 1848: 509). 루게는 “파리에서 우리는 승리하거나 아니면 패배할 것”이라는 관점을 지녔다(Ruge, 1975: 59). 요약하면 파리는 역사상 특별한 순간에 있는 곳이었다.발자크에게 “파리의 거리들은 인간적 특징과 우리가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인상들을 남기는 관상을 가졌다”(Balzac, 1972: 31). 이런 인상들 중 많은 것들이 또한 25살의 나이로 1843년 10월에 그곳에 온 마르크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인상들은 파리 체류 시기에 결정적으로 성숙했던 마르크스의 지적 진화에 심오한 영향을 남겼다.

≪라인신문≫에서 언론가로서의 경험을 한 뒤에 마르크스가 헤겔의 이성적 국가와 이와 관련된 민주적 급진주의라는 개념적 지평을 폐기한 것은 프랑스의 수도에 어떤 하나의 이론적 입장을 지니고 왔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 이론적 입장은 이제 프롤레타리아트의 뚜렷한 모습에 의해 흔들렸다. 새로운 사회-경제적 현실의 급속한 강화를 보여주는 그 시대의 문제적 분위기가 만들어낸 그 불확실성은 마르크스가 파리 노동자계급과 그들의 생활 및 노동 조건들을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접하고 나서 소멸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발견과 그들을 통한 혁명의 발견; 여전히 불명확하게 정의되었고 반쯤은 공상적인 공산주의에 대한 새로운 헌신; 헤겔의 사변철학과 헤겔 좌파에 대한 비판; 역사의 유물론적 해석에 관한 최초의 윤곽과 정치경제학 비판의 시작: 이런 것들이 마르크스가 이 시기에 발전시킬 기본적 주제들이다. 파리의 체류기간 동안 작성한 소위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라는 유명한 초기 텍스트에서의 비판적 해석보다 조금 앞서 작성한 일련의 노트들은 주로 철학적 문제에 집중했다.

2. 정치경제학에 정착하기
≪라인신문≫에서 일했을 때 마르크스는 이미 특별한 경제적 문제들을 다루었지만, 항상 법적 혹은 정치적 관점에서였다. 결과적으로 1843년 크로이츠나흐에서 발전시켰던 관념들 ― 이 관념들은 〚헤겔법철학 비판 서설〛의 원천으로서 그 속에서 시민사회는 정치적 국가의 실질적 근거로 표현된다 ― 에서 마르크스는 최초로 사회적 관계에서 경제적 요소의 중요성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에 대한 의식적인 비판적 연구”를 시작한 것은 오직 파리에서였다(Marx, 1975d: 231). 법과 정치 영역의 모순들은 자신들의 영역 자체 내에서는 풀 수 없다는 것과 법과 정치 둘 다 사회적 문제들에 해결책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에서 결정적 추진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개요”(『독불연보』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간행본에 실린 그의 두 논문 중 하나)도 이 시기의 마르크스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때까지 주로 철학적, 정치학적, 역사적이었던 마르크스의 연구는 이후 과학적 관심의 지주가 되고, 결코 포기하지 않을 새로운 지평이 될 새 분야로 변경되었다(예를 들면, Rubel, 1968: liv~lv).

모제스 헤스의 “화폐의 본질”과 그의 사변에서 사회-경제적 지평으로의 소외 개념의 치환에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는 먼저 인간의 본질 실현에 대한 장벽으로서 화폐의 경제적 매개(기능)에 대한 비판에 집중했다. 브루노 바우어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마르크스는 유대인 문제를 자본주의 문명 전체로서 철학적, 사회-역사적 전제를 나타내는 사회적 문제로 간주했다. 유대인은 자본주의 문명이 생산한 관계의 은유이자 역사적 전위였고,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와 동일한 세계적 존재였다(Tuchscheerer, 1968: 56).

그 직후 마르크스는 새로운 연구 분야에서 방대한 양의 독서를 시작했고, 몇 가지 실례가 증명하듯이, 수고들과 보통 때처럼 독서한 재료에서 편집한 발췌와 노트의 노트북들에 구두점을 찍었다. 그의 작업의 지표는 정치경제학의 가장 거대한 신비화 ― 정치경제학의 범주들이 모든 시기, 모든 장소에서 유효하다는 생각 ― 를 폭로하고 반대하는 것이었다. 자기 시대의 경제적 조건들의 비인간성을 자연적 사실로 제시하며 이를 숨기고 정당화하려 했던 경제학자들의 맹목성과 역사적 감각의 결여에 대해 마르크스는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세이의 한 저작에 대한 논평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적 소유는 그 구성이 정치경제학에 관계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정치경제학이 그것의 기초인 어떤 사실이다. … 그러므로 정치경제학 전체는 필연성이 결여된 하나의 사실에 근거한다”(Marx, 1981: 316). 유사한 논평들이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은 사적 소유라는 사실과 함께 시작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 경제학자는 연역해야 할 것을 사실과 사건의 형태로 가정한다”(Marx, 1975d: 270~271).

그래서 정치경제학은 사적 소유의 체제, 연관된 생산양식과 그에 조응하는 경제적 범주를 영원불변한 것으로 간주한다. 부르주아 사회의 인간은 마치 자신이 자연적 인간인 것처럼 현상한다. 요약하면, “사람들이 사적 소유에 대하여 말할 때,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을 다루는 것으로 생각한다”(Marx, 1975d: 281). 이런 존재론적 전환에 대한 마르크스의 거부는 더 이상 명확하게 할 수 없었을 만큼 분명했다.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깊은 연구는 그에게 사회 구조의 시간적 진화에 대한 첫 번째 열쇠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사적 소유를 자연권으로 보는 관념에 대해 비판한 것을 포함하여 그가 프루동의 최고의 통찰이라고 여긴 것들을 마르크스는 또한 흡수하였다(Proudhon, 1890: 44f.). 이런 토대들을 통해 마르크스는 역사의 일시적 성격에 대한 주요한 인식론적 파악을 성취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법칙들을 인간 사회의 영원한 법칙으로 표현했다. 대조적으로 마르크스는 그의 시대의 특수한 관계, “산업의 파열된 세계”를 연구의 배타적이고 명확한 주제로 삼았다(Marx, 1975d: 292). 그는 역사에 의해 생성된 하나의 단계로서 그 일시성을 강조했고, 자본주의가 산출한 모순들과 자본주의의 지양으로 이끌 모순들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상이한 이해 방식은 중요한 결과를 낳았는데, 그 중 으뜸은 소외된 노동의 개념과 관련된 것이었다. 소외된 노동이 자연스럽고 불변의 사회적 조건이라고 본 경제학자들이나 헤겔 그 자신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소외의 인류학적 차원을 거부하고 생산의 특정 구조와 사회적 관계 안에서 역사적으로 뿌리내린 개념, 즉 산업적 노동의 조건들 사이에서 인간의 소외라는 개념을 선호했다. 제임스 밀에서 마르크스가 발췌한 노트는 어떻게 “정치경제학이 사회적 교류의 소외된 형태를 인간의 본성에 조응하는 본질적이고 원천적 형태로 정의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마르크스에게 소외된 노동은 노동자 생산의 객체화라는 하나의 불변의 조건이기는커녕 “인간을 기계적 도구로 바꾸고 … 정신적, 육체적 괴물로 변형시키는” 현재의 노동분업의 제약 내에서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표현한 것이었다(Marx, 1975c: 217, 220).

개인들의 노동 행위에서 자신의 특수성, 즉 자신에게 특유한 필요의 활성화가 확인된다. 그러나 “이 노동의 실현은 노동자에게 비실현로 현상한다”(Marx, 1975d: 272). 노동은 인간적 확인, 즉 자유로운 창조 활동일 수 있지만, “사적 소유를 전제하면, 나의 개성은 소외되어 이 활동이 참으로 나에게 해로운 것, 고문, 차라리 활동의 외양만 띤 것이 될 정도다. 또한, 그래서 노동은 오직 강요된 활동 그리고 오직 끝없는 우연적 필요를 통해서만 나에게 부과되는 활동이다”(Marx, 1975c: 228).

마르크스는 경제학의 유력한 이론들을 수집하고, 그 구성요소들을 비판하고, 그 결론들을 전도시켜서 이런 결론들에 도달했다. 이 작업에 강도 높고 끈질긴 노력을 쏟았다. 파리에 살고 있던 마르크스는 독서 재료에 굶주려서, 밤낮을 그 재료의 독서에 쏟아 부었다. 마르크스는 열정과 기획들로 충만한 사람이어서, 그가 구상한 작업 계획들은 너무 거대해서 결코 끝까지 해낼 수 없을 정도였고, 탐구 대상과 관련해서는 모든 문서들을 연구하였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지식을 번개같이 빠르게 진보시키는 데, 그리고 잠시 동안 자신을 새로운 지평들로 이끄는 변화하는 관심사, 더 많은 결심들과 더욱 더 많은 연구 분야들에 몰두하고 있었다.

세느 강의 왼쪽 강둑에서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의 초고를 계획했고, 국민공회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프랑스혁명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기존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원칙들의 비판을 의제로 삼았다. 그 다음에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에 미친 사람처럼 몰두했는데, 그것은 독일에서 바우어 등의 초월적 비판주의 영역을 최종적으로 청산하는 과제보다 갑자기 우선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중단하고 『 신성가족』이라는 최초의 완성 출판물을 작성했다. 그런 후에 또 다른 100개의 기획들에 몰두했다: 만약 비판이 하나 이루어진다면 그 비판은 그의 두뇌를 통과하고 그의 펜을 통과하였다. 헤겔 좌파 중에서는 가장 다작인 청년은 그럼에도 나머지 많은 다른 사람들보다 여전히 적게 출판했었다. 마르크스의 모든 작업을 특징짓게 될 미완성이라는 점은 파리에서의 작업에서 이미 나타났다. 열 가지 다른 방법들로 증명할 수 없다면 한 문장도 쓰지 않는 마르크스의 꼼꼼함에는 어떤 굉장한 것이 있었다. 자신의 정보가 부족하고 판단이 미숙하다는 자신의 믿음 때문에 마르크스는 착수한 연구의 많은 부분을 출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은 개요와 단편들의 형태로만 남았다. 마르크스의 노트들은 그래서 극단적으로 정확하다. 그 노트들은 마르크스의 연구의 범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고, 그 자신의 일정한 성찰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의 전체 작업의 통합적 일부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수고들과 독서 노트들이 그가 저술한 것과 다른 사람들의 저작에 대한 논평들 사이의 밀접하고도 분리할 수 없는 고리를 증명하는 시기인 파리 시절에도 또한 진실이다.

3. 수고들과 발췌노트들: 1844년의 문헌들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의 불완전하고 단편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읽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나타내는 문헌학적 문제들을 무시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한다(Rojahn, 1983: 20). 이것은 1932년에서야 처음으로 온전히 출판되었다 ― 더욱이 두 편의 분리된 판본으로. 사회민주당의 학자 란트슈트와 메이어에 의해 역사유물론이란 명칭으로 편집된 판본에서는 “경제학과 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Marx, 1932a: 283~375), 반면 MEGA에서는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였다(Marx,1932b: 29~172). 이 둘은 제목뿐 아니라 내용도 달랐고, 구성의 순서도 크게 차이가 났다. 란트슈트-메이어 판본은 원본 수고들에 대한 빈약한 독해 때문에 실수들이 가득한데, 첫 번째 수고 집단, 즉 소위 제1수고를 포함하지 않았고, 실질적으로 헤겔의 『 정신현상학』의 것을 제4수고로 즉 마르크스의 것으로 돌리는 잘못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사실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MEGA에서도 편집자들은 또한 수고의 제목을 선택하는 데서, 초두에 서문을 배치하는 데서(그것은 실제로 제3수고의 일부임), 그리고 전체 논문들을 그들의 방식으로 편집하는 데서 오류들을 범하여, 사람들이 마르크스의 의도가 항상 정치경제학을 비판하기 위해 저술하였고 원래 모든 것이 여러 장으로 나누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Rojahn, 2002: 33).

더욱이 마르크스가 이 텍스트를 오직 정치경제학의 저작들만 읽고 발췌한 후에 저술했다고 잘못 가정하였는데, 실제로는 구성 과정에서 수고들의 다른 집단들이 교차되어 작성되었고, 조응하는 발췌들도 『독불연보』를 위한 논문들에서부터 『신성가족』까지 파리 시절의 전 기간에 걸쳐 간격을 두고 작성되었다. 이 명백한 형식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다른 판본들의 출판에 따른 혼돈과 그리고, 무엇보다 제2수고(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흩어져 있는)의 많은 부분이 전체 집합에서 사라졌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해석자나 또는 새로운 판본의 편집자 중 아무도 원본의 재검토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재해석은 마르크스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사이에서의 논쟁에서 높은 비중을 가진 이 텍스트를 위해서 특별히 필요하다.

5월과 8월 사이에 씌어진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는 체계적이거나 사전에 조정된 방식으로 전개된 작품이 아니다. 그것이 하나의 정해진 방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 ― 마르크스 사상의 완전함을 발견하는 속성들이나 과학적 성숙기에 반대되는 명확한 개념화를 보여주는 속성들 ― 은 신중한 문헌학적 검토에 의해 반박되었다. 동질적이지도 심지어는 구성부분들 간에 밀접히 상호 관련되지도 않은 이 수고는 운동하고 있는 하나의 입장을 명백히 표현한 것이다. 우리에게 제시되는 200페이지가 넘는 발췌와 논평들로 이루어진 9권의 발췌노트를 면밀히 검토하면 마르크스가 읽은 독서 재료들을 흡수하고 이용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파리 노트는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과 조우한 흔적들과 그의 경제학의 가장 초창기에 이루어진 정교화의 구성 과정을 기록한다. 출판되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이 시기의 저술들과의 비교는 그의 사상의 발전을 위한 독서의 중요성을 결정적으로 증명한다. 정치경제학 발췌의 목록만으로 세이, 슈츠, 리스트, 오지안더, 스미스, 스카벡, 리카도, 제임스 밀, 맥컬록, 프레보스트, 데스툿 데 트레이시, 뷰렛, 드 브로길베어, 로, 로데데일의 텍스트들을 포함한다.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에서 그리고 그 시기의 마르크스의 논문과 편지들에서 우리는 또한 프루동, 슐츠, 피키, 라우동, 시스몽디, 가닐, 셔벌리, 맬더스, 더 폼페리, 벤담에 관한 언급들을 찾아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첫 번째 발췌를 세이의 『정치경제학 개론』에서 했는데, 경제학의 기초 지식을 습득하면서 전체 편들을 바꿔 썼다. 유일한 주석은 보통 이런 의도로 마련한 공간인 문제의 지면 오른쪽 편에 나중에 추가 되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서의 후속적 발췌도 경제학의 기초 개념에 대하여 마르크스가 친숙해지는 유사한 목표에 봉사하였다. 사실 이들이 가장 광범위한 발췌일지라도, 거의 논평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의 사상은, 문장들의 몽타주로부터 그리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종종 발생하는 경우처럼 여러 경제학자들의 다양한 명제들을 함께 놓는 그의 방법에서 명확하게 두드러진다. 그렇지만,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의 경우에 그림은 변하는데, 여기서 마르크스의 첫 번째이자 아직은 완벽히 일치하는 것으로 상정되는 가치와 가격의 개념들에 관한 논평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상품의 가치와 가격의 이런 균등화는 마르크스의 최초의 개념에 위치하는데, 이 균등화는 오직 경쟁에 의해 산출된 교환가치에 현실을 부여하고 자연가격을 순전한 환상으로서 추상의 영역에 위임한다. 이런 연구들이 진척되자 그의 비판적 논평들이 더 이상 간헐적이지 않고 그의 요약들에 끼워 넣어지게 되었으며, 이 저자에서 저 저자로 옮겨감에 따라 그의 지식과 함께 확대되었다. 개별적 문장들이, 다음에는 더 긴 비평들, 그리고 마지막에는 ― 제임스 밀의 『정치경제학 요강』과 관련하여 ― 인간에 대한 사물의 완전한 지배를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화폐의 매개에 대한 확대된 비판적 논평이 있었다; 여기서 발췌와 마르크스 자신의 텍스트간의 관계가 완전히 전도되어 전자가 후자를 통하여 간격이 멀어졌다.

한 번 더 발췌노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노트들이 그가 작성할 때나 이후에나 그에게 얼마나 유용했던가가 지적되어야 한다. 1844년에 그것들 중 일부가 파리의 독일 이민자들을 위한 격주간지 ≪다음 페이지!≫에 그 독자들의 지적 교육에 기여하기 위해 실렸다(Grandjonc, 1974: 61~62). 무엇보다 마르크스가 그의 발췌노트를 먼 훗날에도 다시 읽는 습관을 가졌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는 이 철저한 자료들을 〚그룬트리세〛뿐 아니라 『잉여가치 학설사』로 더 잘 알려진 1861~1863년 경제학 수고와 『자본론』 1권에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결론을 내리자: 마르크스는 그의 사상을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와 독서로부터의 발췌노트 양자에서 공히 발전시켰다. 그 수고는 인용들, 거의 직접적인 수집들로 채워져 있는 반면에 발췌노트는 주로 그 당시 독서하였던 텍스트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의 논평들도 부수되어 있다. 양자의 내용들, 장들을 열로 나눈 형식, 페이지 매김, 그리고 그들의 작성 시기는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가 홀로 설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마르크스의 비판적 생산의 부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증한다. 그 비판적 생산은 그가 연구한 텍스트들로부터의 발췌, 그 재료에 대한 비판적 숙고들, 그리고 그가 종이에 작성한, 단독으로도 괜찮거나 더 많은 사고들이 보태져야 하는 원고들로 구성되어 있다. 수고를 나머지와 분리하고, 그것들을 맥락과 분리시켜 일반화하는 것은 그래서 해석의 오류를 초해할지도 모른다. 오직 전체로 간주된 이 발췌노트들만이, 마르크스의 두뇌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원숙하였는지에 관한 역사적 재구성과 함께, 파리에서의 연구의 매우 강도 높은 해 동안 그의 사상의 여정과 복합성을 진실로 보여준다(Rojahn, 2002: 45).

4. 철학 비판과 정치학 비판
마르크스의 사상이 발전한 환경과 그 사상이 하나의 이론적이거나 실천적 수준에서 행사한 영향은 가장 간단한 주목을 마땅히 받을 만하다. 그것들은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변형의 시기였고,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의 숫자의 거대한 증가의 시기였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발견과 함께 마르크스는 헤겔주의 시민사회 개념과 결별하고 계급 용어로 갈 수 있었다. 마르크스는 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빈곤이 노동 조건에서 도출되기 때문에 ‘빈민’과 다른 새로운 계급이라는 인식을 획득했다. 과제는 부르주아 사회의 주요 모순들 중 하나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는 그가 더 많은 부를 생산할수록 더 빈곤해지고, 그의 생산은 위력과 크기에서 더 증대한다”(Marx, 1975d: 271~272).

1844년 6월의 실레지안 직공의 폭동은 마르크스에게 그의 사상을 발전시킬 마지막 기회를 허용하였다. ≪다음 페이지!≫에 실린 「‘프러시아 왕과 사회개혁. 한 프러시아인 것에 의한’이라는 논문에 대한 비판적 주변적 논평」에서, 마르크스는 루게에 관한 비평문과 자신이 그 폭동이 정치적 정신이 부족한 것으로 보았던 이전의 논문에 관한 비평문을 사용하여, 헤겔의 국가를 일반이익의 유일한 대표자로 만들고 시민사회의 어떠한 운동도 부분적 이익의 사적 영역으로 격하시키는 개념화로부터 멀리 떠났다(Löwy, 2003: 29~30). 반대로, 마르크스는 “하나의 사회 혁명은 전체의 관점을 가진다는 것을 발견하였고”(Marx, 1975c: 205), 실레지아 사건들의 자극 아래 그것들의 상당하고 명시적인 혁명적 성격과 함께 그는 사회적 병폐의 뿌리를 “국가의 본질적 성격에서 찾지 않고 특정한 국가의 형태에서 찾는”(Marx, 1975c: 197) 사람들의 엄청난 잘못을 강조하였다.

더 일반적으로, 마르크스는 사회 개혁(그 당시 사회주의 학설의 목표), 임금 평등, 자본주의 체계 내에서의 노동의 재조직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이 싸우는(프루동) 가정들의 포로이고 또는 무엇보다 사적 소유와 소외된 노동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비록 사적 소유가 소외된 노동의 이유, 원인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오히려 소외된 노동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적 소유는 소외된 노동의 산물, 결과, 필연적 귀결이다”(Marx, 1975d: 279). 그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의 이론들과 반대로 마르크스는 경제 체계의 근본적 변형 ― “바로 자본 ‘그 자체’가 폐지되어야 하는 것”인 기획 ― 을 제안했다(Marx, 1975d: 294).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학설이 그의 자신의 사상에 더 밀접해지는 것으로 느낄수록, 그는 명쾌함에 대한 필요를 더 강렬히 느꼈고, 그 학설들에 대해 더 날카로이 비판하게 되었다. 자신의 개념화는 끊임없이 마르크스를 주변의 사상들과 자신이 진행 중인 연구 결과들 간의 지속적 비교로 이끌게 하였다. 그가 완성시키는 속도는 이 비교를 필수작업으로 만들었다. 똑 같은 운명이 헤겔 좌파에게 닥치려고 하고 있었다. 참으로 그 주요 옹호자들에 대한 마르크스의 판단들은 가장 엄격하였다. 왜냐하면 그 판단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자기비판을 표현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브루노 바우어가 편집하는 월간지 ≪일반 문학 신문≫은 지면에서 단호히 선언하였다: “비판은 그 자신이 사회의 고통과 쾌락에 연루되는 것을 삼가게 한다. … 그는 혼자 장엄하게 상세히 비평한다”(Bauer, 1844: 32). 대조적으로 마르크스에게 “비판은 열정 없이 두뇌로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 그것은 수술용 칼이 아니라, 무기이다. 비판의 대상은 적이며, 그 원하는 것은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절멸시키는 것이다. … 비판은 더 이상 목적 그 자체로가 아니라 단지 수단으로서 드러난다”(Marx, 1975a: 177). 소외를 인식하는 것이 이미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라는 하나의 추상적 신념으로부터 시작하는 “비판적 비판(critical criticism)” 이라는 유아론(solipsism)에 반대하여, 마르크스는 “물질적 힘은 반드시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는 것, 사회적 존재는 오직 인간의 실천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인간의 소외된 조건을 발견하고 의식하게 되는 것은 동시에 그것의 실질적 제거를 위해 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무익한 전투만 낳을 뿐인 사변적 고립에 갇힌 철학과 “백병전에서의 비판”(Marx, 1975a: 182, 178)인 철학의 비판 사이에는 거대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자유로운 노동에 대한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자기의식에 대한 요구를 분리시키는 심연이다.

5. 결론
마르크스의 사상은 파리 체류 동안 결정적 진화를 겪었다. 그는 이제 세계를 변형하는 것은 “철학이 이 문제를 단지 이론적인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풀 수 없는”(Marx, 1975d: 302) 하나의 실천적 문제라는 것을 확신했다. 마르크스는 이런 인식에 도달하지 않은 철학과는 영원한 작별을 고했고 실천의 철학으로 필연적 전환을 하였다. 이제부터 그 자신의 분석은 출발점을 소외된 노동이라는 범주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비참한 실존이라는 현실로부터 취했다. 마르크스의 결론들은 사변적이지 않고 혁명적 행동을 지시했다(Mandel, 1971: 210).

마르크스의 정치 개념 자체가 심오하게 변했다. 당시의 좁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학설의 어느 것도 채택하지 않고, 그들과 참으로 멀리 떠난 반면, 마르크스는 경제적 관계가 사회의 연결망을 형성한다는 것과 “종교, 가족, 국가, 법, 도덕, 과학, 예술, 등이 오직 특정한 생산 양식이고, 그것의 일반법칙 아래 떨어진다는 것”(Marx, 1975d: 302)에 대해 완전한 이해에 도달했다. 국가는 헤겔의 정치 철학에서 가졌던 으뜸의 지위를 잃었다; 사회에 흡수되어, 국가는 결정하기보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한 영역으로 생각되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오직 정치적 미신만이 오늘날 여전히 시민 생활이 국가에 의해 지탱되어야한다고 상상하는 반면, 현실에서는 반대로 국가가 시민 생활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Marx and Engels, 1975: 121).

마르크스의 개념적 틀도 혁명의 주체와 관련하여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그는 시초의 “고통 받는 인간성”(Marx, 1982: 479)에 대한 언급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특수한 동일시로 이동하였는데, 처음에는 그것을 변증법적 반테제 ― 이론의 “수동적 요소”(Marx, 1975a: 183) ― 에 근거한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서 생각하였으나, 나중에 자신의 최초의 사회경제적 분석 후에는 자체의 해방의 능동적 요소로서, 자본주의 사회 질서에서 혁명적 잠재력을 수여받은 유일한 계급으로서 생각하였다. 그래서, 포이에르바흐의 공통의 인간 본질의 실현에 대한 장애물로 생각된, 국가의 정치적 매개와 화폐의 경제적 매개에 대한 다소 모호한 비판은, 그 속에서 물질적 생산이 현재에 대한 어떠한 분석과 변형을 위한 근거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역사적 관계에 대한 비판에 굴복하였다: “인간의 예속 전체는 노동자의 생산에 대한 관계에 연루되고, 모든 예속관계는 이 관계의 오직 변형과 결과일 뿐이다”(Marx, 1975d: 280). 마르크스가 제안하는 것은 더 이상 해방에 관한 일반적 요구가 아니라 실제 생산과정의 근본적 변형이다.

이런 결론들에 도달하자, 마르크스는 다양한 다른 연구를 계획했다. 『신성가족』 이후에 그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연구와 발췌를 계속했고, 슈티르너에 대한 비판을 개괄했고, 국가에 대한 연구의 줄거리를 그렸고, 헤겔에 관한 일련의 노트를 작성했고, 조만간 완성하게 될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에 대한 비판의 초고를 준비했다.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엥겔스가 “하늘에 맹세코 지금이 적기이다!”라며 마르크스에게 그의 재료를 출판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Marx and Engels, 1982; E–Marx, beginning of October 1844, 6). 그리고 마르크스가 파리에서 추방당하기 전에, 레스케라는 출판업자와 “정치와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두 권의 책을 출판하기로 계약했다. 그렇지만, 1859년에 그의 연구의 첫 부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가 빛을 보기까지 15년을 기다려야 했다.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와 발췌와 비평노트는 이 기획의 첫 번째 단계들에서 마르크스가 취했던 방향성을 시사한다. 그의 기록들은 선행자들과 동시대인들에게서 도출한 이론적 요소들로 충만해 있다. 이 시기의 개요들과 연구들의 어느 것도 단일한 분야로 분류할 수 없다: 순수하게 철학적이거나 본질적으로 경제학적이거나 유일하게 정치학적인 텍스트들은 없다. 이들에게서 부상하는 것은 새로운 체계, 동질적 전체가 아닌, 하나의 비판적 이론이다.

1844년의 마르크스는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들의 경험과 프랑스 혁명 연구를, 아담 스미스에 대한 독서를 프루동의 통찰과, 실레지아 직공들의 반란을 헤겔의 국가개념에 대한 비판과, 뷰렛의 빈곤에 대한 분석을 공산주의와 결합하는 역량을 가졌다. 그는 이 다른 지식과 경험의 분야들을 모우고, 함께 엮어서, 혁명의 이론을 탄생시키는 방법을 아는 하나의 마르크스이다. 파리 체류 동안 발전하기 시작하였던 그의 사상과 특히 경제적 비평들은 갑작스런 폭발의 과실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의 결과였다. 매우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 성인전은 불가능한 직접성과 도구적 최종 모표를 마르크스의 사상에다 부여하여, 지식에 대한 그의 경로를 왜곡되고 빈약하게 설명하였다. 목표는 대신 발생, 지적 부채와 마르크스의 노동의 이론적 성취를 재구성하는 것과 여전히 어떠한 현재의 비판적 이론과 대화하는 한 연구의 복합성과 풍부함을 조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번역: 하태규

APPENDIX

파리 체류 동안 마르크스의 발췌노트와 수고를 담고 있는 연표

이 연표는 1843년에서 1845년까지 파리 체류동안 마르크스가 작성한 모든 노트를 포함한다. 발췌노트의 정확한 작성 날짜는 종종 불명확하고, 많은 경우 추정되는 시간의 범위를 지시할 필요가 있는데, 시간 범위의 시작점이 연대 순서에 포함된다. 더구나 마르크스는 발췌노트를 순서대로 작성한 것이 아니라 때때로 서로 간에 교차하여 작성하였다(e.g., B 19 and B 24). 이 때문에 발췌노트의 다른 부분에 근거하여 재료를 배열하는 것이 선호되었다. 소위 〚1844년 경제학 철학수고〛(A 7, A 8 and A 9)를 포함한 발췌노트는 직접적으로 마르크스가 저자임을 지시하고, 〚〛속에 포함된 부문 제목이 그에게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 나중의 편집자가 붙인 것임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열(발췌노트의 특징)이 마르크스에 의해 인용된 저자의 저작의 제목을 특정하지 않을 때, 항상 두 번째 열(발췌노트의 내용)에서 이미 언급된 것에 상응한다. “RGASPI f1, op. 1, d.124”라는 제목으로 모스크바에 있는 Rossiiskii gosudarstvennyi arkhiv sotsial’nopoliticheskoiistorii(RGASPI)에 보관되어 있는 MH의 예외를 제외하면, 이 시기의 모든 발췌노트는 세 번째 열(문서보관코드)에서 지시하는 제목 아래 암스테르담에 있는 사회역사국제연구소[Internationaal Instituut voor Sociale Geschiedenis(IISG)]에 보관되어 있다.

작성시기 발췌노트의 내용 문서보관코드 발췌노트의 특징
1843 후반부터 R. Levasseur, Mémoires MH 발췌가 2열로 작성됨
1844 초반까지
1843 후반부터 세이, 정치경제학 B19 대형 노트. 2열 발췌
1844 초반까지 개요 왼쪽: 개요, 오른쪽: 스카벡과 세이의 정치경제학 실천의 완전한 과정

1843 후반부터

1844 초반까지

슈츠, 정치경제학 원리 B24 대형 노트. 2열

1843 후반부터

1844 초반까지

리스트,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 B24

1843 후반부터

1844 초반까지

오시엔데르, 교역, 산업, 농업의 이해에 관한 대중의 실망 B24

1843 후반부터

1844 초반까지

오시엔데르, 인민의 교역에 관하여 B24
1844 봄 스카벡, 사회적 부에 관한 이론 B19
1844 봄 세이, 정치경제학 실천의 완전한 과정 B19
1844 5~6월 스미스, 국부론 B20 소형 노트, 정상적 페이지 매김
1844 5월말~6월 마르크스, 임금, 자본의 이윤, 지대(소외된 노동과 사적 소유) A7 대형 노트, 3페이지, 2열
재료는 세이, 스미스, 슐츠의 생산의 운동, 페커의 사회적 경제와 정치에 관한 새 이론, 라우동과 뷸렛의 인구와 재산문제에 관한 해법
1844 6~7월 맥컬록, 정치경제학의 기원, 진보, 특수 목적에 관한 논문 B21 소형노트, 2열
11페이지는 예외인데, 엥겔스의 논문에 관한 안내서가 포함됨
1844 6~7월 프레보스트, 리카도체계에 관한 번역과 성찰 B21
1844 6~7월 엥겔스, 국민경제학 비판에 관한 개요 B21
1844 6~7월 트레이시, 이데올로기의 기본적 부분 B21
1844 7월말 마르크스, 사적 소유의 비율 A8 대형 용지의 2열
1844 7~8월 헤겔, 정신현상학 A9(헤겔) 용지가 나중에 A9와 합쳐짐
1844 8월 마르크스, 사적 소유와 노동, 사적 소유와 공산주의, 헤겔변증법과 철학 비판, 사적 소유와 필요, 기타, 노도의 분업, 서문, 화폐 A9 대형 노트, 바우어의 발견된 기독교로부터 인용, 스미스, 트레이시, 스카벡, 밀, 괴테의 파우스트, 셰익스피어의 아테네의 티몬 더하기 바우어의 일반문학신문의 다양한 칼럼으로부터의 인용. 또한 간접적 참조가 있다: 엥겔스, 세이, 리카도, 케네, 프루동, 빌레가델, 오언, 헤스, 로드데일, 맬더스, 세빌레, 스트라우스, 포이에르바흐, 헤겔, 바이틀링
1844 9월 리카도,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B23 대형 노트, 2 또는 드물지만 3열. 첫 2페이지는 세노폰테로부터의 발췌인데 열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1844 9월 밀, 정치경제학 요강 B23

1844 여름에서

1845 1월까지

뷰렛, 노동계급의 비참에 관하여 B25 소형 노트, 정상적 페이지 번호 매김
1844 9월 중에서 1845 1월까지 보이스길버트, 프랑스의 세부사항 B26 대형 노트, 보이스길버트로부터 발췌. 정상적 페이지 번호 매김. 2열에서 몇 개의 예외
1844 9월 중에서 1845 1월까지 보이스길버트, 부, 화폐, 공물의 속성에 관한 논문 B26
1844 9월 중에서 1845 1월까지 보이스길버트, 곡물의 자연, 문화, 교역, 이자에 관한 논의 B26
1844 9월 중에서 1845 1월까지 로, 화폐, 무역에 관한 논의 B26
1844 9월 중에서 1845 1월까지 로더데일, 공공의 부의 성격과 원천에 관한 논의 B22 대형 노트, 2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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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형성

Ⅰ. 들어가는 말
영원히 망각될 것이라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저작이 최근 몇 년 사이에 역사적 무대로 되돌아왔고, 세계 곳곳에서 그의 많은 저작들이 서점의 서가에 다시 진열되어 있다. 마르크스의 재발견은 그의 저작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 설명력에 기초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만든 거대하고도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여,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는 종종 소련과 잘못 연결시켜 1989년 이후에 성급히 내쳤던 한 저자를 다시 보고 있다. 이런 정치적 관심의 부활에 앞서 마르크스의 저작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부흥했다. 1980년대의 관심의 쇠퇴와 1990년대의 “침묵의 공모” 이후에, 신간이거나 재간행된 마르크스의 작품들은 거의 모든 곳에서 접할 수 있다(러시아와 동유럽은 예외인데, 그곳에서는 “현존 사회주의”의 재앙들이 너무 최근의 일이어서 마르크스의 부활이 의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출판물들은 많은 분야에서 중요하고도 혁신적인 결과를 낳고 있다.

Marx-Engels-Gesamtausgabe(MEGA2)가 철저한 재해석을 위하여 중요한 것인데, 이 전집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모든 저작들의 비판적인 역사적 판본으로 1998년부터 연속적으로 간행되었다(Musto, 2007: 447-98; 2010: 182-210). MEGA2는『자본론』2권과 3권을 위한 마르크스의 발췌노트들과 모든 예비적 수고를 출판한 바 있다. 발췌노트에는 마르크스가 읽었던 책들의 발췌문뿐 아니라 그것들을 통해 떠올랐던 사상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들은 마르크스의 비판 이론의 작업장, 그 사상의 전반적 궤도, 그 사상을 발전시키는 데 활용한 원천들을 드러내준다. 『자본론』의 모든 수고들과 엥겔스의 모든 편집 수정판들의 동시적 출판을 통해 2권과 3권에 대한 마르크스의 원문들과 엥겔스의 추가부분의 범위 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비판적 평가를 할 수 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이 텍스트들은 마르크스 대표작의 미완성적 성격을 드러내주고 미래의 더욱 엄격한 연구를 위한 기반으로 봉사할 것이 때문이다

이 새로운 연구소재를 사용하여, 이번 작업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단계들을 MEGA2를 통해 획득한 문헌학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철저하게 마르크스의 사상 형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 분야에서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마르크스의 사상 발전에서 특정 시기들만 검토하고, 예를 들면 『1844년 경제학·철학수고』 에서 바로 『그룬트리세』(1857-58)로 그리고 『그룬트리세』에서 『자본론』 1권(1867)으로 건너뛰거나 기껏해야 다른 두 권의 텍스트, 즉 『철학의 빈곤』(1847)과 『잉여가치학설사』(1862-63)를 검토하는 것이 고작이다.

귀중한 수고들과 흥미로운 잠정적 결과들에 대한 이런 연구는 MEGA2 독일어 책들을 독해할 수 있는 협소한 학자집단의 보존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이 텍스트들을 더욱 널리 알리고, 새 연구소재들의 관점에서 마르크스 작업의 기원과 미완성적 성격에 대한 논쟁을 부활시키기 위해 이번 연구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이 논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연구와 이 분야에서 그의 이론적 기여를 1843년의 초기 연구부터 『그룬트리세』(1857-58)까지 평가하는 것이다. 『그룬트리세』는 일반적으로 『자본론』의 첫 번째 초고로 간주되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라는 짧은 저작을 위한 대량의 예비적 수고이다. 가까운 시일에 발표될 두 번째 논문에서는 『자본론』의 형성을 『그룬트리세』부터 죽기 전 마지막 1882년의 수고들까지의 다양한 수고들을 통해 검토할 것이다.

이번 논문은 우선 『철학의 빈곤』의 출판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던 1843년에서 1847년 동안 파리, 맨체스터, 브뤼셀에서 마르크스가 수행한 정치경제학 연구들을 재구성하려고 한다(본 논문의 2장과 3장). 그 다음에 1848년 혁명과 이후 런던 망명 시기 동안 마르크스의 정치적·인간적 운명을 다루려고 한다(본 논문의 4장과 5장). 이 시기 동안 마르크스는 자신이 창간하고 지도한 두 개의 잡지에 정치경제학에 관한 논문을 썼다: 1848년에서 1949년의 <신라인 신문: 민주주의의 기관지>, 1850년의 <신라인 신문: 정치경제학 평론>. 새로운 혁명은 오직 세계 경제위기의 여파로 전개될 것이라는 확신이 마르크스에게서 서서히 형성되었다. 6장은 『런던노트』로 알려진 1850년에서 1853년까지 마르크스가 작성한 26권의 발췌노트를 집중해서 다룬다. 이 발췌노트들은 수십 권의 정치경제학 저술들에 대해 마르크스가 몰두한 흔적을 남겨놓았고, 그 흔적들을 통해 지금까지 거의 아무도 탐구하지 않았던 마르크스 사상에서 한 중요한 국면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가 방어하는 데 엄청난 정력을 쏟아 부었던 중요한 사건이었던 1853년의 공산주의자 재판을 토론한 뒤(7장), 8장과 9장에서는 1850년대의 경제위기 가능성에 대한 <뉴욕 트리뷴>에 기고한 글들에서 그의 입장의 발전과정을 검토한다. 그런 위기의 발생은 『그룬트리세』에서 마르크스의 초기 작업과 궁극적으로 일치하는데, 이 작업에서는 화폐-가치관계, 자본의 생산과 유통과정을 다루었고, 잉여가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하였으며, 이전에 흡수하였던 정치경제학의 심오한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였다. 부록에서는 1843-1858년의 발췌노트, 수고, 정치경제학 저작들이 연대기적으로 나열된 도표를 제시한다.

Ⅰ. 정치경제학과의 마주침
정치경제학은 마르크스에게 첫 번째 지적 열정의 대상이 아니었다: 정치경제학은 독일에서 마르크스의 젊은 시절에 하나의 학문으로 막 떠오르고 있었고, (마르크스는) 여러 다른 분야를 거친 후에야 정치경제학과 마주치게 되었다.1818년 트리에에서 유태인 가계에서 태어나서, 1835년에 본과 베를린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철학(특히 지배적이었던 헤겔주의)으로 변경하고, 1841년 예나대학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 철학의 차이」라는 논문으로 졸업했다. 그런 후에 마르크스는 학문적 경력을 갖게 될 수도 있었지만, 프러시아에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취임 이후 헤겔철학이 공식적 선호에서 멀어져 가면서 청년 헤겔주의자의 일원이었던 마르크스는 계획을 바꾸어야 했다. 1842년과 1843년 사이에 마르크스는 언론에 투신하여 시사문제를 다루면서 쾰른의 일간지인 <라인신문>에서 일하였는데, 여기에서 곧 매우 젊고도 중요한 편집자가 되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가 편집자로 있으며 경제문제(비록 법적, 정치적 측면만이지만)에 관한 그 자신의 칼럼을 싣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검열이 신문에 타격을 주는 바람에 그 경험을 끝내고 “공적 무대에서 내 연구로 철수하게”(MECW 29 :263) 되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국가와 법률관계를 계속 연구했는데, 이 분야에서는 헤겔이 최고 권위자여서, 1843년에는 사후에 『헤겔 법철학 비판 』으로 출판될 수고를 썼다. 마르크스는 시민사회가 정치적 국가의 실질적 토대라는 확신을 발전시키면서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을 설명하는 데 경제적 요소의 중요성에 관한 가장 초기의 견해를 제시했다.

마르크스는 파리로 이주한 후 “정치경제학에 대한 의식적 비판적 연구”(MECW 3: 231)를 시작했는데, 파리에서 1844년에 마르크스는 <독불연보> 를 창간하여 공동 편집자가 되었다. 이전에는 주로 철학적·역사적·정치적 성격을 띠었던 마르크스 자신의 연구가 이 때부터 미래 연구의 지주가 될 새 분야로 바뀌었다.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엄청난 양의 독서를 하고, 9권의 발췌노트를 작성했다. 사실 마르크스는 대학 시절에 연구 작업에 대한 발췌노트를 모아두는 평생토록 가는 습관을 얻었는데, 이 발췌노트에는 종종 그 연구를 통해 형성된 사상들이 산재해 있었다. 소위 』는 장 밥티스트 세의 『정치경제학 개론 』과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 에 대한 긴 발췌노트들이 특히 흥미로운데, 마르크스는 이것들에서 정치경제학의 기초 지식을 얻었다. 또한 데이비드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와 제임스 밀의 『정치경제학 요강 』 에 관한 긴 발췌노트들도 흥미로운데, 이것들을 통해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가치와 가격 개념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었고, 화폐를 인간에 대한 소외된 사물의 지배라고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연구들과 병행하여 마르크스는 사후에 『1844년 경제학·철학수고 』로 출판될 세 권의 다른 노트를 작성했는데, 여기에서 특히 소외된 노동(entäusserte Arbeit) 개념에 관심을 두었다. 주요 경제학자들이나 헤겔과는 대조적으로 소외라는 현상을 통해 노동자의 생산물이 자신에게 “타인의 것, 생산자와 독립된 힘으로”(MECW 3: 272) 마주서는 것은 자연스럽고 따라서 불변의 조건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관계 – 근대 부르주아 사회와 임금노동 – 의 특수한 구조의 특징으로 간주되었다.

이 시기에 마르크스를 방문한 몇 사람들이 그가 강도 높은 연구 작업을 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급진적 언론인 하인리히 뷔르게르스(H. Bürgers)는 1844년 하반기의 마르크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심오한 연구를 시작하였고 경제학을 다시 건설할 비판적 연구를 저술할 계획을 세웠다”(Enzensberger ed.: 46). 1844년 여름 마르크스와 처음 만나서 평생토록 지속될 친구관계와 이론적·정치적 연대를 맺은 엥겔스도 또한 임박한 사회적 대격동의 희망에 고무되어 이후 40년 동안 지속될 서신교환의 첫 번째 편지에서 마르크스에게 가능한 한 빨리 출판할 것을 강력히 권했다: “당신이 모아온 자료들이 세상에 공개되도록 하세요. 하늘에 맹세코 지금이 적기입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자신의 지식이 미비하다는 생각에 원고를 완성하여 출판하는 것을 보류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신성가족 또는 비판적 비판주의에 대한 비평: 부르노 바우어에 반대하여 』를 썼는데, 이 책은 너무 사변적인 고립과 무익한 개념들의 전투에만 매몰되었다는 이유로 마르크스 자신이 1842년부터 거리를 두었던 헤겔 좌파 운동의 바우어와 기타 인물들에 대해 집중적 논쟁을 제기한 책이었다. 그 후 1845년 초 엥겔스는 다시 그의 친구에게 준비된 연구를 완성할 것을 촉구했다.

당신이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내용이 그 저서에 많다 하더라도 정치경제학 저서를 완성하도록 하세요. 그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아요; 마음의 준비는 다되었으면,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합니다. ……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4월 전에 끝내도록 하고, 내가 말했듯이, 퇴고 날짜를 정한 다음 재빨리 출판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이런 강력한 권유들도 거의 소용이 없었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썼던 초고를 완성형태로 만들기 전에 더 연구할 필요를 여전히 느꼈다. 어쨌건 곧 출판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1845년 2월 1일에 – 독일어로 된 노동자들의 격주간지 <전진!(vorwärts)>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프랑스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을 후에 – 다름슈타트 출판사의 칼 빌헬름 레스케와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2권의 책을 내기로 계약하였다(MEW 27: 669, n.365).

Ⅱ. 경제학 연구의 지속
1845년 2월, 마르크스는 “현재 정치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출판하지 않는” 조건으로 거주를 허락받은 브뤼셀로 이주했다(MECW 4: 677). 여기서 부인 제니 폰 베스트팔렌과 1845년 파리에서 태어난 첫 딸과 함께 1848년 3월까지 머물렀다. 이 3년 동안 특히 1845년에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연구에 효과적으로 매진했다. 1845년 3월 마르크스는 독일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책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MECW 4: 256-93)에 대한 비평작업 –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 – 을 했다. 동시에 기계제 대공업에 관한 문제를 탐구하여 찰스 배비지의 『기계와 제조업자들의 경제』에서 많은 분량을 꼼꼼히 발췌했다. 또한 엥겔스와 함께 “최상급 외국 사회주의 저자들의 문헌”의 독어 번역을 추진할 계획을 세웠다(MECW 4: 677). 그러나 시간 부족과 출판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지 못해 두 사람은 계획을 접고 대신 자신들의 작업에 전념했다.

마르크스는 7월과 8월을 맨체스터에서 영어로 된 방대한 경제학 문헌들을 검토 – 염두에 둔 책을 내는 데 필수적 작업 – 하며 보냈다. 마르크스는 9권의 발췌노트, 『맨체스터 노트』를 작성했다. 또한 가장 눈에 띄는 발췌노트들은 정치경제학과 경제학의 역사에 관한 책들, 토마스 쿠퍼의 『정치경제학의 요소에 관한 강의』, 토마스 투크의 『가격과 유통의 상태에 관한 역사』, 존 램지 매컬록의 『정치경제학 문헌』,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의 몇 가지 미해결 문제에 관한 논문』들에 관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또한 사회주의 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영어로 된 사회주의 문헌들의 주요 책들, 특히 존 프란시스 브레이의 『노동의 과오들과 노동의 구제책』, 로버트 오언의 『인간 성격 형성에 관한 논문』,『새로운 도덕의 세계에 관한 책』에서 발췌노트를 작성했다. 비슷한 주장들이 1845년 6월에 출판된 엥겔스의 첫 번째 작품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에 실려 있다.

마르크스는 벨기에의 수도에서 경제학 연구 외에 정치적 여건을 고려하여 필요하다고 생각한 다른 계획을 진행했다. 1845년 11월에 마르크스는 엥겔스, 조셉 바이데마이어, 모제스 헤스와 함께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슈티르너 같은 대표적 인물들이 설명하는 근대 독일 철학과 그 다양한 선지자들이 설명하는 독일 사회주의”에 대한 하나의 비판을 작성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MECW 6: 72). 그 결과로 사후에 『 독일 이데올로기 』라는 제목으로 출판될 그 수고의 작성은 두 가지 목적을 가졌다: 독일에서 신헤겔주의의 마지막 형태와 싸우는 것(막스 슈티르너의 『 유일자와 그의 소유 』가 1844년 10월에 출판되었다)과 마르크스가 출판업자 레스케(Leske)에게 쓴 편지에서 밝혔듯이, “독일의 과거와 현재의 학문과는 정반대인 나의 경제학에서 채택된 시각을 대중에게 제공하기 위한 것” (MECW 6: 72)이었다. 이 수고는 1846년 6월까지 작업했지만 결국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수고는 엥겔스가 40년 뒤에 더 많은 대중을 위한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개념화” (MECW 26: 519)라고 규정한 것을 비록 아직 명확한 형태는 아니지만 이전보다 더 정교하게 다듬는 데 도움을 주었다.

1846년에 마르크스의 ‘경제학’의 발전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다시 레스케에게 보낸 마르크스의 편지를 볼 필요가 있다. 8월에 마르크스는 그 출판업자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거의 완성된 1권의 수고”가 “아주 오래 동안” 쓸모가 있겠지만 그래도 “내용과 문체를 수정하지 않고는 출판하지 않겠습니다. 계속 작업해온 작가로서 6개월 전에 작성했던 원고를 6개월이 지난 시점에 토씨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출판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통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가까운 장래에 그 책을 마무리하기로 약속했다: “출판을 위한 1권의 수정 판본이 11월말에 준비될 예정입니다. 더욱이 역사적 성격의 2권이 그 직후에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내용은 작업하는 실제 상황과 일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원고들은 “거의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47년 초까지 단 하나의 원고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출판업자는 계약을 파기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계속된 연기는 마르크스가 열의가 없었던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몇 해 동안 마르크스는 결코 정치적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고, 1846년 봄에는 유럽의 다양한 노동자 연맹들 간의 연결을 조직하는 임무를 띤 “공산주의자 통신원 위원회” 관련 작업을 진척시켰다. 그럼에도 항상 이론적 작업을 최우선으로 하였다.마르크스 자신의 연구 노트들과 출판물들이 그가 얼마나 성실했는지를 입증해 준다. 1846년 가을부터 1847년 9월까지 당시 독일의 주요 경제학자 중 하나였던 구스타프 폰 글리히의 저서 『 우리 시대 주요 상업 국가들의 무역, 상업, 농업의 역사적 배경 』에서 주로 경제사에 관한 세 권의 두꺼운 발췌노트를 작성했다. 1846년 12월에는 피에르 프루동의 『 경제적 제 모순 또는 빈곤의 철학 』을 읽고 나서 “매우 빈약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비평문을 쓸 결심을 하였다. 그 결과가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첫 출판저작이었는데, 여기에서 가치이론, 사회 현실 이해를 위한 진정한 방법론적 접근, 생산양식의 역사적으로 이행기적인 성격에 관한 사상들을 설명했다.

계획된 책 – 정치경제학 비판 – 의 완성에 실패한 것은 마르크스의 근면성 부족 때문이 아니라 과제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비판적 검토를 위한 자료는 너무 방대하여 그 특유의 진지함과 비판 의식으로 진행한다면 수많은 나날들이 더 걸릴 일이었다. 1840년대 후반에는 그런 줄 몰랐지만 사실 그는 그 작업의 출발점에 서 있었다.

Ⅲ. 1848년과 혁명의 발발
1847년 하반기에 사회적 동요가 증폭되자 마르크스는 정치적 연루에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6월에 독일 노동자와 장인들 그리고 그 국제적 지부들의 결사인 공산주의자동맹이 영국에서 설립되었다; 8월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브뤼셀에서 독일노동자협회를 설립했다; 11월에 마르크스는 온건 민주 인사들뿐 아니라 혁명적 진영까지 통합한 브뤼셀 민주연맹의 부의장이 되었다. 그 해말 공산주의자동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정치 강령을 작성할 임무를 주었다. 잠깐 뒤 1848년 2월에 『공산주의자선언』으로 출판되었다. 그 시작 문구 –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 는 전 세계에 유명해졌다. 그 핵심 테제들 중의 하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MECW 6: 481, 482).

『선언』의 출판 시점은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었다. 출판 직후 유례 없는 범위와 강도로 발생한 혁명운동이 유럽 대륙의 정치사회적 질서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유럽 정부들은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했고, 1848년 3월에 마르크스는 벨기에에서 프랑스로 추방당했다. 마르크스는 이제 자연스럽게 정치경제학 연구를 밀쳐두고 혁명을 지지하는 언론 활동에 종사하며 바람직한 정치적 경로를 계획하는 데 도움을 주려 했다. 4월에 마르크스는 독일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발달되었고 정치적으로 가장 자유로운 지역인 라인란트로 이주하였고, 6월에는 쾰른에서 이미 창립되었던 <신라인신문: 민주주의의 기관지>를 편집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 자신의 기사는 대부분 정치적 사건에 관한 기록이었지만, 마르크스는 1849년 4월에 정치경제학 비판에 관한 논설 시리즈를 출판했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노예상태뿐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존재와 그 계급지배가 근거하는 관계들을 더욱 면밀히 다룰”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MECW 9: 198). 브뤼셀의 독일노동자협회에서 1847년 12월에 행한 강연에 기초한 다섯 개의 논문이 『임금노동과 자본』이라는 제목으로 탄생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대중에게 지난번보다 더 해박하게 또 가능한 한 노동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임금노동이 어떻게 자본에게 착취당하는지를 밝혔다.

그렇지만 1848년에 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혁명운동은 단기간에 패배로 끝났다. 열정적 정치활동의 시기 이후 마르크스는 1848년 5월에 프러시아에서도 추방령을 받고 다시 프랑스로 향했다. 그러나 파리의 혁명이 패배하자 당국은 마르크스에게 모르비앙으로 그 다음에는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황량한 브리타니로 옮길 것을 명령했다. “생명에 대한 가려진 위협”에 직면하여 마르크스는 프랑스를 떠나 런던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독일 신문을 발간할 수 있는 긍정적 전망”이 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망명자이자 무국적자로 영국에서 나머지 생을 보내게 되었는데, 유럽의 반동이 정치경제학 비판을 작성하는 데 더 없이 좋은 장소에다 그를 가둔 것이었다. 그 당시 런던은 세계 최고의 경제·금융 중심지, “부르주아 우주의 조물주”(MECW 10: 134)였고, 그래서 가장 최신의 경제 발전을 관찰하고 자본주의 사회 연구를 재개할 최적의 장소였다.

Ⅳ. 런던에서 위기를 기다리며
마르크스는 1849년 여름 31살의 나이로 영국에 도착했다. 수도에서 그의 삶은 평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마르크스 가족은 1845년에 로라(Laura), 1847년에 에드가(Edgar), 1849년 직후에 귀도(Guido)의 출생으로 모두 6명에 달했는데, 런던에서 가장 빈곤하고 황폐한 구역 중의 하나인 소호(Soho)에서 장시간 지독한 가난 속에 살아야했다. 이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새로운 출판 사업을 시작하는 과제를 성취할 수 있었다. 1850년 3월에 “모든 정치적 운동의 기초를 형성하는 경제적 조건에 관한 포괄적이고 과학적 탐구”를 위한 거점으로 계획된 월간지 <신라인신문: 정치경제학 평론>을 발간했다. 마르크스는 “지금같이 외관상 고요한 시기는 종전에 경험한 혁명적 시기, 갈등하는 당파들의 특성, 이 당파들의 존재와 투쟁을 규정하는 사회적 조건들을 해명하는 목적에 정확히 사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MECW 10: 5).

마르크스는 그 상황이 직전의 혁명과 곧 다가올 혁명 사이의 짧은 막간극일 것이라고 잘못 믿었다. 1849년 12월 그의 친구 바이데마이어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신라인 신문의〕발간이 한 달에 세 번 혹은 두 번이 될 때까지 세계적 대참사가 발발하여 정치경제학을 당장에 완료할 기회가 사라질 것을 거의 확신한다.” 마르크스는 “거대한 산업, 농업, 상업 위기”가 확실히 임박하였으므로, 새로운 혁명운동이 부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신라인신문>에 연속 논문으로 연재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서 마르크스는 “실제 혁명은 …… 오직 현대적 생산력과 생산의 부르주아 형태가 서로 충돌할 …… 때만 가능하다. …… 새로운 혁명은 오직 새로운 위기의 결과로서만 가능하다. 그렇지만 새로운 혁명은 직전의 위기만큼 확실하다”고 주장했다(MECW 10: 135). 마르크스는 경제적 번영이 확산될 때에도 그의 시각을 바꾸지 않았다. <신라인신문> 1(1-2월)호에서 마르크스는 동인도 시장은 “이미 거의 포화상태”이고 북미, 남미, 호주도 곧 그렇게 될 것이므로 호황이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썼다.

공급과잉에 관한 첫 번째 소식과 함께 “공황”이 투기와 생산 분야에서 동시적으로 발발할 것이다 – 아마도 봄이 끝날 무렵이거나 늦어도 7월이나 8월에. 그렇지만 이번 위기는 유럽 대륙에서의 거대한 격돌과 함께 발생할 것이므로 이전의 모든 위기의 결과들과는 매우 다른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위기는 새로운 진보, 토지 소유와 금융 부르주아지에 대한 산업 부르주아지의 새로운 승리를 위한 신호였다면, 이번 위기는 현대적 영국혁명의 시작을 특징짓게 될 것이다(MECW 10: 264f).

1850년 3-4월호인 다음호에서도 또한 마르크스는 긍정적 경제국면이 단지 일시적 개선을 표현할 뿐인 반면 과잉생산과 국가 철도부문에서의 과도한 투기가 위기를 초래할 것인데, 그 효과는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지적했다.지금까지의 위기의 효과들보다 더 중대할 것이다. 이번 위기는 농업 위기와 함께 발생할 것이다. …… 영국에서 이 이중의 위기는 대륙에서 동시적으로 임박한 격변에 의해 촉진되고 확대될 것이며 쉽게 불타오를 것이다; 그리고 대륙에서의 혁명들은 세계시장에 대한 영국 위기의 반작용을 통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뚜렷이 사회주의적 특성을 띠게 될 것이다(MECW 10: 340).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자 운동의 근거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었고 유럽과 북미시장 양쪽 모두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의 시각에서는 “북미가 과잉생산에 의해 초래된 불황에 진입함에 따라 우리는 위기가 다음 달에 지금까지보다 더 빨리 발전하게 될 것을 기대해도 좋다.” 마르크스의 결론은 그래서 확신에 차 있었다: “상업위기와 혁명의 일치는 ……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다. 그것은 운명대로 될 것이다!”(MECW 10: 341).

여름 동안 1848년 이전에 시작된 경제 분석을 심화하였고, <평론> 1850년 5-10월호 – 자금부족과 프러시아 경찰의 괴롭힘 때문에 마지막 발행이 된 호 -에서 마르크스는 “혁명이 상업위기에 기여한 것보다 상업위기가 1848년 혁명에 훨씬 더 많이 기여했다”는 중요한 결론에 도달했다(MECW 10: 497). 경제위기들은 그때 이후 계속해서 그의 사상에서 근본적인 것이 되었다. 게다가 만연하는 투기와 과잉생산 과정들을 분석하면서 “만약 1848년에 시작된 산업 발전의 새로운 순환이 1843-47년과 같은 과정을 밟는다면, 위기는 1852년에 발생할 것이다”라고 과감하게 예측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미래의 위기는 지방에서도 발생할 것이고 “처음으로 산업과 상업위기가 농업위기와 같이 발생할 것이다”(MECW 10: 503).

이 일 년 이상의 기간에 대한 마르크스의 예측은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혁명이 느닷없이 나타날 것을 기대했던 사람들과 달리 마르크스는 1850년 가을에 새로운 세계 경제위기가 없이는 혁명이 무르익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때 이후 계속해서 마르크스는 임박한 혁명 에 대한 헛된 희망과 거리를 두었고 “완전히 물러나서” 살았다. 그래서 위기의 발생을 예측하는 것이 도전 과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제 또 다른 정치적 동기를 하나 더 가지게 된 마르크스는 다시 한 번 정치경제학 연구에 전력하게 되었다.

Ⅴ. 1850-53 연구 노트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연구를 중단한 3년 동안 경제적으로 중요한 사건들 – 1847년의 위기에서부터 캘리포니아와 호주에서 금 발견까지 – 이 연속적으로 있었는데, 마르크스는 그 사건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여 지난 노트들을 재검토하여 완성된 형태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연구를 더 깊이 수행했다(Tuchscheerer, 1973: 318). 마르크스의 추가 독서는 26권의 발췌노트로 종합되었는데, (역시 다른 학문분야의 텍스트들도 포함되는데) 그 중 24권은 1850년 9월에서 1853년 8월에 작성한 것으로 소위 『런던 노트 』에 포함된다. 이 연구 자료는 마르크스의 비판에서 중요한 시기를 문서로 증명하기 때문에 매우 흥미롭다. 이때 마르크스는 이미 습득한 지식을 요약했을 뿐 아니라 대영 박물관 도서관에서 탐독한 수십 권의 새로운 (특히 영어로 된) 책들을 연구하여 장차 집필하고자 하는 저서를 위한 중요한 사상들을 습득했다.

『런던 노트 』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850년 9월부터 1851년 3월 사이에 작성한 첫 번째 7권(Ⅰ-Ⅶ)에서는 마르크스가 읽고 발췌한 수많은 작업들의 일부로서 다음이 포함된다: 토마스 투크의 『가격의 역사 』, 제임스 테일러의 『영국 화폐체계에 관한 한 시각 』, 저메인 가니어의 『화폐의 역사 』, 조한 게오르그 뷔쉬의 『은행과 주화에 관한 제반 법칙 』, 헨리 소튼의 『대영제국의 지폐신용의 성질과 효과에 관한 연구 』이 그것들이다. 특히 마르크스는 경제 위기의 역사와 이론들에 집중하여, 위기의 기원을 이해하려는 시도로서 화폐형태와 신용에 대해 긴밀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 당시의 프루동 같은 다른 사회주의자들 – 그들은 경제위기가 화폐와 신용체계의 개혁을 통해 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 과 달리 마르크스는 신용체계가 저변에 있는 조건들 중 하나이므로 위기는 화폐유통의 올바르거나 잘못된 사용을 통해서는 기껏해야 더 악화되거나 완화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진정한 원인들은 오히려 생산에서의 모순들에서 찾아져야 했다.

이 첫 번째 발췌노트의 끝에 마르크스는 『지금(bullion): 완전한 화폐제도 』라고 제목을 붙인 (본시리즈 부분에는 속하지 않은) 두 권의 노트에 자신의 지식을 요약했다. 1851년 봄에 작성한 이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의 주요 저작들에서 – 때로는 자신의 논평을 같이 실으면서 – 화폐에 관한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들이라고 간주한 발췌들을 옮겨 적었다. 91개 부분으로 나누어진 『지금 』은 단지 인용문일 뿐만 아니라 많은 해 동안 계획해왔던 책을 저술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화폐와 유통에 관한 이론 의 최초의 독립적 공식화로도 간주될 수 있다. 이 같은 시기에 비록 마르크스는 개인적으로 끔찍한 시기(특히 아들 귀도를 여읜 1850년을 전후하여)를 맞았지만, 그는 자신의 작업을 수행해냈을 뿐 아니라 곧 완성할 것을 여전히 희망하고 있었다. 1851년 4월 2일에 엥겔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내 작업이 매우 많이 진척되어서 5주 내에 이 모든 경제학적 허튼소리들과 끝장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경제학을 편안하게 완성하고〔대영〕박물관에서 다른 학문분야에 몰두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지루해지기 시작한다. 근본적으로 이 학문에서 아담 스미스와 리카도가 개인적 연구의 길을 통해 많은 진보를 이룩했고 종종 매우 통찰력이 있었지만, 그들 이후에는 진보가 없었다. …… 조만간 나는 전지 60매로 된 2권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편지는 저술의 완성에 관하여 실제 상황보다 낙관주의를 반영한 것이었다. 모든 발췌노트들과 그 자체로서 출판용 원고가 아닌 『지금 』이라는 예외를 제외하면, 마르크스가 그때까지 출판 준비가 완료된 수고는 하나도 없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마르크스는 대단히 강도 높게 연구를 진행했지만 여전히 경제적 자료를 완전히 정복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성공하리라는 결심과 확신에도 불구하고 그 꼼꼼함 때문에 발췌노트 작성이나 비판적 논평을 넘어서 최종적으로 자신의 책을 저술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마르크스에게 그 연구를 더 줄여라고 촉구하는 출판업자도 없었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조만간” 완성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다시 정치경제학의 고전 연구로 방향을 전환하였고, 1851년 4월에서 11월 동안 『런던 노트 』의 두 번째 부분(Ⅷ-Ⅹ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작성하였다. 발췌노트 Ⅷ은 1847년에 연구를 시작한 제임스 스튜어트의 『정치경제학 원리 탐구 』와 리카도의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에서 거의 전적으로 발췌한 것이었다. 사실 『지금 』을 작성할 때 모아둔 리카도 책의 발췌는 수많은 논평과 개인적 성찰이 뒤따르고 있어서 『런던 노트 』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1840년대 말까지 마르크스는 본질적으로 리카도의 이론들을 채택하고 있었던 반면, 이때부터 지대와 가치에 대한 새롭고도 깊은 연구를 통해 일정한 점에서 리카도의 이론들을 넘어섰다. 이런 식으로 마르크스는 근본적 문제에 대한 초기의 견해 중 일부를 수정하였고 지식의 반경을 넓혔으며 계속해서 더 많은 저자들을 검토해갔다. 1851년 5월에서 7월까지의 노트 Ⅸ와 Ⅹ은 리카도 이론의 모순을 다루거나 일정한 측면에서 리카도의 개념을 발전시킨 경제학자들에 집중하였다. 그래서 다음의 책들에서 많은 발췌가 작성되었다: 존 데벌 투켓의 『노동인구의 과거와 현 』, 토머스 찰머스의 『정치경제학에 관하여 』, 리처드 존스의 『부의 분배에 관한 에세이 』, 헨리 찰스 카레이의 『정치경제학의 원리 』.

연구 범위의 확장과 풀어야 할 이론적 문제의 누적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저작계획의 완료에 관하여 여전히 낙관적이었다. 1851년 6월말에 마르크스는 헌신적인 바데마이어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보통 대영박물관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지냅니다. 내가 다루는 자료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앞으로 6-8주 내에 끝낼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단조롭게 지내는 이곳의 비참한 환경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실질적 유형의 끊임없는 중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급속히 완성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명백히 마르크스는 이미 모아둔 거대한 양의 발췌와 비판적 노트들을 이용하여 책을 두 달 안에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희망하였던 “완성”에 도달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출판업자에게 보낼 수고의 정확한 사본 작성을 시작하지도 않았다. 이번에 예정시간을 넘긴 것은 마르크스의 심각한 경제적 곤궁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는 안정적 수입도 없는데다 자신의 물리적 조건에 지쳐서 1851년 7월 말에 엥겔스에게 편지를 썼다.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 내가 도서관에서 오래 전에 끝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중단과 방해들이 있었고, 집에서는 모든 것이 계엄 상태에 놓여있었습니다. 밤새도록 초조해져 있다가 마구 쏟아지는 눈물에 격분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일을 많이 할 수 없습니다. 재정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언론 활동을 재개하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신문을 물색했다. 1851년 8월 마르크스는 미국에서 가장 배포 부수가 많은 <뉴욕 트리뷴>의 통신원이 되었다. 그리고 1862년 2월까지의 기간 동안 그 신문에 싣는 글을 수백 페이지를 작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1851년 여름동안 계속되었다. 8월에 마르크스는 프루동의 『19세기의 혁명관 』을 읽고서 그에 대한 비판을 엥겔스와 함께 작성할 계획을 (나중에 포기한) 간직했다(MECW 11: 545-70). 게다가 마르크스는 독서한 책에 대한 발췌를 계속 작성했다. 노트 Ⅺ은 노동자계급의 조건을 다룬 책들을 대상으로 것이다; 노트 Ⅻ, ⅩⅢ은 농화학에 관한 연구를 포괄한다. 지대연구를 위해 이 후자의 학문이 중요한 것을 이해하고 마르크스는 자세한 노트를 주스투스 리빅의 『유기화학의 농업과 생리학에의 응용 』과 제임스 F. W. 존스톤의 『농화학과 지질학의 요소 』에서 작성했다. 노트ⅩⅣ에서 마르크스는 특히 맬서스에 대한 반대자 아키발트 앨리슨의 『인구의 원리 』로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에 관한 논쟁에 다시 한 번 뛰어들었다; 아돌프 듀로 데 라 말레의 『로마의 정치경제학 』, 윌리암 H. 피레스콧의 『멕시코 정복의 역사 』, 『페루 정복의 역사 』를 발췌하여 전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 허만 메리베일의 『식민화와 식민지의 교훈 』을 통해서 특히 식민주의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1851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마르크스는 연구 분야를 기술로 확장하여 노트ⅩⅤ의 상당한 분량을 조안 H. M. 포퍼의 기술의 역사를, 노트ⅩⅥ에서는 정치경제학의 다방면의 의문들을 다루었다. 1851년 10월 중순에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여주듯이, 그때 마르크스는 “기술과 그 역사 및 농경제학을 깊이 탐구하면서” “경제학을 완성하는 산통기에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핵심에 대한 어떤 종류의 견해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1851년 말에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뢰벤탈 출판사가 마르크스의 더 확장된 작업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엥겔스와 라살레와의 서신교환으로 볼 때 마르크스는 그때 세 권의 계획에 대해 작업하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1권은 자신의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고, 2권은 다른 사회주의들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는 것이고, 3권은 정치경제학의 역사였다. 그렇지만 처음에 출판업자는 단지 3권에만 관심이 있었던 반면 나머지 두 권은 만약 그 3권 기획이 성공적이게 되면 출판할 수 있는 선택권을 보유하고 싶어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계획을 바꾸고 그 계약을 체결하라고 설득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하고 “독일 저서 시장에서 당신의 오랜 공백과 그 뒤 서적상들의 소심함 때문에 형성된 휴지기를 깨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출판업자의 관심은 사라졌고 아무것도 실행되지 않았다. 2개월 후에 마르크스는 미국에 있는 충실한 바이데마이어에게 “그곳에서 출판업자를 찾을” 수 있는지 알아봤다.

출판에 관한 이런 장애들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임박한 경제위기에 대한 낙관주의를 잃지 않았다. 1851년 말에 오랜 친구이며 유명한 시인인 페르디란트 프라일리그라트에게 편지를 썼다: “위기는 온갖 요소들에 의해 저지되었지만 …… 늦어도 내년(1852년) 가을에는 반드시 불어닥칠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사건들 후에 나는 더욱 확신하게 되었는데 심각한 상업공황이 없이 진정한 혁명은 없다.” 그 동안 마르크스는 새로운 일에 착수했다. 1851년 12월부터 1852년 3월까지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을 작성했고, 1852년 5월에서 6월까지 런던에 있는 독일 정치 이민자들의 지도적 인물들(조안 고트프리트 킨켈, 루게, 칼 하인젠, 구스타프 폰 스트루베)에 대한 풍자적 초상화 전시장인 논쟁적인 글 『추방당한 거인들 』을 엥겔스와 함께 작성했다. 1852년 4월에서 1853년 8월까지 마르크스는 『런던 노트 』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부분(ⅩⅦ-ⅩⅩⅣ)의 작성을 재개했다. 이것들은 주로 인간사회 발전의 다양한 단계에 관한 것으로 많은 부분이 중세에 관한 역사적 논쟁과 문학, 문화, 관습의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인도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는데, 동시에 <뉴욕 트리뷴>에서 인도에 관한 칼럼을 쓰고 있었다.

광범위한 연구가 증명하듯이 마르크스는 결코 “휴식을 취한” 적이 없었다. 다시 마르크스의 계획에 대한 장벽은 오랫동안 씨름해 왔던 가난이었다. 1851년부터 매달 5파운드씩 송금해주었던 엥겔스의 도움과 칼럼당 2파운드를 벌었던 <뉴욕 트리뷴>의 수입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진정으로 절망적 조건에서 살았다. 1852년 4월의 그의 딸 프란지스카(Franziska)의 죽음에 직면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삶은 하나의 오랜 전쟁이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마르크스의 작업과 시간에 큰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럼에도 금융시장의 폭풍들이 마르크스의 사기를 높게 유지시켰고, 그것들에 관해 모든 가까운 친구들한테 편지했다. 마르크스는 1852년 2월 매우 풍자적으로 라살레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 금융위기가 지금 뉴욕과 런던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상업공황에 필적할 수준만큼 도달했다. 저 상업 신사들과 달리 나는 파산에 의지할 수도 없다.” 4월에 마르크스는 바데마이어에게 호주와 캘리포니아에서 금광맥의 새로운 발견과 영국의 인도에 대한 상업적 침투라는 특별한 환경 덕분에 “위기가 1853년으로 늦춰질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폭발이 더욱 가공할 만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혁명적 격동을 생각할 수 없다” 고 말했다. 그리고 8월에 미국에서의 투기 붕괴 직후에 마르크스는 의기양양하게 엥겔스에게 편지했다: “위기가 오고 있지 않은가? 혁명이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빨리 올 것 같네.”

마르크스는 그런 평가를 오직 편지에서만 하고 있지 않고 <뉴욕 트리뷴>에도 썼다. 1852년 11월 “빈궁과 자유무역”이라는 칼럼에서 마르크스는 예측했다: “위기는 …… 산업적이라기보다 더 상업적이고 화폐적이었던 1847년 때보다 더 위험한 성격을 띠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더 많은 과잉자본이 산업 생산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 더 확대되고 지속되고 직접적으로 노동 대중에게 위기가 영향을 미칠 것이다”(MECW 11: 361). 요약하면 좀 더 오래 기다리는 것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조만간 혁명의 시간이 울려 퍼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1852년 10월 프러시아 정부는 전년도에 체포했던 공산주의자동맹 회원들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기소내용은 이들이 프러시아왕국에 대항하여 마르크스가 지도하는 음모자들의 국제적 조직에 가입했다는 것이었다. 10월에서 12월까지 기소가 근거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르크스는 “정부의 책략에 대항하여 그 당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고, 『쾰른의 공산주의자 재판에 관하여 』를 작성했다. 프러시아 정부 장관들이 입을 모아 주장하던 것과는 반대로 마르크스는 이 시기에 정치적으로 매우 고립되어 있었다. 공산주의자동맹의 해산 – 1851년에 사실상 해체되었고 1852년 말에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던 – 은 마르크스의 정치적 접촉자의 숫자를 매우 축소시켰다. 많은 경찰과 반대자들이 “마르크스의 정당”으로 규정하였던 것 은 충실한 지지자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 새로운 활동적 지지자들의 충원, 특히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노동자들의 참여는 그래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마르크스가 했던 연구 작업도 또한 그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었다. 지지자의 충원은 정치적으로나 이론적으로 필수적인 것이었다. 1853년 3월에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편지했다:

당신은 경제학을 완성해야 합니다; 나중에 우리가 신문을 보유하게 되면 그것을 주간단위로 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도들이(discipuli) 어떻게든지 효과가 있도록 상세히 설명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때 복원된 우리 연합체들에게 토론의 기초를 제공할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이전에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4월”에 엥겔스와 함께 며칠을 보내면서 “[자신의] 시각에서는 곧 지진이 일어날 현재의 조건에 대해 방해받지 않고 담소하기를 희망한다” 고 썼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를 괴롭힌 빈곤 때문에 저술에 집중하지 못했다. 살아남기 위해 마르크스와 그의 부인 예니는 필수품을 위한 자금도 없는 집에 남아 있는 약간의 옷가지와 값나가는 물건들을 자주 전당포에 맡겼다. 비록 귀중한 시간을 잡아먹어도 언론 칼럼에서 생기는 수입은 점점 더 중요해졌다. 그해 말 마르크스는 친구 클루스에게 불평을 털어놓았다:

나는 몇 달 물러나 있으면서 경제학 연구를 하는 것을 …… 희망해 왔다네. 그러나 그리될 것 같지 않다네. 나는 지겨운 신문에 지속적으로 매문(賣文)을 하고 있다네. 그것은 시간 낭비이고 짜증나게 하며 보수도 매우 적다네. 어떤 작가가 아무리 스스로 독립적이라고 생각해도 나처럼 돈을 벌 때면 신문과 독자에게 예속된 것이라네. 순수한 학문적 작업과는 다르다네.

마르크스가 생활 필수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그의 마음은 그래서 완전히 ‘경제학’에 가 있었다.

Ⅵ. <뉴욕 트리뷴>의 위기에 관한 칼럼들
이 시기에도 경제위기가 <뉴욕 트리뷴> 칼럼의 지속적 주제였다. 1853년 6월의 “중국과 유럽에서의 혁명”에서 1851년에 시작한 반봉건 중국혁명을 일반적 경제상황과 연결하였는데, 마르크스는 재차 “시장들의 팽창이 영국의 제조업의 확장과 보조를 맞출 수 없을 계기가 곧 올 것이고, 그리고 이 불균형이 반드시 새로운 위기를 과거에 그랬던 것과 같이 확실하게 초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했다(MECW 12: 95f). 마르크스의 시각에서는 혁명의 여파로 중국의 거대시장이 전례 없이 수축하여 “현재의 산업체계에서 과부하가 걸린 광산에 불꽃을 던지고, 오래 동안 준비된 일반적 위기의 폭발을 초래하여, 그 위기가 해외로 번져 곧 바로 유럽 대륙의 정치적 혁명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MECW 12: 98). 물론 마르크스는 혁명적 과정을 결정론적 태도로 지켜본 것이 아니라, 위기가 그 혁명의 수행에 필수불가결한 전제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유럽에서 18세기의 시작부터 상업 및 금융 위기가 앞서지 않은 중대한 혁명은 없었다. 이것은 1848년 혁명뿐 아니라 1789년 혁명에도 적용된다. …… 세계시장에서 유럽산업의 대표인 영국이 보통 내보내는 신호, 즉 상업 및 산업 위기의 결과로서가 아니라면 전쟁도 혁명도 유럽을 시끄럽게 하지 않을 것 같다(MECW 12: 99).

요점은 1853년 9월 하순에 강조되었다. 칼럼 “정치적 운동들: 유럽에서 빵의 부족”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선동가의 연설도 외교관의 쓸데없는 소리도 사태를 위기로 몰고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 유럽 혁명의 전조임이 틀림없는 경제적 재앙과 사회적 대격변이 다가오고 있다. 1849년 이래 상업과 산업 번영은 반혁명이 안전하게 잠자는 안락의자를 늘려 놓았다(MECW 12: 308).

사건들이 벌어질 것을 기대한 마르크스의 낙관주의 흔적들은 엥겔스와의 편지교환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1853년 가을의 한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적었다: “사태가 놀랍게 될 것이다. 프랑스에서 금융 거품이 터질 때 대혼란이 올 것이다.” 그러나 위기는 여전히 오지 않았고, 마르크스는 수입의 유일한 원천을 버리지 않기 위해 다른 언론 활동에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했다. 1853년 10월에서 12월 사이 『팔머스톤 경』이라는 제목으로 연속 칼럼을 작성했다. 게다가, 1854년 6월의 스페인에서의 민간 및 군사 반란 이후에 마르크스는 또 다른 연속 칼럼 『스페인 내전』을 8월에서 12월 사이에 작성했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는 이전 10년간의 주요 사건들을 요약하고 분석했다. 마르크스는 이 일을 매우 중대하게 간주했는데, 이는 1853년 9월부터 1855년 1월까지에 작성한 9권의 대형 발췌노트를 보면 판단할 수 있다. 그 중 첫 4권은 『팔머스톤 경』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 외교의 역사에 집중하여 발췌한 반면, 나머지 5권은 『스페인 내전』 칼럼을 위한 조사를 포함하여 스페인의 정치·사회·문화사에 집중하여 발췌하였다.

마지막으로 1854년 후반에서 1855년 초의 어느 시점부터 마르크스는 자신의 정치경제학 연구를 재개했다. 그렇지만 3년간의 중단 이후였기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옛 수고들을 작업 재개 전에 다시 읽기로 결심했다. 1855년 2월 중순 엥겔스에게 편지를 썼다: 지난 4-5일 동안 나는 심한 눈의 염증 때문에 …… 저술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병은 내 발췌노트를 통독하다가 걸렸는데, 발췌노트를 다듬는 것보다 어쨌든 숙달하여 계속 작업할 수 있게 준비하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입니다.

이 검토를 통해 새로이 20페이지의 노트를 작성하고 『인용들: 화폐의 본질, 신용의 본질, 위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발췌들은 마르크스가 이전 몇 년간 했던 발췌들에서 재발췌한 것들이었다. 투크, 존 스튜어트 밀, 스튜어트 같은 저자들의 책들과 <이코노미스트>의 칼럼들에로 돌아가서 마르크스는 1850년부터 시작한 화폐, 신용, 위기에 관한 주요 정치경제학자들의 이론들을 더욱 더 요약했다(Schrader, 1980: 99).

동시에 마르크스는 <뉴욕 트리뷴>을 위하여 경기후퇴에 관한 더 많은 논문을 작성했다. 1855년 1월에 “영국에서의 상업위기”에서 마르크스는 만족하여 작성했다: “전조적 징조들에 관해 나의 칼럼들에서 오래 동안 실렸던 영국 상업위기가 이제 최고 당국자에 의해 크게 외쳐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 되었다”(MECW 13: 585). 두 달 후 “영국에서의 위기”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몇 달 뒤 영국은 위기가 아마 1842년 이후는 아닐지라도 1846년 이후에는 전에 도달한 적이 없는 높이에 있을 것이다. 위기의 영향이 노동계급 사이에서 완전히 느껴지기 시작할 때, 6년 동안 잠자고 있었던 정치적 운동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 영국에서 실제로 경쟁하는 당사자들, 즉 중간계급과 노동계급 그리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맞대면할 것이다(MECW 14: 61).

하지만 마르크스가 “경제”에 관한 연구를 다시 시작할 무렵 개인적 어려움이 계획을 다시 한 번 바꾸게 했다. 1855년 4월 마르크스는 8살 난 아들 에드가(Edgar)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마르크스의 건강과 경제적 환경은 1855년 동안 비참한 상태였고, 그의 가족은 엘리너(Eleanor)가 태어나면서 다시 늘었다.

마르크스는 1856년 6월에서야 <인민의 신문>에 크레딧 모빌리에(Crédit Mobilier)에 관한 몇 개의 칼럼을 쓰면서 정치경제학 연구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크레딧 모빌리에는 프랑스의 주요 상업은행으로서 마르크스가 “우리 시대의 가장 기묘한 경제 현상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 것이었다(MECW 15: 10). 1856년 가을에 가족 형편이 잠시 좋아진 후 소호의 임대주택에서 북부 런던의 더 나은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뉴욕 트리뷴>에 위기에 관해 다시 썼다. 마르크스는 1856년 10월 3일 신문에 실린 “유럽의 화폐위기”에서 “1847년 공황과 유사한 유럽 화폐시장에서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MECW 15: 113). 그리고 11월에 신문에 실린 “유럽의 위기”에서, 모든 칼럼니스트들이 최악의 상황을 자신 있게 예측하고 있을 때,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유럽으로부터 온 지표들은 …… 대서양 양쪽의 사람들이 모두 어떤 불가피한 운명에 관하여 두렵게 바라보면서 본능적으로 예상하는 투기와 주식시장의 최종 붕괴가 미래의 어느 날로 연기된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연기에서 붕괴는 확실하게 되었다; 참으로 현존하는 금융위기의 만성적 성격이 더욱 더 폭력적이고 파괴적 종말을 예고한다. 위기가 오래 지속될수록 최종청산은 더 악화된다(MECW 15: 136).

사건들은 또한 마르크스에게 정치적 반대자들을 공격할 기회를 주었다. “유럽의 화폐위기”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만약 우리가 이 짧은 화폐공황의 효과들과 마찌니주의자(Mazzinian)들 및 다른 사람들의 선언들의 효과를 나란히 놓는다면, 공식적 혁명주의자들의 망상인 1849년 이후의 전체 역사가 한꺼번에 그 신비를 제거할 것이다. 그들은 인민들의 경제적 삶과 역사 운동의 실제적 조건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새로운 혁명이 발발할 때 그들은 빌라도(Pilate) 총독보다 더 먼저 손 씻을 권리를 가질 것이고 자신들이 피의 희생(예수의 죽음 – 역자)과 무관하다고 주장할 것이다(MECW 15: 115).

그렇지만 1857년 상반기에 절대적 고요가 국제 시장에 널리 퍼졌다. 3월까지 마르크스는 『18세기 외교 역사에 관한 폭로』를 작업하였는데, <프리 프레스>에서 발행한 신문의 논문들의 모음으로 실렸다. 이번 경우에도 마르크스는 자료를 깊이 연구하였고, 1856년 1월부터 1857년 3월까지 18세기 국제정치에 관하여 7권의 발췌노트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7월에 마르크스는 1851년에 이미 연구하고 발췌했던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경제적 조화』와 캐리의 『정치경제학의 원리』에 관한 짧지만 흥미로운 비판적 논평을 작성했다. 사후에 『바스티아와 캐리』로 출판된 이 노트에서 마르크스는 자신들의 저작에서 “생산관계의 조화”와 전체로서 부르주아 사회의 조화를 증명하기 위해 애썼던 두 경제학자의 순진함(전자는 자유무역의 챔피언, 후자는 보호무역주의)을 꼬집었다.

Ⅶ. 1857년 금융위기와 『그룬트리세』
이번에는 과거의 다른 위기들과 달리 경제적 폭풍이 유럽에서가 아닌 미국에서 시작하였다. 1857년 처음 몇 달 동안 뉴욕 은행들은 예금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 금액을 늘렸다. 결과적인 투기적 활동의 증가가 일반적 경제 조건을 더 악화시켰고, 오하이오 생명보험사의 뉴욕지점이 지불불능이 되자 만연해 있던 공황은 수많은 파산들을 초래했다. 은행체계에 대한 신뢰의 상실은 신용의 수축을 낳았고 예금의 고갈과 화폐 지불의 정지를 동반했다.

이 사건들의 비상한 성격을 감지하고서 마르크스는 즉시 작업에 들어갔다. 1857년 8월 23일에 – 여론에 공황소문을 유포시킨 오하이오생명보험사의 파산 하루 전에 – 마르크스는 자신의 “경제학” 『서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위기의 폭발적 습격이 마르크스에게 이전 몇 해 동안에는 없었던 추가적 동기를 주었다. 마르크스는 1848년의 패배 이후 10년 동안의 정치적 후퇴와 깊은 인간적 고립에 직면했다. 그러나 위기의 폭발과 함께 마르크스는 일련의 새로운 사회적 반란들에 공헌할 가능성을 보았고 가장 긴급한 과제를 혁명의 시작에 매우 중요한 경제 현상을 분석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가능한 한 빨리 그가 오래 동안 계획했던 작업을 저술하고 출판하는 것을 의미했다.

위기는 뉴욕에서부터 미국의 나머지 지역에 급속히 퍼졌고 몇 주안에 유럽, 남미, 동양에 있는 세계시장의 모든 중심들로 확산되면서 역사상 최초의 국제 금융위기가 되었다. 이런 소식들이 마르크스에게 커다란 도취감을 심어주었고, 지적 생산력의 거대한 폭발을 불러 일으켰다. 1857년 여름에서 1858년 봄 사이의 시기는 마르크스의 생애에서 가장 다작의 시기였다: 이 수개월 동안 마르크스는 이전의 수년 동안보다 더 많은 분량을 작성했다. 1857년 12월에 마르크스는 엥겔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밤을 꼬박 세며 미친 듯이 작업하고 매일 밤 내 경제학 연구들과 대조하고 있어서, 대홍수가 오기 전에 최소한 『그룬트리세』의 개요는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마르크스는 위기가 불가피하다는 자신의 예측이 그렇게 잘못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왜냐하면 “토요일자의 <이코노미스트>가 1853년의 마지막 수개월, 1854년 전체, 1855년 가을, 1856년의 급격한 변화 동안 유럽은 임박한 위기로부터 머리카락 한 올 만큼도 비켜나 있지 못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의 작업은 매우 놀랍고 광범위한 것이었다. 1857년 8월부터 1858년 5월까지 『그룬트리세』 로 알려진 8권의 노트를 다 채우는 한편 <뉴욕 트리뷴>의 통신원으로서 다른 것과 함께 유럽에서 위기의 전개에 대해 수십 개의 칼럼을 작성했다. 자신의 경제적 환경을 개선할 필요에 따라, 마르크스는『뉴아메리카 사이클로피디어』에 여러 장을 작성하는 데에도 동의했다. 마지막으로 1857년 10월부터 1858년 2월까지 『위기노트』 라고 불리는 세 권의 발췌노트를 작성했다(Krätke, 2008: 169-75). 이전에 작성했던 발췌노트와 달리 경제학자들의 저작들의 요약은 없고, 다양한 일간 신문들에서 위기의 주요 전개 상황, 주식시장 동향, 교역의 증감, 유럽과 미국 및 나머지 세계의 주요한 파산들에 관한 내용들을 모은 수많은 노트들로 구성되어 있다. 12월에 엥겔스에게 쓴 편지에 얼마나 강도 높게 작업했는지가 드러난다:

나는 새벽 4시까지 규칙적으로 엄청나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중의 과제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1. 정치경제학 개요를 퇴고하는 것(대중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이 악몽을 없애는 것은 내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2. 현재의 위기. <트리뷴>을 위한 칼럼을 제외하면 이번 위기에 대한 기록들을 보관하는 것이 내가 하는 모든 것인데, 이것에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내 생각에는 봄쯤에 우리가 공동으로 이번 사태에 대한 소책자를 내어 독일 대중에게 우리가 항상 그들과 같이 있고 함께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룬트리세』에 관하여 볼 때, 8월 마지막 주에 마르크스는 노트 “M”을 작성했는데, 그것은 작업에 대한 『서설』로 기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고 나서 10월 중순에 다른 7권(Ⅰ-Ⅶ)의 노트 작성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중 Ⅰ권 2부에서 마르크스는 소위 『화폐에 관한 장』을 작성했다. 그것은 화폐와 가치를 다루었고 반면 나머지에서 소위 『자본에 관한 장』을 작업했다. 여기에서 수백 페이지를 자본의 생산과 유통 과정에 관해 할애했고, 잉여가치 개념과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선행하는 경제적 사회구성체들 같은 전체 수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들 중 일부를 취급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엄청난 노력도 작업을 완료하기에 충분하지는 않았다. 1858년 2월 후반 라살레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나는 사실 몇 달 동안 마지막 단계에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태는 매우 느리게 진행됩니다. 왜냐하면 수년 동안 헌신적으로 연구해온 주제들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려 하는 찰라 사태는 바쁘게 새로운 양상들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더 깊은 생각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작업은 『경제적 범주들 비판』또는 당신이 좋아한다면 부르주아 경제체계에 대한 비판적 폭로입니다. 이것은 폭로이자 동시에 체계에 대한 비판입니다. 나는 전체 분량이 몇 장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 15년 동안의 연구 뒤에 마침내 작업할 때가 되었는데, 외부로부터 휘몰아치는 운동들이 결국 작업을 중단하게 만들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이 듭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위기와 함께 분출할 것으로 가정되었던 오래 가다린 혁명 운동의 표시는 없었고, 이번에도 또 마르크스가 수고를 완료하는 데 실패한 다른 이유는 자신이 물질적 세계에 대한 완전한 비판적 정복자가 여전히 되지 못한다는 자각이었다. 그래서 『그룬트리세』는 단지 미완성 초안으로 남았다. 1858년 8월과 10월 사이에 『화폐에 관한 장』을 꼼꼼히 작업하여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2장과 3장 초반부의 원본 텍스트』의 수고로 만든 후에 마르크스는 1859년 대중적 반향이 없었던 짧은 책을 출판하였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또 다른 8년간의 열정적 연구와 거대한 지적 노력이 『자본론』1권을 발행하는데 걸릴 것이었다.

Ⅹ. 결론
『그룬트리세』는 오직 수고로만 남아 있다. 1858년 8월에서 10월 사이 『화폐에 관한 장 』을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원본 』으로 재작성한 후에, 마르크스는 1859년에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라는 반향이 없었던 짧은 책을 출판하였다. 그때부터 『자본론 』1권을 출판하는 1867년까지 또 다른 8년 동안 마르크스는 엄청난 연구와 거대한 지적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가 영어로 번역된 잘 알려진 저작들뿐 아니라 MEGA2의 수고와 발췌노트를 염두에 둔다면 마르크스의 이론적 기획의 거대함과 풍부함이 더 잘 드러날 것이다. 이 노트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뿐 아니라 – 그것은 종종 마르크스의 개념화를 마치 태어날 때부터 마술적으로 머리에 주어졌으며 그가 수행한 연구들과 동떨어진 어떤 것으로 묘사하였다 – 또한 1960년대의 유럽에서 벌어진 헤겔 철학과 인식론적 단절이 있는지 아니면 기본적 연속성이 있는지에 대한 논쟁의 거대한 제한성을 보여 준다. 사실 논쟁에 참가한 사람들은 단지 마르크스의 텍스트들 중 소수의 저작들만 검토하였고, 심지어 이 저작들 중 일부는 완전히 완성된 저작이 결코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취급하기도 하였다.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와 『독일이데올로기 』시기, 『그룬트리세 』의 시기 그리고 이후의 『그룬트리세 』와 다양한 『자본론 』의 초고들 사이에 마르크스의 연구들은 마침내 MEGA2의 책들을 통해 학자들이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MEGA2는 마르크스 사상의 발전에서 1850년대와 그의 사상에 대한 더 비판적이고 열려진 해석을 제시하는『자본론 』1권 발간 이후의 양자 모두 시기에서 다양한 매개적 단계들을 따라가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MEGA2로부터 떠오르는 그림은 자신의 테제들의 정확함을 증명하는 더 많은 연구를 위해 죽기 전까지 몰두하며 자기 저술의 많은 부분을 미완성으로 남긴 저자에 관한 것이다.

부록: 정치경제학에 관한 발췌노트, 수고, 논문, 단행본의 연대기 표(1843-58)

연도 제목 내용
1843-45 [파리노트]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연구의 가장 초기 발췌노트
1844 [1844 경제학․철학 수고] [파리노트]와 병행하여 작성된 미완성 수고
1845 [“프리드리히 리스트의 책에 관한 논문의 초고: 『정치경제학의 국민적 체계』”] 독일 경제학자 리스트를 비판한 논문의 미완성 수고
1845 [브뤼셀 노트] 정치경제학의 기본 개념에 관한 6권의 발췌노트
1845 [맨체스터노트] 경제문제, 경제사, 영국 사회주의 문헌에 관한 6권의 발췌노트
1846-47 폰 귈리히의 『상업의 역사』에 관한 발췌노트 경제사에 관한 3권의 발췌노트
1847 『철학의 빈곤』 프루동의『경제적 모순의 체계』에 관한 논쟁적 저서
1849 『임금노동과 자본』 <신라인신문, 민주주의의 기관지>에 실린 5개의 논문
1850 <신라인신문>의 논문. 정치경제학 평론 경제 상황에 관한 논문
1850-3 『런던노트』 주로 정치경제학에 집중된 24권의 발췌노트(특히, 위기의 이론과 역사, 화폐, 정치경제학 고전들, 노동계급의 조건, 기술)
1851 [지금. 완전한 화폐체계] [런던노트]를 작성하는 동안 같이 작성한 화폐와 유통에 관한 가장 중요한 이론들에서의 인용을 포함한 2권의 발췌노트
1851-62 <뉴욕트리뷴>의 논문들 이 신문에 실린 487개 논문 중 약 70개의 정치경제학에 관한 논문들
1855 [인용들. 화폐의 본질, 신용의 본질들, 위기들] 주요 경제학자들의 화폐, 신용, 위기에 관한 이론들을 요약한 1권의 발췌노트
1857 [서설] 마르크스의 방법론에 관한 가장 폭넓은 사상을 포함한 수고
1857-58 [위기에 관한 노트] 1857년의 금융위기 사건들에 관한 보도자료 들의 노트
1857-58 [그룬트리세]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를 위한 예비적 수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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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의 재발견

키워드: 마르크스,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GA), 엥겔스
칼 마르크스만큼 세상을 뒤흔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의 죽음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그가 죽은 뒤로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짧은 기간에 그의 명성이 울려 퍼졌다. 마르크스의 이름은 캘커타에서 최초의 인도 사회주의자들뿐 아니라 디트로이트와 시카고 노동자들의 입에서도 오르내렸다. 그의 이미지는 혁명 뒤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볼셰비키 당대회의 배경을 이루었다. 그의 사상은 유럽에서 상하이까지 모든 노동자 운동의 정치조직과 노동조합 조직 들의 강령과 규약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철학, 역사학, 경제학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론들에 대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인류의 상당 부분에게는 [그의 이론들이 – 역자] 지배 이데올로기와 국가 교조로 변질되었으며, 그의 저서들이 광범하게 보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그의 저서들의 축약되지 않은 과학적인 판본이 여전히 출판되지 않고 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 중에서 이런 운명에 처한 경우는 그가 유일하다.

이런 특별한 상황이 발생한 주요한 이유는 마르크스의 저작(oeuvre)이 지닌 미완성의 성격에 기인한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신문 중의 하나인 <뉴욕 트리뷴>에 그 대부분이 실린 1848년부터 1862년까지 쓴 신문 칼럼들을 제외하면, 그가 단지 부분적으로 완성한 저작들의 양과 그가 수행한 연구의 방대한 범위에 비해 출판된 저작들은 거의 없다. 마르크스의 생애에서 마지막 시기 중의 한 해인 1881년에 칼 카우츠키가 저작의 완결본이 나올 가능성에 대해 물었을 때,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은 먼저 쓰는 것이 필요하다”(Kautsky, 1955: 32).

마르크스는 출판한 것보다 더 많은 초고를 남겼다. 보통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의 저작은 파편적이고 때로는 모순적인데, 이런 측면들은 그 작업의 독특한 성격들 중의 하나인 불완전성의 증거다. 시작한 많은 작업들을 끝내지 못하게 만든 과도하게 엄격한 방법과 무자비한 자기비판; 찢어지게 가난한 형편과 자신의 전 생애를 괴롭힌 만성적으로 나쁜 건강 상태; 해가 가도 변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연구로 이끄는 식을 줄 모르는 지식에 대한 열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사의 복합성을 하나의 이론적 기획으로 한정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말년의 인식; 이런 것들이 그의 모든 지적 생산과 그의 삶 자체의 충실한 동료이자 저주이기도 한 것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그의 작업의 거대한 계획은 작은 부분 외에는 완결되지 않았다. 그의 끊임없는 지적 노력은 저술적(literary)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가 그의 노력을 덜 빛나게 하거나 또는 그의 지적 함의가 광범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Rubel, 2000: 439-440). 마르크스가 남긴 유산(Nachlass)의 파편적 상태와 사회적 교조의 창조에 대한 그의 본능적 혐오에도 불구하고 완결되지 않은 작업은 전복되었고, “마르크스주의”라는 새로운 체계가 등장했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불완전성 대 체계화
1883년 마르크스 사후,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그의 친구의 유산을 편집하는 매우 어려운 작업 – 자료의 분산, 표현의 불명료함, 그리고 수기의 불가독성 때문에 – 에 헌신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의 작업은 원자료의 재구성과 선별, 편집되지 않았거나 미완성인 원고의 출간, 그리고 동시에 이미 알려진 저작들의 재출판과 번역에 집중되었다. 1888년에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의 부록으로 편집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와 1891년에 출간된 「고타강령 비판」과 같은 예외가 있었지만,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죽기 전에 1권만 출간된 『자본론』의 완성을 위한 편집 작업에 거의 전적으로 집중했다. 10년 이상 수행된 이 작업은 “일관되고 가능한 한 완전한 저작”(Engels, 1963: 7)을 만들고자 하는 분명한 의도로 추진되었다. 『자본론』 2권과 3권의 편집과정 중에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원본 수고들의 기원과 전개과정을 재구성하는 것 이상을 했다. 최종판이 아닌 (그리고 사실상 매우 다른 변형판인) 텍스트들의 선별과정에 기반하여 엥겔스는 통일된 전체를 만들고자 했고, 그래서 책의 편집이 완성되어 완결된 상태로 출판업자에게 보냈다.

그렇지만 이전에 엥겔스는 자신의 저작들을 통해 이론적 체계화 과정에 직접 기여했다. 엥겔스가 “마르크스와 나 자신이 주장한 변증법적 방법론과 공산주의 세계관의 다소간 서로 연결된 설명”(Engels, 1988: 492)이라고 정의한 『반뒤링론』이 1879년에 출간됐는데, 이 책은 하나의 체계로서 “마르크스주의”의 형성과 그 당시에 만연하던 절충주의적 사회주의와의 차별화에서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진화』는 더욱 중요하다; 이 책은 1880년에 처음 출판된 이전 저작에서 세 개의 장을 뽑아 그 대중화를 위해 다시 정교하게 다듬은 것으로, 『공산당 선언』에 버금가는 성공을 거두었다.

백과사전식 종합이라는 극단적으로 단순하고 편리한 방법과의 공개적 논쟁을 통해 얻은 이런 방식의 대중화와 독일 사회민주당의 차세대 인물들이 채택한 방식의 대중화 사이에 명확한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과학에 대한 엥겔스의 의존은 곧 노동자운동에서 지지를 얻게 될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라는 진화주의적 개념에 길을 열어 주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비판적이고 개방적인 마르크스의 사상은, 때로는 결정론적 유혹의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19세기말 유럽의 문화적 풍토와 충돌했다. 유럽의 문화적 풍토는, 이전에는 없었던 것으로, 체계적 개념의 대중화, 특히 다윈주의에 의해 널리 퍼진 것이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카우츠키의 편집 하에 평론지 <신시대>(Die Neue Zeit)의 지면에서 일찍부터 정설이 된 마르크스주의가 새로 탄생했는데, 이 마르크스주의도 이 모델에 급속히 순응했다.

마르크스의 저작이 하나의 체계로 변형되는 것을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을 준 결정적 요소는 그 확산 과정에 수반되었던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당시 그의 원저작의 축약 인쇄본이 보여주는 것처럼, 종합적인 소책자와 매우 부분적인 요약본이 인기를 누렸다. 더욱이 그의 저작 중 일부는 정치적으로 유용한 효과를 지녔으며, 그의 저작의 첫 판본은 편집자들에 의해 수정되어 출판되었다. 마르크스의 유산의 불확실성에서 초래된 이런 관행은 점점 그의 저작들 중 일부에 대한 검열과 결합되어 갔다. 마르크스 사상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하나의 중요한 수단인 소책자라는 형식은 확실히 효과적인 선전 수단임이 드러났지만, 그러나 또한 그의 초기 생각과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프롤레타리아 당의 실용적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실증주의와의 조우에서 그의 복합적이고 미완성된 저작의 유통은 원저작을 그것에 대한 이론적으로 빈약하고 속류화된 설명으로 바꾸었고(Andreucci, 1979: 15), 결국에는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으며, 비판(kritik)에서 이데올로기(weltanschauung)로 변형시켰다.

이런 전개 과정에서 도식적 교조가 형태를 갖추었고, 기본적으로 진화론적 해석이 경제 결정론, 즉 제2인터내셔널 시기(1889-1914)의 마르크스주의에 스며들었다. 역사의 자동적 전진과 사회주의에 의한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대체에 관한 비록 순진하지만 확고한 확신에 이끌려진 경제결정론은 실제 발전을 이해할 수 없고 또 혁명적 실천(praxis)과의 필연적 연계를 깨뜨렸음을 스스로 드러냈을 뿐 아니라 현존 질서를 위한 안정성을 조장하는 일종의 운명론적 정적주의(quietism)를 생산했다(Matthias, 1957: 197). 이런 방식으로 경제결정론은 마르크스와 동떨어져 있음을 스스로 드러냈는데, 이미 마르크스는 그의 첫 저작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역사’는, 말하자면, 인간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그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인간을 활용한다; 역사는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의 활동에 다름 아니다”(Marx and Engels, 1962: 98).

공황론 또는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의 임박한 파국에 관한 테제는 1873년 이후 20년 동안 펼쳐진 대공황의 경제위기에서 가장 적절한 표현을 발견했는데, 이것들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근본적 핵심으로 주장되었다. 자본주의의 동학 원리들을 설명하고자 했고 더 일반적으로 이들 내부에서의 발전 경향을 묘사(Sweezy, 1942: 19, 191)하고자 했던 마르크스의 주장들은 이로부터 사건들의 과정, 심지어는 특별한 세부사항까지 연역할 수 있는 보편적으로 유효한 역사법칙들로 변형되었다.

자동적으로 붕괴할 운명의 모순적이고 고뇌에 찬 자본주의라는 생각은 한 정당의 1891년 에르푸르트 강령이라는 최초로 완벽한 “마르크스주의” 강령의 이론적 뼈대로 나타났다. 카우츠키의 논평에 따르면, 이 강령은 “불가피한 경제적 발전이 어떻게 하여 자연 법칙의 필연성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붕괴로 이끄는지”를 밝혀놓았다. 또 “현 사회형태를 대신한 새로운 사회형태의 창조는 단지 희망하는 어떤 것일 뿐 아니라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Kautsky, 1964: 131f). 이 구절은 그 구절을 고무했던 마르크스로부터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그리고 그 시대의 개념이 갖고 있는 내재적 한계를 가장 명확하고 중요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심지어 사회주의를 불가피성이 아닌 가능성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그 시절에 지배적이었던 해석에 대한 불일치를 표명했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조차도 그 시절의 다른 독해들과 전혀 다르지 않게 마르크스를 똑같이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석했고, 그래서 베른슈타인 논쟁의 폭넓은 반향을 통해 똑같이 거짓되고 도구적인 마르크스의 이미지를 유포시키는 데 기여했다. 20세기의 진행과정에서 마르크스 사상의 대중화에 근본적인 역할을 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체계화와 속류화의 궤적을 더 엄격하게 밟았다. 사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개척자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마르크스주의란 세계에 대한 가장 완벽한 개념이다”(Plekhanov, 1973: 3-4)라고 주장했듯이, 사회의 상부구조의 변형이 경제적 변화과 동시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에 기초한 매우 단순한 일원론에 물들었다. 1909년에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레닌은 유물론을 “객관적인 자연법칙의 인식이자 개인의 머리 속에 이런 법칙을 개략적으로 충실히 반영하는 것에 대한 인식”으로 정의했다(Lenin, 1972: 154). 인간의 의지와 의식은 “불가피하고 또 필연적으로”(Lenin, 1972: 187) 자연의 필연성에 맞추어 스스로 조정해야 한다. 여기에서 또 다시 실증주의적 패러다임이 승리했다.

이 시기의 격렬한 이데올로기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제2인터내셔널을 특징짓는 이론적 요소들 중 많은 것들이 제3인터내셔널의 문화적 모체에 흔적을 남기며 전해졌다. 이런 연속성은 니콜라이 부하린이 1921년에 출간한 『사적 유물론』에 명백히 나타났는데, 이것에 따르면, “자연과 사회에는 명확한 규칙성, 고정의 자연법칙이 존재한다. 이런 자연법칙의 확인이 과학의 첫 번째 과제다”(Bukharin, 1921: 18). 생산력 발전에 전적으로 집중하는 이런 사회적 결정론(social determinism)의 산물로서 하나의 교조가 만들어졌는데, 그것에 따르면 “사회에서 행위가 발생하도록 하는 원인의 다중성(multiplicity)은 사회 진화라는 단일한 법칙의 존재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Bukharin, 1921: 248).

이 개념에 반대한 사람은 안토니오 그람시였는데, 그에게는 “연구의 문제를 불변적이고 규칙적이며 통일된 노선에 따라 배치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들의 예측이라는 실천적 문제를 강제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필요와 관련된 것으로, 이는 미숙하고 순진한 방법이다”(Gramsci, 1975: 1403). 마르크스의 실천철학을 조잡한 사회학으로 환원하는 것, 즉 “세계에 대한 개념을 역사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기계적 공식으로 환원하는 것”(Gramsci, 1975: 1428)에 대한 그의 분명한 거부는 더욱 중요한데, 그것이 부하린의 저서의 내용을 넘어설 뿐 아니라 나중에 소련에서 전례가 없는 방식으로 만연하게 될 더욱 일반적 지향성을 비판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사상의 부패 과정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해석을 통해 가장 결정적으로 표현되었다. 행위에 대한 안내자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 이론은 그 사후적 정당화로 바뀌었다. “디아마트”(Diamat, 변증법적 유물론), 즉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의 세계관”(Stalin, 1941: 5)으로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지점까지 이르렀다. 스탈린의 1938년 소책자인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이 널리 배포되었는데, 이 책은 이런 교조의 본질적 요소를 다음과 같이 고착시켰다: 집단생활의 현상은 “완전히 인식 가능한” “사회 발전의 필연적 법칙”의 규제를 받고 있으며, “사회의 역사는 사회의 필연적 발전으로 드러나고, 사회 역사에 대한 연구는 과학이 된다.” 이것은 “사회생활 현상이 매우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역사라는 과학이, 예를 들면 생물학처럼, 정확히 과학이 될 수 있어서 사회의 발전 법칙들을 실천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의미하고”(Stalin, 1941: 13-15),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당의 과제는 당의 활동을 이런 법칙들에 기초하게 하는 것이다. “과학적” 또는 “과학”이라는 개념의 오해가 어떻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가 분명해진다. 꼼꼼하고 일관된 이론적 척도에 기초한 마르크스 방법론의 과학성은 모순이 포함되지 않는 자연과학의 방법론으로 대체되었다. 마침내 역사적 법칙이 자연법칙처럼 인간의 의지와는 독립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역사적 법칙의 객관성에 대한 미신이 단언되었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교리문답에 이어서 가장 엄격하고 엄중한 독단주의가 넓은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설은 경직된 일원주의를 강요하여 마르크스의 저작들에게 전도된 효과를 만들어냈다. 의심할 바 없이 소비에트 혁명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그때까지 배제당했던 지역과 사회계급에게 전파되고 유통될 중요한 계기를 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유통되는 자료들에는 마르크스 자신의 저작들이 아니라 당의 소책자, 안내서, 그리고 다양한 주장이 담긴 “마르크스주의” 선집들이 더 많이 포함되었다. 더욱이 일부 저작들에 대해서는 검열이 증가한 반면, 다른 저작들은 분할되고 교묘하게 처리되었다: 예를 들면 노골적 의도 하에 인용문 조합을 끼워 넣는 관행이 그렇다. 이런 것들에 대한 의존은 예정된 목적을 위한 것이었고, 저작들은 강도 프로크루스테스가 그 희생자들에게 적용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취급되었다: 그것들이 너무 길면 절단되었고, 너무 짧으면 늘려졌다. 결론적으로, 사상을 보급하면서도 도식화를 피하는 것, 사상을 대중화하면서도 이론적 빈약화를 피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실현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그렇게 비판적이고 의도적으로 비체계적인 마르크스 사상의 경우에 특히 더 그렇다. 어쨌든 그에게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상이한 전망들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결정되는 함수가 되는 왜곡을 겪으면서 마르크스는 그 전망들에 동화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이름으로 매도되었다. 그의 이론은 비판적이기는커녕 성경 구절처럼 암송되었고, 이런 성경 주해로부터 가장 생각지도 못할 역설이 탄생했다. “미래의 식당에서 […] 영수증을 발행하는 것”(Marx, 1987: 704)에 대한 마르크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에 주의하기는커녕 그는 새로운 사회 체체의 비합법적인 대부로 전락했다. 매우 엄격한 비판자이자 자신의 결론들에 결코 안주하지 않았던 마르크스가 가장 완고한 공론주의(doctrinarianism)의 원천이 되어버렸다. 역사유물론에 대한 확고한 신봉자였던 마르크스에게서 다른 어느 저자보다도 더 역사적 맥락이 제거되었다. “노동자 계급 해방은 노동자 자신들의 과제”(Marx, 2003: 13)라는 것을 확신하기는커녕 그 반대로 마르크스는 정치적 전위와 당의 우월성이 계급의식의 옹호자이자 혁명의 지도부로서 이들의 역할에서 만연하게 된다고 보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혔다. 인간 능력의 성숙을 위한 기본적 조건이 노동일의 단축이라는 생각의 옹호자였던 마르크스가 스타하노프주의라는 생산주의적 신조로 흡수되어 버렸다. 국가 폐지의 필요성을 확신하고 있었던 마르크스가 국가의 강력한 옹호자로 인식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른 어떤 사상가보다 더 인간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에 관심을 가졌으며, “권리는 평등하기보다는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Marx, 1962: 21)며 단순한 법적 평등 뒤에 있는 사회적 불평등을 숨기는 부르주아적 권리에 반대한 마르크스가 사회적 삶의 집단적 차원의 풍요로움을 동질화의 모호함(indistinctness)으로 중화시키는 개념에 동화되어버렸다. 마르크스가 수행한 비판적 작업이 원래 불완전하다는 점이 그의 사상을 제거하여 명백한 부정으로 바꾸어놓을 때까지 무자비하게 변질시킨 그 모방자들의 체계화 과정에 종속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작들의 출판에 이르기까지의 장기간의 방랑
1897년에 안토니오 라브리올라는 그 당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이라고 알려진 것에 관하여 “저자 자신들의 […] 친한 동료나 사도 집단 외에 누가 이들의 저작을 […] 끝까지 읽어본 적이 있던가?” 하고 물었다. 그의 결론은 분명했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의 저작들을 읽는 것은 지금까지는 전수받은 자들의 특권으로 보인다”; “역사유물론”은 “무수히 많은 모호한 말, 오해, 괴상한 수정, 이상한 모습, 근거 없는 날조를 통해”(Labriola, 1973: 667-669) 번성했다. 사실 나중에 역사사료 연구에 의해 증명된 것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실제로 읽었다는 확신은 성인전적 신화의 산물이었다. 이와 반대로 이들의 많은 저작들은 원작의 언어로도 발견하기가 드물거나 어려웠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모든 저작들에 관한 완전하고 중요한 판본”을 만들자는 이탈리아 학자의 제안은 불가피하게 꼭 필요한 일이다. 라브리올라에게 필요했던 것은 선집의 편찬도 아니고 규범적 의무를 지닌 성서를 작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비록 가끔씩일지라도 비판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두 사람의 모든 정치적이고 과학적 활동, 모든 문헌상의 결과물들을 독자들이 마음대로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놓여져 있을 필요가 있는데, […] 왜냐하면 읽고자 하는 사람이 그 누구라 할지라도 두 사람이 직접 그 독자에게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Labriola, 1973: 672). 라브리올라가 이런 바람을 표명한 이래로 한 세기가 더 지났지만 그 계획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다.

이런 포괄적 문헌학적 평가를 제쳐두더라도, 라브리올라는 그가 살았던 시기와 관련하여 놀랍게도 멀리 내다보는 이론적 성격의 다른 것을 제안했다.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모든 미완성 저작들과 작품들을 “계속 형성되어 가고 있는 과학과 정치학의 단편들”로 간주했다. 그 저작과 작품들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곳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 또는 “일종의 불가타 성경(Vulgate), 즉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역사 해석에 언제나 적용되는 교훈”을 찾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저작들이 그 발생의 계기와 맥락 하에 놓일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사상과 지식을 진행 중인 저작으로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 또는 “마음 속의 우상을 필요로 하는 모든 종류의 공론가들과 자부심 강한 자들, 영구적으로 유효한 고전적 체계들의 설계자, 안내서와 백과사전의 편찬자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어느 누구에게 제공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마르크스주의에서 헛되이 찾았다”(Labriola, 1973: 673-677). 즉, 역사 문제들에 대해 신뢰할 만한 요약된 해결책을 찾았다.

이런 전집(opera omnia)의 발간을 담당할 당연한 실행자는 유산(Nachlaβ)의 소유자이며, 언어와 이론에서 가장 뛰어난 역량을 갖춘 당원들이 있는 독일 사회민주당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 내의 정치적 갈등은 마르크스의 거대한 양의 미출판 저작들의 출판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체계적 출판을 위한 어떤 제안에도 타협하여 그의 수고들이 분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Rubel, 1956: 27). 믿을 수 없게도 독일사민당은 관리 책임자 역할을 전혀 하지 않았고, 그들의 문헌 유산을 가장 태만하게 취급했다(Ryazanov, 1925: 385-386). 당의 이론가들 중 아무도 두 창시자의 지적 재산 목록을 만들지 않았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저작들의 일부는 아니지만 의미의 명확화를 위해 매우 유용한 자원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방대하지만 흩어져 있던 서신들을 모으는 데 헌신하지 않았다.

최초의 전집 출판이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엥겔스 전집』(MEGA)은 모스크바에 있는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소장인 다비드 보리소비치 리아자노프의 주도로 겨우 1920년대에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이 작업도 종종 발간에 유리하기보다 장애를 형성했던 국제 노동자 운동의 격랑들 때문에 좌절되었다. 이 계획에 참여했던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소련에서의 스탈린 숙청작업과 독일에서 나치의 부상은 그 발간을 조기에 중단시켰다. 이것은 그의 저작들이 부분적으로 발굴되지 않았던 한 저자로부터 영감을 이끌어냈던 경직된 이데올로기의 모순적 결과물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확신과 교조적 체계(dogmatic corpus)로의 결정화가 마르크스 사상의 형성과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했던 그 저작들을 파악하는 것보다 앞섰다(Rubel, 2000: 81).

사실상 초기 저작들은 MEGA에서 1927년이 되어서야 『헤겔 법철학 비판』과 1932년이 되어서야 『1844년 경제학과 철학 수고』와 『독일 이데올로기』로 출판되었다. 『자본론』 2권과 3권에서 이미 벌어진 일처럼, 그것들은 마치 완전한 작품들인 것처럼 편집되어 출판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선택이었고, 나중에 수많은 해석상의 오해들을 낳은 원천이 되었다. 나중에는 『자본론』을 위한 중요한 예비 작업들 중의 일부로 1933년에 「직접적 생산과정의 결과들」이라는 『자본론』 제6편의 초안, 그리고 1939년과 1941년 사이에 『그룬트리세』로 더 잘 알려진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등이 한정 부수로 인쇄되어 출판되었다. 더욱이 이들 미출판 저작들이 숨겨지지 않고 출간되었을 때, 뒤따르는 것들도 마찬가지지만, 지배적 이데올로기적 규범을 침식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정치적 필요에 맞는 해석을 동반했다. 이런 해석은 가장 좋게 가정하더라도 이미 전제되어 있는 해석에 맞추는 것이고 따라서 마르크스 저작에 대한 중요하고도 포괄적인 재평가를 하지 못하게 한다.

선집의 첫 번째 러시아 판본(소치네니아, Sočinenjia[전집])도 또한 소련에서 1928년에서 1947년 사이에 완결되었다. 전집이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저작 중 일부만 포함했지만, 28권(33책)으로 이루어진 이것은 당시에는 양적 측면에서 두 저자의 가장 완전한 선집이었다. 두 번째 소치네니아는 1955년에서 1968년 사이에 39권(42책)으로 출판되었다. 독일민주공화국(동독)에서 1956년부터 1968년까지 사회주의통일당(SED) 중앙위원회의 주도 하에 43책 41권의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집』(MEW)이 출판되었다. 이 판본도 완성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소련 판본의 모델을 따라 독자를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로 유도하는 머리말과 주석들에 의해 짓눌려졌다.

광범하고도 비판적인 기구를 통해 두 사상가의 모든 저작들을 충실히 재생산하고자 했던 “두 번째” MEGA 계획이 1960년대 동안에 다시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5년부터 시작된 출판이 또 중단되었는데, 이번에는 1989년의 사건 때문이었다. 1990년에 이 계획을 계속하려는 목적으로 암스테르담의 국제사회연구소와 트리에의 칼 마르크스 하우스가 국제 마르크스-엥겔스 재단(IMES)을 만들었다. 재조직의 어려운 국면을 지난 뒤 새로운 편집 원칙이 승인되고 아카데미 출판사(Akademie Verlag)가 디에츠 출판사(Dietz Verlag)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소위 MEGA2의 출판이 1998년에 시작되었다.

MEGA²: 오해받던 저자의 재발견
완전히 잊혀질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지난 몇 년 동안 마르크스는 국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의 가치를 다시 주장했고, 유럽, 미국, 그리고 일본의 도서관 서가에 있는 그의 저서에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 이런 재발견의 가장 중요한 예는 바로 MEGA2의 지속이다. 여러 나라들에서 참가한 다양한 학문적 역량을 지닌 학자들이 참가하는 이 완전한 계획은 4개 부문으로 이루어졌다; Ⅰ부는 모든 저작들, 논문들, 그리고 『자본론󰡕을 포함한 초고들을 포함하고 있다; Ⅱ부는 1857년부터 시작된 『자본론󰡕과 그 예비 연구들을 포함하고 있다; Ⅲ부는 편지들을 다루고 있다; 반면 Ⅳ부는 발췌문, 준비 노트, 그리고 장서의 방주를 포함하고 있다. 계획된 114권 중 53권이 출판되었는데(1998년에 재개된 이후 13권), 각 권은 2책, 즉 본문과 색인들과 많은 부기들을 포함한 중요한 연구자료로 이루어져 있다. 마르크스의 수고와 방대한 서신자료의 중요한 부분 그리고 그가 독서하는 동안 습관적으로 작성하였던 산더미같이 거대한 발췌록과 주해들이 출간된 적이 없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이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MEGA2 편집자들이 입수한 문서들은 4개 부문에서 모두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Ⅰ부에서는 저작(Werke), 논문(Artikel) 그리고 초고(Entwürfe) 연구가 재개되어 새로운 2권으로 출판되었다. 첫째 권인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논문, 초고, 1855년 1월부터 12월까지』(MEGA2Ⅰ/14, 2001)는 1855년에 <뉴욕 트리뷴>과 브레슬라우의 <신질서>에 기고하기 위해 두 저자가 쓴 200개의 논문과 초고를 포함하고 있다. 정치 및 유럽 외교와 관련된 잘 알려진 저작들과 국제경제 정세와 크리미아 전쟁의 고찰을 담은 모음집이라는 것 외에도 이 연구는 미국 신문에 익명으로 실렸기 때문에 이전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21개의 논문을 포함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편 둘째 권인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논문, 초고. 1886년 10월부터 1891년 2월까지』(MEGA2Ⅰ/31, 2002)는 엥겔스의 말기 저작 중 일부를 소개한다. 이 책은 계획과 노트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는 첫 판본을 편집한 베른슈타인의 개입이 있기 전 상태의 「역사에서 폭력의 역할」 초고, 노동자 운동의 조직들에게 한 연설들, 이미 출판된 저작과 논문들의 재출판을 위한 서문들이 들어 있다. 후자 중에서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러시아의 두 세기에 걸친 외교정치」인데, 이 글은 두 세기 동안 러시아 대외 정치의 역사를 다룬 것으로 <신시대>에 개제되었지만 1934년에 스탈린에 의해 탄압을 받았던 것이며, 다른 하나는 카우츠키와 공저한 「역사 사례-사회주의」인데, 각 부분의 저자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더욱이 상당한 흥미를 끄는 것은 IMES에 의해 새 시리즈로 출간된 『마르크스-엥겔스 연감』의 제1권인데, 이것은 전부 『독일 이데올로기』로 이루어져 있다(Marx, Engels and Weydemeyer, 2004). MEGA2의 Ⅰ/5로 예상되는 이 책은 「Ⅰ.포이어바흐」와 「Ⅱ.잔크트 브루노」의 수고들에 해당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들을 포함하고 있다. “쥐새끼들이 갉아먹는 비판”(Marx, 1980: 102)에서 살아남은 7권의 수고들은 독립된 판본으로 구성되어 연대순으로 편집되었다. 저작의 완결적이지 않은 점은 이 판본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이론적 정교화를 책임 있게 규명하는 과학적 연구에 새롭고 확실한 근거들이 주어진다. 지금까지 마르크스의 유물론 개념을 철저하게 표현한 것으로 알려진 『독일 이데올로기』는 이제 원본의 미완성 유고의 성격을 회복한다.

『『자본론』과 예비연구들』인 MEGA2의 Ⅱ부 연구는 최근 몇 년 동안 『자본론』 2권과 3권에 집중되어 왔다.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2권.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편집수고 1884/1885』(MEGA2Ⅱ/12, 2005)는 마르크스가 1865년에서 1881년 사이에 쓴 7개의 다양한 크기의 수고들에 근거하여 엥겔스가 편집한 2권의 텍스트를 포함하고 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로부터 2권에 관해 여러 판본을 받았지만, 출판을 위해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관련하여 특별한 지시를 받지는 않았다. 그 대신 엥겔스는,

[…] 구어체들로 가득 차 있는 부주의한 문체로 이루어진 원고들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거칠고 유머러스한 표현들과 영어와 불어의 기술적 용어들이 산재한 구절들 또는 전체 문장이나 심지어 전체 페이지가 영어로 되어 있는 구절들이 들어 있었다. 사상들은 저자의 두뇌에서 전개됨에 따라 간단히 적혀져 있었다. […] 장들의 결론들에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는 저자의 욕구 때문에, 종종 나중에 발전시키기 위해 미완성으로 남긴다는 표시가 있는 단지 몇 줄의 흐트러진 문장들만 있곤 했다(Engels, 1884: 7)

그래서 엥겔스는 편집에서 분명한 결정을 해야 했다. 가장 최근의 문헌학적 파악에 따르면, 엥겔스가 원본에 대한 편집적 개입이 약 5,000개에 달한다고 추정되는데, 지금까지 가정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이다. 수정들은 원문에서 추가와 생략, 구조의 변경, 문단의 소제목 삽입, 개념의 대체, 마르크스의 일부 공식화에 대한 재정교화, 다른 언어로 쓴 단어들의 번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업을 마친 뒤에야 인쇄업자들에게 텍스트를 보냈다. 그래서 이 책은 마르크스 수고들의 선별, 구성, 교정의 전 과정을 우리가 재구성할 수 있게 해주고, 엥겔스가 수정한 가장 중요한 곳과,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사실상 그의 연구의 최종착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수고들을 충실히 존경할 수 있게 해 주는 곳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자본론』3권과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정치경제학 비판. 3권』(MEGA2Ⅱ/15, 2004)은 심지어 개략적으로 볼 때도 마르크스가 분명한 형식을 갖추지 않아서 더 많은 복잡한 편집 과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책이다. 엥겔스는 자신의 서문에서 이 판본이 어떠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 극단적으로 미완성된 초고였다. 여러 부분들의 처음은 대체로 매우 주의 깊게 시작되고 심지어 문체에서도 세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 수고가 더 나아갈수록 더 개략적이고 미완성이며 더 많이 옆길로 새고 있고, 주장의 어느 부분에 배치할지를 나중에 판단하기 위해 남겨두어야 했던 지엽적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Engels, 2004: 6)

그래서 1885년에서 1894년의 긴 시간 동안 많은 정력을 쏟아 부었던 엥겔스의 강도 높은 편집 작업은 “생성중의 상태로 기록된”(Engels, 2004: 7) 사상들과 예비 노트들로 구성된 매우 임시적인 텍스트들을 하나의 통일적인 텍스트로 바꾸어놓았는데, 여기서 결론적이고 체계적인 경제이론의 외관이 등장할 수 있었다. 이 점은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자본론』 3권을 위한 수고와 편집판』(MEGA2Ⅱ/14, 2003)이라는 책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1871년부터 1882년까지 씌어진 『자본론』3권에 관한 마르크스의 마지막 6개의 수고들을 포함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엥겔스가 편집자로서 작업할 동안 추가한 부분뿐 아니라 1875년의 “수학적으로 전개된 잉여가치율과 이윤율 사이의 관계”에 관한 긴 부분이다. 엥겔스가 추가한 부분은 출판본에 이르는 과정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준다. 다루고 있는 이 책의 장점을 더욱 확증하는 것은 이 책의 51개 텍스트들 중에서 45개가 여기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막 이룬 (MEGA2의) Ⅱ부의 완성은 마르크스가 남긴 텍스트들의 상태와 엥겔스의 편집 작업의 가치와 한계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해준다.

서신들로 이루어진 MEGA2의 Ⅲ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접촉한 수많은 사람들과 교환한 편지들뿐 아니라 그들이 일생 동안 서로 교환한 편지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서신교환에서 편지들의 총 숫자는 어마어마하게 많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4,000통(그 중 2,500통이 그들 사이에서 교환된 것이다) 이상이 발견되었고, 게다가 MEGA2 이전에는 대부분 출판된 적이 없는 제3자가 그들에게 보낸 10,000통이 발견되었다. 더욱이 비록 보존되어 있지는 않지만, 또 다른 6,000통이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마르크스가 접촉한 사람들과 교환한 편지들을 통해 마르크스의 지적 일대기의 중요한 국면들을 재독해할 수 있게 해주는 4권의 책이 새로 편집되었다.

『칼 마르크스-엥겔스, 1858년 1월부터 1859년 8월까지의 서신교환』(MEGA2Ⅲ/9, 2003)에 모아진 편지들의 배경은 1857년의 경제 불황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에게는 1848년의 패배와 함께 시작된 10년간의 후퇴 이후에 혁명 운동의 고조에 대한 희망을 다시 생겨나게 하는 것이었다: “위기가 노련한 두더지같이 굴을 파고 있다.” 이런 기대가 그에게 지적 생산을 위한 새로운 원기를 주었고, 기대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실현되지는 않았던 “대홍수 이전에” 경제 이론의 기본 개요를 서술하도록 자극했다. 바로 이 시기에 마르크스는 『그룬트리세』의 마지막 노트를 작성했고, 그의 작업을 소책자로 출판할 결심을 했다. 1859년 6월에 출판된 이 작업의 첫 번째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마르크스의 개인적 측면에서 이 시기는 “뿌리 깊은 궁핍”으로 나타난다: “나는 어떤 사람도 이렇게 화폐가 부족한 상태에서 ‘화폐’에 관한 글을 쓴 적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처지가 변덕스러운 점 때문에 “경제학”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그리고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목표를 추구해야 하고, 부르주아 사회가 나를 돈 버는 기계로 전락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소책자는 탄생하지 못했고, 경제학에 관한 다음 번 책의 출판은 출판업자에게 『자본론』 1권을 보낸 1867년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1859년 9월부터 1860년 5월까지 서신교환』(MEGA2Ⅲ/10, 2000)과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1860년 6월부터 1861년 12월까지 서신교환』(MEGA2Ⅲ/11, 2005)은 『보그트 씨』의 출판이라는 고통스러운 일과 칼 보그트(K. Vogt)와 마르크스 사이에 있었던 열띤 논쟁과 관련된 서신교환들을 포함하고 있다. 1859년에 보그트는 마르크스를 1848년 봉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협박하여 살아가는 집단의 우두머리로 묘사했을 뿐 아니라 음모를 꾸민 혐의로 제소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방어할 의무를 느꼈다. 이것은 보그트에 관한 가능한 모든 서류들을 입수할 목적으로 1848년과 그 이후에 정치적 관계를 맺었던 투사들과의 정력적인 서신교환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물이 200페이지에 달하는 논쟁적 소책자 『보그트 씨』다.

제소를 반박하는 데 한 해를 몽땅 잡아먹었고, 그의 경제학 연구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더욱이 그는 이 책이 선풍적일 것으로 기대했지만 독일 언론은 그의 책을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는 개인적인 문제도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낙담스런 재정 문제 – 1861년 말에 마르크스는 “내년이 올해와 똑같다면 나는 차라리 지옥을 택할 것이다” 고 말했다 – 외에도 건강이 좋지 않은 문제가 변함없이 존재했는데, 이는 재정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는 몇 주 동안 작업을 중단해야 했다: “내가 꼭 필요한 정신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소일거리는 수학이다.” 수학은 마르크스의 삶에서 가장 거대한 지적 열정의 대상들 중 하나였다. 1861년 정초에 그가 다시 한 번 간염으로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엥겔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욥만큼 독실하지 않는데도 그처럼 고생하고 있다.” 그는 책을 읽는 데 필사적이어서, 한번은 문화에서 위안을 구하기도 했다. “모든 점에서 불확실한 현 상황 때문에 매우 우울해진 기분을 달래기 위해 나는 투키디데스를 읽는다. 적어도 이런 고전들은 나를 새롭게 한다.” 어쨌거나, 1861년 8월 그는 작업을 부지런히 재개했다. 1863년 6월까지 그는 『잉여가치학설사』를 포함하여 4절지 노트 23권, 1,472페이지를 작성했다. 그 중에서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환을 다루는 첫 5권의 노트가 100년 이상 무시되었다가, 1973년에서야 러시아어로 그리고 1976년에 원래 언어로 출판되었다.

『칼 마르크스-엥겔스, 1864년 10월부터 1865년 12월까지 서신교환』(MEGA2Ⅲ/13, 2002)의 주요한 주제는 1864년 9월 28일 런던에서 창립된 국제노동자협회에서의 마르크스의 정치 활동이다. 이 편지들은 그 조직의 초창기에 마르크스의 활동 기록을 담고 있는데, 그 활동 기간에 그는 지도적 역할을 재빨리 획득했고 16년 이후에 다시 한 번 최우선 관심사가 된 이런 공적 의무들을 과학적 작업과 결합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논쟁이 된 쟁점들 중에는 노동조합 조직의 기능이 있었는데, 그는 그 조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프러시아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아 협동조합을 만들자는 라쌀레의 제안에 반대했다: “노동자 계급은 혁명적이며, 그렇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 오웬주의자 존 웨스톤(J. Weston)과의 논쟁은 그가 죽은 뒤인 1898년에 글들을 모아 『가치, 가격 그리고 이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미국 내전에 대한 고찰들; 그리고 『프러시아의 군사 문제와 독일 노동자당』이라는 엥겔스의 소책자.

역사적으로 중요한 판본의 진귀함은 Ⅳ부의 ‘발췌문, 준비 노트, 장서의 방주들’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엄청난 작업에 대한 중요한 시금석이 되는 수많은 요약들과 연구 주석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읽은 책들에서 발췌문을 기록한 노트를 모아두었다가 종종 노트들이 그를 자극하여 아이디어를 얻으면 노트들을 없애버리는 습관을 평생 지니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유산(Nachlaβ)에는 대략 200권의 요약 노트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들은 마르크스 이론의 발생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그 중 일부는 그가 바라는 바대로 발전시킬 기회를 갖지 못했다. 1838년부터 1882년까지 오랜 기간에 작성되어 보존된 발췌문들은 8개 국어로 씌어졌고 – 독어,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 불어, 영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그리고 러시아어 – 광범한 학문 분야를 다루고 있다. 그것들은 철학, 예술, 종교, 정치, 법, 문학, 역사, 정치경제, 국제관계, 기술, 수학, 생리학, 지질학, 광물학, 농경학, 인종학, 화학, 그리고 물리학 자료들뿐 아니라 신문, 잡지 기사, 의회 보고서, 통계자료, 그리고 정부기관의 출간물들에서 뽑은 발췌물들이다. 정부기관의 출간물들 중에서 유명한 “청서”(Blue Books), 특히 『공장 감독관의 보고서들』은 그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조사결과들을 포함하고 있다. 많은 부분이 아직 출판되지 않은 이 거대한 지식의 보고는 마르크스의 비판이론이 만들어진 곳이다. 32권으로 계획되어 있는 MEGA2의 Ⅳ부는 최초로 이것들에 대한 접근을 제공할 것이다.

네 권이 최근에 발간되었다. 『칼 마르크스, 1844년 여름부터 1847년 초까지 발췌문과 준비 노트』(MEGA2Ⅳ/3, 1998)는 마르크스가 1844년 여름부터 1845년 12월까지 작성하여 모은 8권의 발췌 노트를 포함하고 있다. 첫 2권은 파리에서의 체류기간 동안의 것인데, 1844년의 『경제학과 철학 수고』바로 뒤에 작성된 것들이다. 나머지 6권은 파리에서 추방된 뒤에 갔던 브뤼셀에서의 시기와 7월과 8월에 머물렀던 영국에서의 기간 동안 작성된 것이다. 이 노트에는 정치경제학과의 조우를 보여주는 자취와 경제이론의 첫 번째 정교화 과정이 들어 있다. 이것은, 보아규베르(Boisguillebert), 로더데일(Lauderdale), 시스몽디(Sismondi)로부터 발췌된 것처럼, 슈토르히(Storch)와 로시(Rossi)의 정치경제학 소책자에서 뽑은 발췌들과 기계와 제조업의 기술과 관련해서는 배기지(Baggage)와 유어(Ure)로부터 발췌한 것이다. 출판되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 시기의 저술들이 담긴 노트들을 비교해 보면 이런 독서들이 그의 사상의 발전에 미친 논박할 수 없는 영향력이 명백히 드러난다. 성숙화의 역사적 재구성을 하고 있는 이들 노트의 총체성은 강도 높은 작업을 하던 시기에 형성된 그의 비판적 사상의 진전과 복합성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 텍스트는 또한 유명한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포함하고 있다.

『칼 마르크스, 1853년 9월부터 1855년 1월까지 발췌문과 준비노트』(MEGA2Ⅳ/12, 2007)는 주로 1854년에 작성된 9권의 방대한 발췌 노트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들은 <뉴욕 트리뷴>에 중요한 일련의 기사들을 발표했을 때와 같은 시기에 쓴 것들이다: 1853년 10월에서 12월 사이의 “팔머스톤 경”(Lord Palmerston)에 관한 것들, 1854년 7월에서 12월 사이의 “혁명적 스페인”에 관한 생각들이 그것이다. 반면 크리미아 전쟁에 관한 글들 – 거의 전부가 엥겔스에 의해 씌어진- 은 1856년에 나왔다. 그 가운데 4권은 외교사에 관한 주석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주석들은 주로 역사가 파민(Famin)과 프란시스(Francis), 법률가이자 독일 외교관인 폰 마르텐즈(von Martens), 토리당 정치가 어쿠하트(Urquhart)뿐 아니라 “레반트 정세에 관련된 서신교환”과 “의회 논쟁에 관한 의사록”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스페인 작가 데 호베야노스(de Jovellanos), 스페인 장군 상 미구엘(San Miguel), 그의 동료 데 마를리아니(de Marliani), 그리고 다른 많은 작가들의 것에서 발췌된 또 다른 5권은 주로 스페인에만 집중한 것으로, 마르크스가 스페인 사회와 정치사 및 문화를 심도 깊게 검토했음을 보여 준다. 게다가 오거스틴 티에리(A. Thierry)의 「평민의 형성과 진보의 역사에 관한 논문」에서 발췌한 노트는 특히 흥미롭다. 이 노트들은 모두 매우 중요한데, 그것들은 마르크스가 이용한 원자료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가 기사 작성을 위해 이런 독서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마지막으로 엥겔스가 작성한 군대의 역사에 관한 일련의 발췌를 포함하고 있다.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자연과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커다란 관심이 『칼 마르크스, 자연과학에 관한 발췌문과 준비노트. 1877년 중반부터 1883년 초까지』(MEGA2Ⅳ/31, 1999)에서 드러난다. 이 책은 1877-1883년에 유기화학과 비유기화학에 관한 노트를 보여주는데, 그것을 통해 우리는 마르크스가 한 작업의 깊숙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연구들은 수많은 그의 전기들에서 언급되는 거짓 전설, 즉 마르크스를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자신의 연구를 포기하고 지적 호기심을 완전히 충족시켰던 작가로 묘사하는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출판된 노트들은 화학공식들, 화학자 마이어(Meyer), 로스코(Roscoe), 쇼를레머(Schorlemmer)의 책에서 발췌한 글들, 그리고 물리학, 생리학, 지질학에 관한 노트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학문 분야들은 19세기 마지막 4반세기 동안에 중요한 과학적 발전들이 번성했던 영역이었데, 마르크스는 이에 관해 항상 알고 싶어했다. 이 연구들은 마르크스가 가장 적게 탐구한 분야들 중의 하나다. 그런데 이것들은 『자본론』의 집필 작업과 직접 관련되지 않았기에 마르크스가 관심을 기울인 이유들에 관하여 답하지 않은 물음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같은 시기에 엥겔스가 쓴 유사한 주제에 관한 발췌문들이 있다.

마르크스의 수고들이 출판되기 전에 여러 번의 기복을 겪었다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소유한 책들은 더 불행한 운명을 겪었다. 엥겔스의 사후에 흥미로운 장서의 방주들과 밑줄들이 그어져 있는 책들을 포함하고 있는 두 명의 장서들은 무시되었고, 부분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재구성되어 어렵게 목록이 작성되었다.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장서들』(MEGA2Ⅳ/32, 1999)은 사실상 75년간의 연구 성과물이다. 2,100권으로 이루어진 1,450책 –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소유했던 것의 3분의 2에 해당 – 에 관한 색인은 주석들이 있는 각 책들의 모든 페이지 기록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MEGA2가 오늘날 입수할 수 없는 책들에 관한 색인(회생시킨 책의 총 권수는 3,200권의 2,100책이다), 830권의 40,000페이지에 표시된 장서 방주들, 그리고 책들의 여백에 쓴 논평들의 출판과 함께 완료할 때 통합될 예정으로 미리 출판된 것이다.

마르크스와 가까웠던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마르크스는 책들을 사치의 대상이 아니라 작업 도구로 생각했다. 그는 책들을 거칠게 다루었고, 페이지의 끝을 접었으며, 밑줄을 그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책에 대해 “그것들은 나의 노예들이고, 내 의지에 복종해야 한다”(Lafargue, 1965: 152)고 말했다. 한편 그는 “역사의 배설물에 다른 형태로 배설하기 위해 책들을 게걸스럽게 먹도록 저주받은 기계” 라고 자신을 규정할 정도로 책들에 극단적으로 매진했다. 독서에 관련된 논평뿐 아니라 그의 독서의 일부를 알 수 있다는 것 – 그리고 그의 장서는 런던에 있는 대영박물관에서 수십 년 동안 수행한 지칠 줄 모르는 작업의 부분적 횡단면만을 보여 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은 그의 연구의 재구성을 위한 소중한 자원이다. 또한 이것은 그의 사상을, 사실상 그렇듯이, 선행자와 동시대인들로부터 추출한 이론적 요소들을 충분히 정교화한 것이 아니라 벼락처럼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의 산물로 보는 거짓 성인전의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해석을 논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새 판본으로부터 어떤 새로운 마르크스가 떠오르는가? 수많은 추종자들과 반대자들이 오랫동안 받아들인 것과는 확실히 다른 마르크스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그의 저작들의 배포 과정과 저작들을 완전히 통합한 판본이 없었다는 점은, 그 근본적 불완전성, 모방자들의 극악무도한 짓들, 경향성이 있는 독서, 마르크스를 읽는 데서 수많은 실패들과 함께, 거대한 역설의 근본 원인들이었다: 칼 마르크스는 오해를 받은 저자이며, 심각하고 종종 반복되는 몰이해의 희생양이다. 오늘날 우리는 마르크스를 교조적 확신으로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타나는 동유럽의 비자유주의 정권의 많은 광장에서 볼 수 있는 딱딱한 모습의 동상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자신의 테제들의 유효함을 증명하는 연구에 헌신하기 위해 저작의 많은 부분을 미완성으로 남긴 저자로 인식할 수 있다. 그의 저작들에 대한 재발견에서 미래의 마르크스 연구(Marx Forschung)를 위한 풍부한 지평을 형성하는 문제의식적이고 다형적인(polymorphic) 사고의 풍부함이 다시 등장한다.

“죽은 개” 마르크스
이론적 갈등이나 정치적 사건들 때문에 마르크스의 저작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지속적이지도 않았고 또 그 출발부터 논란의 여지가 없는 쇠락의 시기를 경험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위기”에서부터 제2인터내셔널의 해체까지, 잉여가치이론의 한계에 관한 토론에서부터 소련 공산주의의 비극에까지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비판들은 항상 그 개념적 지평을 넘어서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로 귀환”이 항상 있어왔다. 그의 저작에 대해 언급할 새로운 필요가 생겨나고 있으며, 정치경제학 비판에서부터 소외에 관한 공식화 또는 정치적 논쟁의 화려한 지면들에까지 추종자들과 반대자들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계속 행사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기말에는 사라졌다고 이구동성으로 선언했던 마르크스의 모든 것이 갑작스레 역사의 무대에 재등장했다.

과거에 위임되었던 지배의 도구(instrumentum regni)라는 끔찍한 기능에서 해방되고 이제는 확실히 분리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슬로부터 벗어난 마르크스의 저작들은 신선한 지식의 영역에서 재배치되고, 전 세계에서 다시 읽혀지고 있다. 뻔뻔스러운 소유자들과 제한된 사용 방법에서 떨어져 나온 그의 소중한 이론적 유산이 다시 한 번 만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가 20세기의 회색 “현실 사회주의”라는 조각된 스핑크스와 동일시할 수 없다면 그의 이론적·정치적 유산이 과거에만 한정되어 있고 현재의 갈등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다거나 그의 사상을 오늘과는 무관한 미라가 된 고전으로 규정하거나 또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단지 학술적 전공으로 한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똑같이 잘못된 것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의 귀환은, 중요한 문헌학적 연구가 보여주듯이, 제한된 학자 집단이라는 한계를 훨씬 넘어서서 마르크스에 대한 수많은 해석가들과 관련하여 그 다양성을 증명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재발견은 현재를 설명하는 그의 지속적인 능력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현재를 이해하고 그것을 변혁시키는 데서 필수불가결한 도구로 남아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와 그것을 관통하는 심대한 모순들에 직면하면서 1989년 이후 마르크스가 너무도 빨리 밀려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반향이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를 읽지 않고, 재독해하지 않고, 토론하지 않는 것은 항상 잘못이다”(Derrida, 1993: 35)라는 자크 데리다(J. Derrida)의 단언은 몇 년 전만 해도 고립된 도발로 보였지만 이제는 지지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신문, 정기간행물,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들이 계속해서 우리 시대와 가장 관련 있는 사상가로서 마르크스를 논의하고 있다. 1998년에 출판 150주년을 맞이하여 『공산주의자 선언』은 전 세계 곳곳에서 수십 개의 신규 판본이 출판되었고, 역사상 가장 많이 읽힌 정치 저작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경향들에 대한 가장 혜안을 가진 예측으로 칭송을 받았다(Habsbawm, 1998: 3-74). 게다가 지난 15년 전부터 거의 사라졌던 마르크스를 다루는 문헌이 등장해 여러 나라들에서 부활의 신호를 보여주고 있고, 새로운 연구가 번성하는 것과 함께 가령 『왜 오늘날 마르크스를 읽는가?』 같은 제목의 수많은 소책자들이 여러 언어로 출판되고 있다. 이 저자에게 바쳐진 국제학술대회, 대학 학과과정, 세미나 등이 있는 것처럼, 마르크스와 다양한 마르크스주의를 다루는 기고 논문에 개방적인 학술지들이 이와 비슷한 합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마지막으로, 비록 소심하고 종종 혼돈스러운 방식이라 할지라도 – 남미에서 유럽까지 그리고 대안세계화운동을 거치면서 –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수요가 또한 정치적 측면에서 등장하고 있다.

오늘날 마르크스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가? 그의 사상이 인류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얼마나 유효한가? 그의 저작의 어떤 부분이 우리 시대에 대한 비판을 고무하는 데 가장 기름 진 토양인가? 우리는 어떻게 “마르크스와 함께하면서 그를 넘어설” 수 있을까? 이것들은 결코 만장일치가 아닌 대답들을 듣게 될 몇 가지 질문들이다. 현재의 마르크스 르네상스에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철학자에 대한 해석을 지배했고 또 조건지웠던 천편일률적(monolithic) 정설들이 특징이었던 과거와는 불연속 상태에 있다는 점이다. 명백한 한계와 절충주의(syncretism)의 위험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마르크스들이 특징인 시대가 도래했고, 정말이지 교조주의의 시대가 지난 뒤로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교조주의가 나타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응하는 과제는 새 세대의 학자들과 정치 활동가들이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연구에 달려 있다.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남아 있는 마르크스들 중에서 적어도 두 가지는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비판가이다: 그는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발전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분석하였으며, 부르주아 사회를 어느 누구보다 더 잘 묘사하였던 분석적이고 통찰력 있으며 지칠 줄 모르는 연구자였다. 이 사상가는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 체제를 인간 본성에 내재한 영원한 각본으로 여기기를 거부했으며, 신자유주의 경제·사회·정치 조직들에 대한 대안들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제안들을 제공하고 있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또 다른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의 이론가이다: 그는 이미 당시에 라쌀레와 로드베르투스가 주장했던 국가사회주의라는 생각을 논박한 저자였다; 사회주의를 사회 문제들에 대한 부드러운 완화제들이 아니라 생산관계의 가능한 변혁으로 이해했던 사상가였다. 마르크스가 없다면 우리는 치명적인 실어증에 걸릴 것이며, 인간 해방의 대의는 그를 계속 이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의 “유령”은 전 세계에 배회하며 앞으로 다가올 한참 동안 인류를 뒤흔들 운명이다.

번역 하태규

References
1. 이 글은 International Review of Social History의 52호(2007: 477-498)에 실린 것이다.
2. 마르크스의 전기작가 보리스 니콜라에프스키와 오토 멘첸-헬펜은 그들의 저서 서문에서 “수천 명의 사회주의자들 중에서 아마도 단 한 명만이 마르크스의 경제 저서를 읽었을 것이다; 수천 명의 반(反)마르크스주의자들 중에서는 단 한 명도 마르크스를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Nikolaevskij and Maenchen-Helfen, 1976: Ⅶ).
3. 리아자노프는 1931년에 해고되어 추방되었고, 그 발간은 1935년에 중단되었다. 원래 계획된 42권 중 단지 12권(13책)만 출판되었다(Marx and Engels, 1933; Ryazanov(ed), 1932).
4. 예를 들면 이 판본도 1844년의 『경제학과 철학 수고』와 『그룬트리세』를 포함하지 않다가 나중에 추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언어로 된 많은 유사 판본들이 MEW에 근거하였다. 이 판본의 재출판이 2006년에 시작되었다.
5. MEGA2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www.bbaw.de/vs/mega를 통해 이용할 수 있다.
6. “칼 마르크스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1858년 2월 22일”, 상동, p.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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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칼 마르크스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1860년 11월 23일, 상동”, p. 229.
13. “칼 마르크스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1861년 1월 18일, 상동”, p. 319.
14. “칼 마르크스가 페르디난트 라살레에게, 1861년 5월 29일, 상동”, p. 481.
15. “칼 마르크스가 요한 침례교파인 쉬바이쩌에게, 1865년 2월 13일”, 상동, p. 236.
16. “칼 마르크스가 라우라와 폴 라파르그에게, 1868년 4월 11일”,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 32권(베를린, 1965), p. 545.
17. 지금까지 설명한 “마르크스주의적” 오해 다음에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반마르크스주의적” 오해도 지적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편견에 사로잡힌 적대감 때문에 역시 심각하다.
18. 이런 방향으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킨 첫 번째 논문은 존 캐시디(J. Cassidy)의 것이다(Cassidy, 1997: 248-259). 그 다음은 천 년 동안 가장 위대한 사상가의 왕관을 마르크스에게 수여한 BBC의 차례였다. 몇 년 뒤 주간지 Nouvel Observateur가 “칼 마르크스 – 세 번째 천 년의 사상가인가?”(Nouvel Observateur, 1 October 2003)라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곧 이어 독일은 40년 동안 추방당했던 그 사람에게 헌사를 바쳤다. 국립 텔레비전 방송 ZDF의 500,000명이 넘는 시청자가 마르크스를 모든 시대를 통틀어 독일인 중 세 번째 중요한 인물로 뽑았다(그는 “현재와의 관련성” 범주에서는 1위였다). 그리고 지난 총선에서 유명한 잡지 Der Spiegel은 ‘유령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마르크스가 손으로 승리 표시를 하는 사진을 표지에 실었다(Der Spiegel, 22 August 2005). 이런 흥미로운 모음의 결정판이 2005년 BBC라디오4에서 실시된 투표였는데, 여기서 영국 청취자들은 마르크스에게 가장 존경하는 철학자의 영예를 수여했다.
19. 지난 수년간 출판된 수많은 책들을 여기서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가장 대중적이고 중요한 찬사를 받은 책은 언급되어야 한다. 베스트셀러가 된 두 신간 전기서 – 프랜시스 윈(F. Wheen)의 『칼 마르크스』(런던, 1999)와 자크 아탈리(J. Attali)의 『칼 마르크스 또는 시대정신』(파리, 2005) – 는 그 사상가의 삶을 트리에에 살 때부터 집중 조명하고 있다. 모이쉬 포이스톤(M. Poistone)의 책 『시간, 노동 그리고 사회적 지배』(캠브리지)는 어울리지 않게도 1993년에 출판되었고, 그래서 그때 이후 몇 차례 재출판되었다; 이 책과 마찬가지로 트렐 카버(T. Carver)의 『포스트모던 마르크스』(맨체스터, 1998)와 마이클 A. 리보위츠(M. A. Lebowitz)의 『자본론을 넘어』(런던, 2003, 두 번째 판) 같은 책들은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혁신적이고 포괄적 해석으로 두드러진다. 그의 초기 저작에 관한 최근의 연구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 데이비드 레오폴드(D. Leopold)의 『젊은 마르크스: 독일 철학, 현대 정치, 그리고 인류의 번영』(캠브리지, 2007)이 그것이다. 게다가 존 벨라미 포스터(J. B. Foster)의 『마르크스의 생태주의』(뉴욕, 2000), 폴 버킷(P. Burkett)의 『마르크스주의와 생태주의 경제학』(보스턴, MA, 2006)은 마르크스를 환경 문제와 연결시킨 것으로 가치가 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의 증거로 남미의 사상가 엔리케 두셀(E. Dussel)의 『알려지지 않은 마르크스를 향하여』라는 주요 저작의 영어 번역물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또한 서구 언어들과 점점 친숙해지고 있고, 교조적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더 멀어지고 있는 중국의 신세대 연구자들의 이론적 발전뿐 아니라 히로시 우치다(H. Uchida)가 편찬한 일본의 몇 가지 연구를 묶은 『21세기를 위한 마르크스』도 있다.
20. 가장 중요한 잡지들 중에는 영어권에서는 Monthly Review, Science & Society, Historical Materialism, Rethinking Marxism 등이 있고, 독일에서는 Das Argument, Marx-Engels-Jahrbuch, 프랑스에서는 Actuel Marx, 이탈리아에서는 Critica Marxista, 아르헨티나에서는 Herramienta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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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로 타이핑해서 참고문헌 형식으로 맞추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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